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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2006년 교과서 | 2007년 교과서 |
고조선 건국 |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 |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
청동기시대 |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주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기원전 13세기경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 | 신석기시대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문화가 앞선 빗살무늬토기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들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 |
아직 학계에서는 이론이 있지만 한국 청동기시대의 상한은 종래 기원전 10세기에서 20~15세기까지 올라 갈 수 있다. | 한국 청동기시대의 상한은 종래 기원전 10세기에서 20~15세기까지 올라 갈 수 있다. |
2. 청동기시대의 생활
가. 거주지(居住地)
구릉지대에 살았고 집터는 대체로 직사각형으로 움집(竪穴住居, 土幕, 庴幕)의 깊이가 낮아져 점차 지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이며 움집 중앙의 화덕은 한쪽으로 옮겨지고 저장구덩(貯藏穴)도 따로 설치하거나 한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들었다. 주춧돌을 이용하기도 했고 나지막한 구릉 위에 토성(土城)이나 목책(木柵)과 환호(環濠)로 외부침입에 대비하였다.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작업장, 집회소, 공동의식장소 등도 있었다.
나. 유적지
강원 양양 지경리, 충남 부여 송국리. 여주 흔암리(欣岩里)
다. 유물
⑴ 청동제품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遼寧式銅劍), 거친 무늬거울(多鈕粗文鏡), 청동검(靑銅劍), 화살촉(靑銅鏃), 청동창(靑銅戈), 청동방울(靑銅鈴), 방패형동기(防牌形銅器)
밑바닥이 좁고 아가리를 뒤집어 겹으로 만든 (二重口緣, 이중구연) 적갈색을 띤 민무니토기(無文土器),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 刻目突帶文土器), 미송리식토기, 붉은간토기(홍도(紅陶),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 흑도(黑陶), 가지무늬토기(架子文土器)
⑶ 기타
반달형돌칼(半月形石刀), 바퀴날도끼(달도끼, 환상석부, 環狀石斧), 홈자귀(有溝石斧) 등
바퀴날도끼(달도끼, 환상석부, 環狀石斧)
자름면을 보면 중심부 양면이 모두 볼록한 것, 한쪽 면만 볼록하고 반대면은 판판한 것, 가운데 구멍 둘레에만 볼록 튀어 나오게 만든 것 등이 있다. 가운데 구멍을 뚫은 것은 나무자루 같은 것에 꿸 수 있도록 한 것인데 크기는 지름 10~15cm의 것이 대부분으로, 도끼로 쓰였다기보다는 지휘봉 같은 권위의 상징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나뭇가지에 끼워 불씨를 일으킬 때 회전력을 크게 하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톱니날도끼[多頭石斧:별도끼]와 함께 청동기시대에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의 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BC 2000년대 후반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뤼다[旅大] 쌍타자 유적을 비롯해 용천 신암리, 송림 석탄리, 강계 공귀리, 시중 심귀리 유적 등 북쪽 지방의 BC 1000년대 유적에서 주로 보이고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물이다.
생활용: 무산 범의 구석 집자리 가장 아래 문화층(신석기시대 최말기)(굽접시, 구멍무늬토기들과 함께 출토),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유적
무덤의 껴묻거리용(副葬用品) : 고인돌 안에서 민무늬토기 및 간석기들과 함께 출토되며 주로 주머니 모양의 짧은 목단지가 대표적인 모습이나 최근에는 춘천 중도의 고인돌에서 보이듯 납작밑의 대접 모양도 출토
라. 무덤
고인돌(支石墓, dolmen), 돌널무덤(石棺墓), 돌무지무덤(積石塚)이 있었고 말기에 독무덤(甕棺墓)과 널무덤(木棺墓)도 생겨났다. 선돌(立石, menhir)과 함께 거석문화를 형성하는 고인돌(支石墓, dolmen)은 무게가 수십톤, 큰 것은 수백톤에 달하고 이렇게 큰 돌을 옮기려면 많은 씨족원을 동원할 수 권력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고인돌은 전국 각자에 분포하고 있으며 그 방식은 네 개의 판석(板石)을 네모지게 짠 위에 널따란 덮개돌(蓋石)을 올려 놓은 탁자식(卓子式, 北方式), 매장의 주체부를 지하에 두고 그 위에 작은 돌이나 돌무지(積石)로 지탱된 덮개돌을 올려 놓는 기반식(基盤式, 南方式) 및 전혀 받침돌 없이 덮개돌을 직접 매장부 위에 올려 놓은 개석식(蓋石式)외에 묘역식고인돌(墓域式支石墓), 원형고인돌묘(圓形支石墓, 경남 산청군 매산리, 경남 진주시 초전동)이 있으며 2000년 고창, 화순, 강화고인돌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인돌의 부장품으로서 간돌칼(磨製石劍)이 주로 발견되고 청동기, 비파형동검(전남 순천시 우산리 고인돌)도 출토되기도 한다. 돌널무덤(石棺墓)은 지하에 널찍한 직사각형의 돌로 상자 모양의 널(棺)을 만들어 그 안에 시체를 매장하고 둥글게 흙을 덮은 것으로 고인돌에서 한단계 진화한 것으로 때로는 고인돌과 결합되어 있기도 한다. 돌무지무덤(積石塚)은 돌널(石棺) 위에 돌을 쌓아 올린 것으로 웅진 시도, 통영 연대도・옥시도, 춘천시 진천리등에서 보인다. 청동기 말기에서 철기시대에는 옹기 안에 사람의 뼈를 추려서 매장하는 독무덤(甕棺墓)과 널무덤(木棺墓)도 유행했다. 독무덤(甕棺墓)은 2차장의 성격이 짙고 어린이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마. 경제생활
종래 사냥(狩獵, 수렵), 고기잡이(漁撈, 어로), 채취와 수집(採集, 채집) 생활 외에 조, 피, 수수, 기장, 콩, 보리 등 밭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 졌으며 BC 8세기경 일부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부안, 김해 패총과 대동강 유역 등지에서 탄화미가 뱔견되었다.
바. 사회변화
생산경제의 발전과 사회진보로 인해 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화되고 사유재산 제도로 빈부격차가 생겨나고 선민사상(選民思想)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군장국가(성읍국가)가 생겨났다.
사. 예술
종교나 정치적 요구를 반영하여 암각화로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巖刻畵)와 고령 양전동 바위그림(巖刻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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