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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남북국 시대의 성립과 발전
제1절 남북국 시대의 정치
Ⅰ. 통일 신라 중대의 정치적 발전
구분 | 1대박혁거세~22대지증왕 |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 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
삼국사기 | 상대(上代) | 중대(中代) | 하대(下代) | |
삼국유사 | 상고(上古) | 중고(中古) | 하고(下古) |
1. 통일신라 중대 전제왕권의 확립
가. 통일 이후의 신라
확대된 영토와 백성을 지배하면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나. 무열왕계의 왕통 성립
진골 출신 김춘추가 상대등 비담(毘曇)의 반란을 진압하고 상대등 알천(閼川)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54~661년)이 왕위에 오르고 이후 그의 직계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다. 왕권의 전제화
집사부의 시중(侍中)의 권한이 강화되고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上大等) 세역을 억제되고 갈문왕(葛文王)제도가 소멸했다.
2. 통일신라 중대의 체제정비
가. 중앙제도
법흥왕 18년 531년에 설치된 화백회의 의장으로서 귀족의 대표자격인 상대등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상대등보다는 진덕여왕 5년 651년에 설치된 집사부(執事部. 중시→시중)가 핵심관부로서 위화부를 비롯한 13부의 기능을 총괄하게 하고 감찰기구인 사정부를 설치했다.
나. 지방제도
주군현(州郡縣)제도로서 신문왕 5년 585년에 9주로 정비되었다.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소경이라 하였고 5소경(五小京)은 中原京(충주), 北原京(원주), 金官京(김해), 西原京(청주), 南原京(남원)이었다.
주의 장관
분류 | 장관 |
22대 지증왕 | 군주(軍主)(최초 실직주(강원도 삼척) 군주 이사부(異斯夫)) |
30대 문무왕 | 총관(摠管) |
33대 원성왕 | 도독(都督) |
주 밑에 郡(郡守), 현(縣令), 촌(村主)이 있고 향(鄕), 부곡(部曲)이라는 행정구역도 있었다.
다. 군사제도
통일전의 6정이 신문왕 7년 687년 9서당(九誓幢) 10정(十亭)으로 개편되었다.
⑴ 9서당(九誓幢)
진평왕 5년 583년 부터 시작하여 신문왕 7년 687년에 완성된 중앙군단
녹금서당(綠衿誓幢, 583) 자금서당(紫衿) | 신라인 |
백금서당(白衿), 청금서당(靑衿, 687) | 백제인 |
황금서당(黃衿), 벽금서당(碧衿), 적금서당(赤衿) | 고구려인,보덕국성민(城民)군단2개 |
흑금서당(黑衿) | 말갈인 |
⑵ 10정(十停, 삼천당(三千幢)
9주(九州) | 10정(十停) |
沙伐州(사벌주, 尙州) | 음리화정(音里火停, 상주) |
歃良州(삽량주, 良州) | 삼량화정(參良火停, 달성) |
菁州(청주, 康州) | 소삼정(召參停, 함안) |
熊川州(웅천주, 熊州) |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청양) |
完山州(완산주, 全州) | 거사물정(居斯勿停, 남원) |
武珍州(무진주, 武州) |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나주) |
漢山州(한산주, 漢州)). | 남천정(南川停. 이천)・골내근정(骨乃斤停. 여주) |
首若州(수약주, 朔州) | 벌력천정(伐力川停, 홍천) |
河西州(하서주, 溟州) | 이화혜정(伊火兮停, 청송) |
라. 기타제도
상수리(上守吏)제도와 유학진흥을 위해 신문왕 2년 682년 국학(國學. 경덕왕 6년 747년 태학감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 776년 다시 국학으로 개칭)을 두었다.
31대 신문왕 2년 682년 | 국학(國學) |
35대 경덕왕 6년 747년 | 태학감(태학감) |
36대 혜공왕 12년 776년 | 국학(國學) |
Ⅱ. 통일 신라 하대의 사회 변화
1. 통일신라 중대의 붕괴
가. 진골 귀족의 내부 분열
삼국 통일후 제35대 경덕왕(742~765년)때에는 신라의 문화가 절정기에 도달했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전제주의를 타도를 위한 운동이 일어나 경덕왕은 이를 막기 위하여 한화정책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으나 혜공왕때 대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경덕왕 이후 사회발전은 진골 세력간의 유대를 이완시켜 분열을 가져왔다.
나. 왕위 쟁탈전 전개
중앙정부의 권위 실추로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 상실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다. 왕위 계승 싸움에서 혈통(신분)보다는 정치경제적 실력과 무장력이 중요시 되어 제36대 혜공왕이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사건 | 내용 |
대공(大恭)의 난. 36대 혜공왕 4년 768년) | 수도 및 5道 주군(州郡)의 전국 96명 각간(角干)이 서로 싸워 김대공이 피살되고 대란으로 확대되어 3년간 계속되었다. |
김지정반란(36대 혜공왕 16년 780년)과 37대 선덕왕 즉위 |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이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혜공왕이 살해되어 김양상이 내물마립간 10대손으로서 37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였다. |
38대 원성왕(785년) 즉위 | 내물마립간 12대손 김경신이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하였다. |
39대 소성왕(昭聖王) | |
40대 애장왕(哀莊王) | |
42대 헌덕왕(憲德王) | 김헌창(金憲昌)의 난(헌덕왕 14년 822년)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서 웅주(공주)를 근거로 국호 장안(長安), 연호 경운(慶雲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겼으나 실패하였다. 범문(梵文)의 난(헌덕왕 17년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한산(서울)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
42대 흥덕왕(興德王) | |
43대 희강왕(僖康王, 836~838년) | 흥덕왕의 사후 4촌동생 균정(均貞)과 조카 제륭(悌隆)이 싸워 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 |
4대 민애왕(閔哀王, 838~839년) | 6촌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이고 민애왕으로 즉위 |
45대 신무왕(神武王, 839~839년) |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민애왕을 축출하고 신무왕으로 즉위 |
46대 문성왕(文聖王) | 8년 846년 장보고난(張保皐難) 문성왕 13년 851년 청해진 폐쇄 |
47대 헌안왕(憲安王) | |
48대 경문왕(景文王) | |
49대 헌강왕(憲康王) | |
50대 정강왕(定康王) | |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나. 골품제도의 붕괴
성골은 통일전에 없어졌으며 통일 이후 1~3품이 소멸하고 4두품도 거의 평민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했다.
2. 6두품과 호족 세력의 성장
가. 6두품 세력의 대두
⑴ 학문적 식견에 의한 정계 진출
6두품(得難, 득난)은 중대에는 행정 실무를 담당하고 왕권을 뒷받침했으나 진골 중심의 골품제도와 이를 옹호하는 불교에 대항하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6두품은 신분적 제약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학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학문적 식견에 의하여 정치적 참여의 길을 밟게 되었다.
강수(强首) | 임나출신의 6두품으로 외교문서의 작성에 공이 크고 불교를 세외교(世外敎)라고 비판하고 도덕을 사회적 출세보다 더 중요시 |
설총(薛聰) | 원효(元曉)의 아들로서 6두품으로써 구결(口訣)로써 경서를 읽는 법을 만들고 풍왕서(諷王書, 花王戒(화왕계). 花王 : 모란, 白頭翁(할미꽃, 장부): 충신, 장미 : 간신)에서 국왕도 향락을 배격하고 도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 |
여삼(餘三) | 38대 원성왕의 꿈 해몽을 잘해줌. |
녹진(祿眞) | 상대등 충공(忠恭)의 인사고민을 적절한 충고로 풀어줌 |
최치원(崔致遠) |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시무 10조)을 올림. |
최승우(崔承祐) | 후백제에서 벼슬 |
최인연(崔仁渷, 崔彦撝) | 고려 왕건의 신하가 됨 |
⑵ 신라의 골품제도 비판
6두품은 신라의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반신라적 경향도 띄었다.
나. 호족의 대두
⑴ 해상무역의 발달과 해외에의 관심
골품제에 중앙정치의 참여의 길이 막히자 지방세력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해상무역을 하게 되었다. 해상무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은 청해진(靑海鎭, 완도)의 장보고(張保皐)였으며 그 외에도 강주(康州, 진주)의 왕봉규(王逢圭), 송악(松岳, 개성)의 작제건(作帝建, 왕건의 조부) 등이 있었다.
⑵ 군진세력의 대두
북진(北鎭, 삼척. 29대 태종무열왕 5년 658년), 패강진(浿江鎭, 平山. 37대 선덕왕 3년 782년) 등 신라의 군진은 변경수비를 위해 육지에 설치했다. 그러나 해상에서 해적들의 활동이 심해지자 청해진(靑海鎭, 완도. 42대 흥덕왕 3년 828년 장보고), 당성진(唐城鎭, 남양. 42대 흥덕왕 4년 829년), 혈구진(穴口鎭, 강화. 46대 문성왕 6년 844년) 등과 같이 해안요지에도 차례로 군진을 설치하게 되었고 가장 유명한 것이 패강진(浿江鎭)과 청해진(靑海鎭)이다.
장보고(張保皐, 弓福, 弓巴)
제42대 흥덕왕 3년 828년 장보고의 청에 따라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淸海鎭, 莞島, 828~851)을 설치하였다. 당에 가서 군인으로 출세하여 해적이 성행하여 신라인을 잡아다가 노비를 매매하는 일에 분개한 그는 본국에 돌아와서 흥덕왕에게 청하여 남해의 요해지인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청해진 대사에 임명되어 사병적 성격의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해안지대를 경비하여 해적을 제압하고 당 및 일본과도 활발히 무역을 하여 황해의 해상왕이 되었다.
해상왕 외에도 중앙정치에도 간여하여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44대 민애왕(閔哀王)을 축출하고 45대 신무왕(神武王)에 오르게 하였다. 46대 문성왕(文聖王) 5년 846년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는 문제를 계기로 하여 중앙귀족이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암살되고 문성왕 13년 851년 청해진은 폐지되고 그 군대 1만명은 벽골군으로 옮겨 재생이 억제되었다.
⑶ 성주의 자립
지방의 호족이나 진골, 성골, 6두품 출신의 몰락한 중앙귀족, 촌주들은 일정한 지역에 성을 쌓고 성주 또는 장군으로서 칭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군현의 장관을 대신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지방민에게 조세(租稅)와 역역(力役)을 부과하고 농법도 전하면서 촌락민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어 신라의 중앙정부의 경제력을 잠식하고 있었다.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약화를 틈탄 지방 호족들이 독자적 세력 형성하고 중앙 정부에 항거하기에 이르렀다.
3. 농민 봉기와 후삼국의 성립
가. 농민의 봉기
지방 성주들의 지방민에게 조세(租稅)와 역역(力役) 부과로 중앙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중앙정부는 주・군에 대하여 조세를 독촉항기에 이르렀고 중앙정부와 지방성주들로부터 이중으로 부담을 지게되어 농민들은 반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농민반란은 정치의 부패, 지배층의 불법적인 농토 확대, 가혹한 수탈, 부패․무능한 신라 왕실에 대한 불만 고조의 결과로서 반란의 첫 봉화는 진성여왕 3년 889년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였고 이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연도 | 내용 |
51대 진성여왕 3년 889년 |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
51대 진성여왕 3년 889년 | 완산주(完山主, 전주)의 견훤(甄萱).900 후백제 |
51대 진성여왕 5년 891년 | 죽주(竹州, 안성 죽산)의 기훤(箕萱) |
51대 진성여왕 6년 892년 |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 |
52대 효공왕 3년 899년 | 철원의 양길의 부하 궁예(弓裔).901년 후고구려(기훤-양길-독립) |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궁예의 아버지가 신라 제47대 왕 헌안왕(재위 857~860년) 또는 제48대 왕 경문왕(861~875년)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나. 후삼국의 성립
⑴ 후백제(後百濟)의 건국(900)
견훤(甄萱, 867~936)은 진성여왕 3년 889년 무진주 점령하고 진성여왕 6년 892년 왕을 자칭했으며 효공왕 4년 900년 완산주(전주) 점령하고 자신이 거느린 군사와 전라도 지역의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全州)에서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미륵신앙에 근거한 전제군로서 행세하였다.
⑵ 후고구려(後高句麗)의 건국(901)
일찍이 891년 기훤(箕萱)에 투신한 궁예(弓裔)는 뒤에 892년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고 다시 양길을 타도하고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효공왕 5년 901년 송악에서 후고구려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국호를 904년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 성책(聖冊)으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고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고 하면서 반신라 정책 강화와 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궁예는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아들은 보살(菩薩)이라 하면서 폭군행세를 하다가 신하들에게서 내쫒겨났다.
⑶ 신라의 위축
신라는 후3국의 정립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Ⅲ. 발해(渤海)의 건국과 발전
1. 발해(渤海)의 건국
가. 당나라의 이민족 분열정책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요동지방을 안동도호부 관할에 놓고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기 위하여 보장왕(寶藏王)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임명하였으나 반란을 꾀하여 소환하고 연이어 손자 보원(寶元), 아들 보덕(報德)과 덕무(德武)를 파견했으나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확립하여 소고구려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당은 고구려 유민, 거란인, 말갈인을 영주(榮州, 朝陽)으로 강제로 이주시킨뒤 감시하였다. 영주에서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나. 건국 과정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靺鞨人)은 거란인(契丹人)의 반란을 계기로 대조영(大祚榮)은 영주를 탈출하여 천문령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동모산(東牟山, 돈화)을 근거로 자립하여 698년 진국왕(震國王),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후에 발해(渤海)로 고쳤다. 이로서 남부국시대가 되었다. 발해는 2원적 민족구성으로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 차원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국호 “고구려국” 사용하였다.
연도 | 인물 | 내용 |
677 | 보장왕(寶藏王) | 조선군왕 임명. 부흥운동. 소환~682년 사망 |
685 | 보원(寶元) | 보장왕 손자. 태자 복남의 아들. 조선군왕. 부흥운동 |
686 | 보원(寶元) | 충성군왕. 부흥운동 |
698 | 보덕(報德) | 조선군왕. 부흥운동 |
699 | 덕무(德武) | 보장왕의 아들. 안동도독.부흥운동 |
698 | 대조영(大祚榮_) | 대진(大震). 발해(渤海, 698~926) |
류득공의 발해고(渤海考)ᆞ. 이종휘의 동사(東史).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ᆞ.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ᆞ.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ᆞ. 서상우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ᆞ. 홍석주의 발해세가(渤海世家) 등 조선 후기의 역사서들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적극 인식했다. 특히 발해고와 대동지지는 남북국 용어를 사용하였다.
2. 발해의 발전
왕 | 연호 | 내용 |
2대 무왕(大武藝. 719~737) | 인안(仁安) | 만주와 대부분의 연해주를 차지했다. 당과 신라의 협공을 막기 위해 일본과 돌궐과 통교했다. 아우 대문예(大門藝), 사촌동생 대일하(大壹夏), 외숙 임아상(任雅相)을 시켜 흑수말갈(黑水靺鞨. 흑수라고 불렀던 헤이룽 강(黑龍江)이 동류하여 쑹화 강(松花江)과 만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을 치는 한편 14년 732년 장문휴(張文休)를 시켜 산등을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韋俊)를 죽였다. 당은 33대 신라 성덕왕때 733년 발해의 반역자 대문예(大門藝, 대조영의 차남)과 김사란(金思蘭)을 시켜 발해 남부를 공격했다. 일본에 사신으로 영원장군 낭장 고인의(高仁義)외 24명을 외교문서와 함께 보냈다. |
3대 문왕(大欽茂. 737~793) | 대흥(大興.737), 보력(寶력.744) | 통치체제 3성 6부를 정비했다. 당과 화친을 맺었다. 국립대학격인 주자감(冑子監)을 설치했다.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 상경, 동경으로 옮겼다. 신라와 상설교툥로(신라도)를 개통했다. 많은 유학생을 당에 보내 빈공과에 합격했다. 758년 보덕장군 양승경(陽承慶)과 귀덕장군 양태사(陽太師)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안록산난(安祿山亂. 755~763. 연국. 연호 성무)을 계기로 소고구려국에도 힘을 뻗어 요동까지 지배하였다. |
6대 성왕(成宗, 大華興 , 793~794) | 중흥(中興) | 수도를 동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
10대 선왕(宣王, 大仁秀. 818~830) | 건흥(建興) | 말갈을 복속시켜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했다. 최대의 판도(동 沿海州, 서 遼河, 남 咸南, 북 黑龍江)를 이룩하여 5경, 15부, 62주 등 지방제도를 정비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게 된 시기이다. |
15대 대인선(大諲譔, 907~926) | 926년 거란에 멸망함 |
안록산의 난(안사의 난. 755~763)
755년 안록산과 사사명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756년 1월 안록산은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燕)이라 칭한다.
756년 6월 장안(長安)을 점령한다.
756년 7월 양국충이 처형되고, 양귀비가 자살한다.
757년 위구르족이 장안을 정복하고 유린한다. 1월 안록산은 그의 맏아들인 안경서에게 사형당한다.
759년 안경서가 안록산의 부장이던 사사명에게 사형당한다.
761년 사사명이 맏아들 사조의에게 사형당한다.
762년 당 현종이 사망한다.
763년 사조의의 자살로 난이 평정된다.
3. 발해의 제도
발해는 중앙에 선조성(宣詔省, 門下省), 중대성(中臺省, 中書省), 정당성(政堂省, 尙書省) 3성과 충부(忠部. 吏部), 인부(仁部. 戶部), 의부(義部. 禮部), 지부(智部. 兵部), 예부(禮部. 刑部), 신부(信部. 工部) 6부제로 하여 정당성의 장관 대내상(대내상)이 선조성 장관 좌상과 중대성 장관 우상으로 하는 제도였다.
정당성(政堂省, 尙書省) 대내상
정당성(政堂省, 尙書省) 대내상 | 충부(忠部. 吏部) |
인부(仁部. 戶部) | |
의부(義部. 禮部) | |
지부(智部. 兵部) | |
예부(禮部. 刑部) | |
신부(信部. 工部) | |
선조성(宣詔省, 門下省) 좌상 | |
중대성(中臺省, 中書省) 우상 |
지방은 국도인 상경(東京城, 용천부)을 중심으로 중경(中京),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의 5경이 있었으며 전국을 15부(府), 62주(州). 현(縣)으로 정비하였다.
15府(都督) 62州(刺史) 縣(縣丞) 刺使史
5경 | |
상경용천부(東京城) | 黑龍江城 永安縣 牧丹江 渤海鎭 : 당 장안성 영향 |
동경용원부(琿春) | |
중경현덕부(敦化, 東牟山) | |
서경압록부(臨江) | |
남경남해부(北靑) |
군사제도는 중앙군으로 10위가 있었으며 각 지방에 지방군이 편성되어 있었다.
4. 발해의 멸망
가. 발해 이질적인 백성 구성
발해인은 소수의 고구려인과 다수의 말갈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유력 귀족 가운데 고구려 유민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말갈인들의 거란의 침입으로 발해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발해에서 자주 이탈했고 거란의 침입에 전 백성을 동원하여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나. 내분 격화
900년 무렵부터 귀족들의 권력다툼이 심화되었다.
다. 거란의 침입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의 침입으로 보름만에 망했다. 고구려계 지배층은 고려에 귀화하였다. 왕자 대광현(大光顯)은 고려에서 왕계(王繼)라는 성을 주어 동족의식을 심어주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라. 부흥운동
발해 유민들은 약 200년간 부흥운동을 전개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부흥운동 | 내용 |
후발해(後渤海,926년?~ 938년?) | 대씨(大氏)가 압록부(鴨綠府, 臨江) 일대를 중심. 실패 |
정안국(定安國, 938~986) | 왕족 열만화(烈萬華, ?~976년?, 재위: 935년 또는 938년?~976년?)가 정안국(定安國, 938~938)을 세웠으나 실패 |
올야국(兀惹國, 오사. 995~996/1114) | 발해인 귀족 오소경이 요나라의 지배에 저항해 건국한 나라. 여진에 병합. |
흥요국(흥료국. 興遼國, 1029 ~ 1030) | 대조영의 후손인 대연림이 1029년 발해부흥운동 일환으로, 요나라의 통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이용해 군사를 일으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천경이라 건원하여 세운 나라. 여진족도 합류하여 세력 규모는 커졌지만, 흥요국에 대한 고려의 지원 거부와, 내부의 배신으로 1030년에 요나라에게 진압되어 멸망. |
대발해국(大渤海國, 1116년 1~5월) | 발해 유민 고영창(高永昌)이 건국한 나라로, 발해 부흥운동 중 가장 마지막 나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이 나라의 이름을 '대원국'] |
④ 왕권의 전제화
독자적 연호 사용 : 인안, 대흥, 건흥 -중국과 대등함, 왕권의 강대함 표현
관료 조직 정비 : 당의 3성 6부제 도입 독자적 운영, 중정대
왕위 계승의 장자 상속제 확립
제2절 남북국 시대의 경제
Ⅰ. 통일신라의 경제정책
1. 수취제도
가. 조세 : 1/10세를 수취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나. 공물 : 특산물(삼베, 명주실, 과실류 등)
다. 역 : 16~60세까지 군역(軍役)과 요역(徭役, 繇役, 賦役)을 담당하였다.
2. 토지제도
가. 녹읍(祿邑), 식읍(食邑)
귀족은 자신의 녹읍에 가신을 보내 수취했으며 지방관이 이를 감독했다.
나. 녹읍(祿邑)의 혁파와 부활
관료전 지급(신문왕 7년 687년) | 신문왕 7년 687년 5월 관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
녹읍 폐지(신문왕 9년 689년) | 신문왕 9년 689년 1월 내외관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세조(歲租)로서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
정전 지급(성덕왕 21년 722년) | 성덕왕 21년 722년 8월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
녹읍 부활(경덕왕 16년 757년) | 경덕왕 16년 757년 3워 내외 월봉(관료전과 세조)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지급하였다. |
국학생 녹읍 지급(소성왕 원년 799년) | 소성왕 원년 799년년 3월 청주 거노현을 학생들의 녹읍으로 삼았다. |
다. 정전의 지급
왕토사상에 따라 성덕왕 21년 722년 8월 처음으로 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고 조를 바치게 하였다. 신라 민정문서에 등장하는 연수유답(烟受有畓)은 정전으로 보인다.
3. 민정문서
가. 발견
1933년 일본 도다이사(東大寺) 쇼소인(正倉院0에서 유물 정리 도중에 제35대 경덕왕 14년 755년 또는 제41대 헌덕왕 4년 815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서원경(西原京, 청주) 및 그 부근 4개 촌의 장적이 발견되었다.
나. 내용
⑴ 작성
3년마다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변동사항을 기록하였다.
⑶ 내용
촌의 호수, 인구수, 우마수, 토지면적, 뽕나무(桑)・잣나무(柏)・호두나무(楸)의 수, 호구, 우마의 감소 등이 기입되어 있다.
인구는 연령에 의하여 정(丁, 丁女), 조자(助자, 助女子), 추자(追子, 追女子), 소자(小子, 小女子), 제공(除公, 除母), 노공(老公, 老母)의 6등급으로 나뉘어 있었고 공연(孔烟, 戶)은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나누었다. 공연의 정(丁)의 수를 합계하여 일년마다 1계연(一計烟)으로 계산하여 촌에서 역역을 징수할 정수를 파악하였다(최근에는 공연의 9등급은 정의 아니라 재산의 정도에 있었다는 새로운 설이 제기되었다). 촌에는 관모답・전, 내시령답, 마전 등이 할당되어서 촌민이 경작하였다.
토지 | 내용 |
관모답・전(官謨畓・田) | 국가의 수입 |
내시령답(內視令畓) | 내시령(內視令)의 수입 |
마전(麻田) | 국가의 수입 |
촌주위답(村主位畓) | 촌주의 수입 |
연수유답(烟受有畓) | 농민의 수입 |
신라에는 촌만이 아니라 향, 부곡도 존재했다. 군・현・촌이 양민 거주지역이고 향・부곡은 천민 거주지로 생각했으나 향・부곡도 군・현・촌주민과 같이 인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Ⅱ. 통일신라의 경제활동
1. 통일이후의 경제성장
가. 서시(西市)와 남시(男市) 설치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경주의 인구 증가로 기존의 시사(市肆, 소지마립간 12년 490년)과 동시전(東市廛. 지증왕 10년 509년)만으로는 상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32대 4년 695년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했다.
나. 수공업
각 물품마다 생산을 관리하는 행정부서거 있었고 왕궁내에 설치한 공장에서 장인과 노비를 통해 공급했다.
2. 대외통상
가. 당
조공형태의 공무역과 사절단이나 사신들에 의한 사무역이 있었다. 통일 이후 문물교류의 확대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졌다. 당이 혼란기에 접어 들면서 사무역이 공무역을 압도했고 산동반도, 강소성 등지에 신라방(新羅坊. 신라촌(新羅村, 신라인 거주지), 신라소(新羅所, 관청), 신라관(新羅館, 여관), 신라원(新羅院, 절) 등이 설치되었다. 장보고가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유명했다,
나. 일본
처음에는 적대관계에서 무역이 성행하지 못했으나 8세기 이후 교류가 활발해졌다.
다. 아라비아(大食國)
울산에 까지 와서 무역을 하였다. 주로 양탄자, 유리그릇, 향신료 등 귀족의 사치품이 애용되었다.
라. 장보고의 활동
장보고(張保皐, 張弓福, 張弓巴)는 42대 흥덕왕(興德王) 3년 828년 완도에 해군기지 및 무역기지로서 청해진(靑海鎭)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고 일본과 당과 국제통상을 전개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으로서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45대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하게 하여 중앙정계에 개입하고 딸을 문성왕비로 보내려다 귀족의 반대에 직면하여 46대 문성왕(文聖王) 8년 846년 난을 일으켰으나 염장(閻長)에게 암살되어 청해진은 문성왕 1년 861년 폐지되고 1만 군대는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되어 재생이 억제되었다.
3. 생활 모습
가. 귀족
귀족은 녹읍(祿邑), 식읍(食邑), 사전(賜田), 마거(馬阹, 목마장), 조(租, 곡물)를 통해 농민을 지배했다. 귀족은 서민을 상대로 한 고리대금업도 수입원이었고 금입택(金入宅)이라고 하는 호화주택에서 살았다. 당시 주경(主京) 금성(金城, 경주)에는 17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5 금입택(金入宅), 4 절유택(節遊宅)이 있었다.
나. 평민
시비술(施肥術)이 발달하지 못해 농업생산력에 한계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을 경우 생산물의 절반을 지주에게 주어야 했다. 전세는 생산량의 1/10 정도였으며 공물(貢物, 삼베, 명주실, 과일류 등 특산물)과 요역(徭役, 繇役, 부역)을 부담해야 했다.
Ⅲ. 발해의 경제
1. 수취제도
조세 | 조, 콩, 보리 등 곡물을 거둠 |
공물 | 베, 명주, 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둠 |
부역 | 궁궐, 관청 등의 건축에 노동력 징발하고 전쟁시 나가서 싸움 |
2. 산업
가. 농업
밭농사 위주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이 유적을 통해 확인되었다.
나. 수공업
제철, 방직, 목재, 피혁가공업, 금속가공업, 삼베・비단・명주등 직물업, 도자기업이 발달하였다,
다. 어업, 목축업
고래, 명마, 모피, 녹용등이 풍부했고 돼지, 말, 소, 양등을 길렀으며 말(솔빈부의 말 유명)은 주요한 수출품이었다.
라. 상업
상경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요지에 상업이 발달하였다.
3. 대외관계와 통상의 발달
발해의 주요 교통로에는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일본도, 신라도가 있었다. 조공도는 당나라 황제에게 조공하는 길이며 영주도는 당으로 가는 육로이고 거란도는 서쪽의 거란국으로 가는 도로이고 일본도는 일본으로 가는 도로이며 신라도는 신라로 가는 길이었다.
가. 당
처음에는 당이 흑수말갈을 이용해 발해를 견제했으나 장문휴가 산동지방을 공격하였고 3대 문왕이후 우호관계를 맺었다.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통상을 하였으며 산동반도의 덩조우(登州)에 발해관을 설치했다.
나. 일본
당과 신라의 협공에 대비하고 외교 고립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 했다.
다. 신라
남북국시대 두 나라간에는 친선과 대립이 교차하였으며 당의 빈공자 합격을 위한 문화적 우월 경쟁도하였다. 국경근처에 상설적인 교류가 이우어졌다.
라. 돌궐(突厥)
당을 견제하기 위해 돌궐(突厥, 괵튀르크, Gokturk 551년-657년)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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