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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삼국 시대의 경제
Ⅰ. 경제제도
1. 정복지 지배
삼국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변 소국과 정복전쟁을 하였다.
가. 토산물 채취 : 정복지의 지배자를 내세워 토산물을 공물(貢物)로 수취하였다.
나. 노비 획득 : 전쟁 포로를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었다.
다. 식읍 지급 : 전공을 세운 사람에게 일정지역의 토지와 농민을 식읍(食邑)・녹읍(祿邑)으로 나누어 주었다.
2. 조세
가. 조세(租稅) : 처음에는 인두(人頭)를 표준으로, 나중에는 재산을 기준으로 3등으로 나눈 호(戶) 단위로 곡(穀) 5석과 포(布) 5필을 냈다.
나. 공납(貢賦) : 지역특산물(土産品)을 수취했다.
다. 요역(徭役, 繇役) : 15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하여 일정기간 방수(防戍, 국경수비), 축성(築城) 및 축제(築堤)에 역역(力役)을 동원하였다.
3. 농업생산력의 증대
가. 우경 장려 : 철제농기구를 보급하여 우경(牛耕)을 장려하였다.
나. 개간 권장 : 황무지 개간을 권장하여 경작지를 확대하였다.
다, 수리시설 확충 : 저수지(貯水池)를 만들거나 수리하여 가뭄(旱魃. 한발)에 대비하였다.
4. 구휼정책
고구려는 9대 고국천왕때 재상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춘궁기에 빌려 주었다가 추수기에 받아들이는 진대법(賑貸法, 組積法. 조적법)을 시행하였다.
5. 수공업
초기에는 기술이 뛰어난 노비에게 국가가 필요한 물품을 만들게 했다. 국가체제 정비후에는 수공업담담관청을 두고 수공업자를 배정해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6. 상업
농업생산력의 수준이 낮아 수도등의 도시에만 시장(市肆, 시사)이 형성되었다. 소지마립간 12년 490년 경주에 시사(市肆, 시장)를 열고 지증왕 10년 509년) 동시전(東市典)을 두고 시장을 감독하였다.
7. 국제통상
삼국은 4세기 이후 국제통상이 활발하였다. 고구려는 남북조 및 북방 유목민인 북방민족과 교역을 하였다. 백제는 남중국 및 왜와 활발히 교역을 하였고 신라는 처음에는 백제와 고구려를 통해서 중국과 교역을 하였으며 한강유역에 진출한 이후에는 당항성(黨項城. 남양)을 통해서 중국과 직접 교역하였다.
Ⅱ. 경제생활
1. 귀족의 경제생활
가. 귀족의 경제 기반
귀족은 본래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노비외에도 국가로부터 녹읍, 식읍 및 노비를 받았고 전쟁을 통해 전리품(토지와 노비)을 늘릴 수 있었다. 귀족은 대토지를 농민과 노비를 통해 경작케 하고 수확물의 대부분을 가져갔고 고리대(高利貸)를 이용하여 농민을 토지를 빼앗거나 농민을 노비로 만들었다.
나. 귀족의 생활
귀족은 창고, 마구간, 우물, 주방 등을 갖추고 높은 담을 쌓은 기와집에서 화려하게 살았고 중국산 비단옷에다 보석, 금과 은으로 치장을 하였다.
2. 농민의 경제생활
가. 경작형태
경적은 자영농이 일반적이었으나 공동경작이나 부유한 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소작료를 내는 소작농도 있었다.
나. 농업기술 발달
시비술이 발달하지 못해 1~2년을 묵히는 휴경농법을 사용하였고 돌, 나무와 일부 철로 보완한 농기구는 4~5세기를 지나면서 철제농기구가 점차 보급되었고 6세기에 이르러 쟁기, 호미, 괭이 등 철제농기구가 널리 사용되고 우경도 점차 확대되었다.
다. 농민 부담 및 생활
농민은 국가 및 귀족에게 곡물, 삼베, 과실 등을 내야 했고 전쟁물자를 조달하거나 잡역부로서 동원되거나 전쟁에 참여했다. 농업기술을 개발하거나 계곡 옆이나 산비탈을 개간하기도 했으며 자연재해를 입거나 빚을 갚지 못해 노비, 유랑민, 도적이 되기도 했다.
제3절 삼국 시대의 사회
Ⅰ. 신분사회
1. 사회계층과 신분제도
가. 신분제의 출현배경
정복과 복속과정에서 지배계층사이의 서열이 신분제로 발전하였다.
나. 사회계층의 분화
부여 및 초기 고구려 신분제도는 가・대가, 호민, 하호, 노비로 구성되었다.
가(加)・대가(大加) | 호민을 통해 읍락을 지배하고 자기 가신과 군사력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였으나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중앙귀족으로 편입되었다. |
호민(豪民) | 가(加)에서 배제된 중간계층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평민계층이었다. |
하호(下戶) |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계층이었다. |
노비(奴婢) | 주인에 예속되어 생활하는 천민층이었다. |
2. 귀족, 평민, 천민
가. 신분제도의 성립
삼국시대에 귀족, 평민, 천민의 신분제도가 마련되었다. 귀족들은 출신가문의 등급에 따라 관등 승진이나 국가로부터 받는 경제적 혜택에 차별이 있었고 신라의 골품제가 대표적이다. 지배층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율령을 만들었고 개인의 신분은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고 골품제와 같이 지배층만을 위한 별도의 신분제를 운영하였다. 평민 밑에는 남의 토지를 결작하거나 품팔이 하는 용민(傭民)도 있었다. 고구려 15대왕 미천왕9美川王, 을불(乙弗), 울불리(乙弗利), 우불(憂弗))이 등극전 봉상왕(烽上王)이 아버지 돌고(咄固)를 죽이자 음모(陰牟)라는 농부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신라에는 하층민으로 부곡민(部曲民)이 있었고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최하층민으로 노비(奴婢, 종)이 있었다. 노비는 전쟁포로, 살인자, 채무자등으로서 구족에게 소속되어 토지를 경작하거나 가사를 돕는 등 노예생활을 하였다.
나. 신분의 구성과 특징
지배관계 | 신분 | 내용 |
지배층 | 귀족 | 왕족과 중앙귀족으로 정치권력과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
피지배층 | 평민 | 대부분 농민으로서 자유민이지만 정치사회적으로 제약이 있었고 조세와 요역을 부담했다. |
노비 | 천민의 대부분인 노비는 전쟁포로, 죄인 및 귀족채무자로서 비자유인으로서 왕실, 귀족 및 관청에 예속하여 일을 하였으며 상속및 매매의 대상이었다. |
Ⅱ. 사회
1. 고구려
가. 사회기풍과 법률
식량생산이 부족하여 일찍이 대외정복활동에 눈을 돌려 강건한 사회기풍을 유지했고 통치질서와 사회기강유지를 위해서 법률이 엄하여 반역자・반란자는 화형(火刑)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고 전쟁에 패한 자와 항복한 자는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질한 자는 12배(一責十二法)로 갚게 했다.
나. 사회계층
지배관계 | 신분 | 내용 |
지배층 | 귀족 | 왕족과 중앙귀족으로 정치권력과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
피지배층 | 평민 | 대부분 농민으로서 자유민이지만 정치사회적으로 제약이 있었고 조세와 요역을 부담했다. |
노비 | 천민의 대부분인 노비는 전쟁포로, 죄인 및 귀족채무자로서 비자유인으로서 왕실, 귀족 및 관청에 예속하여 일을 하였으며 상속및 매매의 대상이었다. |
⑴ 귀족
왕족 고씨와 5부 중앙귀족으로 왕경에 모여 살며 지위를 세습하며 국정운영에 참여하고 전쟁시 앞장 서서 싸웠다. 최고 귀족은 왕족 계루부(고씨), 왕비족(절노부), 전왕족(소노부. 연나부 명림씨) 귀족이며 이들의 부족장을 고추가(古雛加)라고 하였다(신라의 葛文王과 유사).
⑵ 평민
대부분 자영농민으로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고 병역의무를 부담하며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다.
⑶ 천민・노비
피정복민, 전쟁포로, 몰락한 평민 및 다른 사람의 마소를 죽인 자와 채무불이행자였다
다. 혼인풍습
지배층은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娶嫂婚)와 서옥제(壻屋制)가 있었으며 평민들을 자유교제를 통한 혼인을 하였고 예물은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만 보냈다.
2. 백제
가. 사회생활
언어, 풍속, 의복 등이 고구려와 비슷했고 상무적 기풍이 있어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다.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여 선진문화를 수용하였다.
나. 엄격한 법률
반역자, 패전자, 퇴각군사,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절도자는 귀양과 동시에 2배를 물리고 수뢰 및 횡령관리는 3배배상과 사망시까지 금고에 처했다.
다. 지배층
왕족인 부여씨(扶餘氏)와 8성 귀족(사[沙], 연[燕], 협[劦],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백[苩], 이중 해[解], 진[眞]는 왕비족)으로 구성되고 중국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관청 실무에 밝았다. 기호 오락은 투호(投壺), 바둑 및 장기가 있었다.
3. 신라
가. 특징
부족대표들이 모여서 정치를 운영하던 초기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했고 대표적인 것이 화백제도와 화랑도였다.
나. 회백회의(和白會議)
화백회의는 부족의 대표들이 모여서 중대사를 합의하여 처리하는 씨족사회의 전통을 계승한 귀족들의 합의체로서 국왕을 추대・폐위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 집단의 부정을 막고 단결을 강화하는 구실과 귀족세역과 왕권사이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했다. 화백회의는 만장일치로서 의결하였다. 화백회의의 신성한 장소로서 靑松山(동), 皮田(서), 于知山(남)과 金剛山(북)이 있었다.
다. 골품제(骨品制)
신라가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왕위를 세습한 김씨 왕족이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각 족장 세력을 통합・편제한 것이다. 골품제는 성골과 진골의 골과 1~6두품(나중에는 4~6두품)의 품으로 구성되었다. 골품제는 혈연에 따라 개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까지 제한하였으며 골품에 따라 관등 승진의 상한이 정해지고 가옥의 규모, 복색, 수레 등 일상생활까지 규제하였다.
라. 화랑도(花郞徒)
원시사회의 미성년집단(청소년집단)에서 기원하여 귀족에서 선발된 화랑(花郞)을 중심으로 구족이나 평민으로 구성된 수백명의 낭도(郎徒)가 화랑집단(香徒)을 형성하였다. 화랑도는 계층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완화하는 기능을 하였다. 화랑은 전통적 사호규범을 익히고 명산대천을 찾아 제천의식을 행하고 전쟁과 사냥에 관한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다. 화랑은 진흥왕때 국가조직으로 발전하였고 원광법사(圓光法師, 542~640)는 26대 진평왕 22년 600년,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신라의 도성인 경주와도 가까운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에 있는 가슬갑사(嘉瑟岬寺)’에 머무르면서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윤리강령(倫理綱領)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가르쳐 당시 신라 청소년들이 지켜야 할 실생활의 윤리를 제시하였다.
세속오계(世俗五戒)
사군이충(事君以忠) | 임금(국가)에 충성을 다할 것 |
사친이효(事親以孝) | 부모에 효도를 다할 것 |
교우이신(交友以信) | 신의로써 벗을 사귈 것 |
임전무퇴(臨戰無退) | 전쟁터에 나아가서는 물러남이 없을 것 |
살생유택(殺生有擇) |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 것 |
제4절 삼국 시대의 문화
Ⅰ. 학문과 종교 및 사상
1. 한자의 수용
한자는 황제시대에 창힐(倉頡, 蒼頡)이 고안한 것으로 경남 창원 다호리 붓의 출토에서 알듯이 고조선후기 철기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시대인들은 처음에는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우리 말로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우리 말로 표기하는 이두(吏讀)와 문장의 근간이 되는 표현은 한자 뜻으로 적고 접미사는 한자 소리로 적은 향찰(鄕札)을 만들어 썼다.
2. 교육
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에 수도에는 관리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5경박사가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치고 지방에는 경당(扃堂)을 세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나. 백제
고구려와 같이 태학이 있었고 5경박사, 의박사, 역박사 등이 있어 유교 경전과 기술학을 가르쳤다.
다. 신라
1934년 5월 4일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터에서 발견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3대 성덕왕 31년 732년, 보물 1411호)에는 두 젊은이가 3년안에 시(詩), 서(書), 예기(禮記) 등 유학경전을 익힐 것을 맹세하는 글이 있다.
3. 역사편찬
역사서는 대외적으로 나라의 정통성과 권위를 과시하고 안으로 신민의 충성심을 모아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목적에서 편찬하였다. 먼저 고구려는 국초에 저자미상의 유기(留記) 100권이 있고 26대 영양왕 11년 660년 이문진(李文眞)의 신집(新集)이 있다. 백제는 13대 근초고왕 30년 375년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신찬(百濟新撰) 등의 나오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이 썼을 것으로 본다. 신라는 24대 진흥왕 6년 545년 거칠부(居柒夫)의 국사(國史)가 있다. 그러나 이 모두 하나도 전하지 않는다.
4. 유교와 도교 수용
가. 고구려
유교는 태학에 5경박사가 있었고 태학과 경당에서 유교경전을 가르쳤다. 삼국의 도교는 고유의 신선사상, 중국의 도교와 금욕적인 노장사상을 접합하여 민족도교로 발전시켰는데 고구려는 주몽의 조천(朝天), 사신도(四神圖)와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낸 지족(知足)이라는 말은 을지문덕이 도덕경(道德經)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7세기에 중국에서 도가와 도덕경(道德經)이 들어오고 도교 일파인 남조의 오두미도(五斗米道, 天師道, 正一道, 張陵이 창시)도 들어오고 연개소문 집권기에 도교진흥책을 쓰기도 했고 불교사찰을 빼앗아 도관(道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명산대천에 도교식 제천을 행하여 애국심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 백제
유교는 5경박사가 있었고 일본에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 단양이(段楊爾), 고안무(高安茂), 마정안(馬丁安), 문휴마나(汶休麻那), 동성자언(東城子言), 동성자막고(東城子莫古), 류귀(柳貴) 등을 파견하여 유교경전을 전해주고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백제는 도교와 관련하여 신선사상이 있었고 근초고왕때 막고해(莫古解) 장군이 왕자 근구수(近仇首)에게 고구려 진격을 만류한 일, 산수무늬벽돌, 1993년 부여 능산리 집터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 일본에 도가와 도교서적도 전해 준 사실과 관륵(觀勒)의 천문(天文), 역법(曆法), 둔갑(遁甲), 방술(方術)도 이와 관련이 있다.
다. 신라
유교는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속에 충효신(忠孝信)이 들어 있고 임신서기석에 경주의 두 청년이 착한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3년안에 시(詩), 서(書), 예기(禮記)를 읽겠다는 내용이 있다. 신라는 도교가 전해진 구체적인 증거는 없으나 신선사상은 있었다.
5. 불교 수용
고구려는 17대 소수림왕 2년 372년 전진(前秦)의 순도(順道)로부터 불교를 전래되었다. 백제는 15대 침류왕 원년 384년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해주었다. 신라는 19대 눌지마립간(417~458)대 고구려를 거쳐 들어온 진(晉)의 아도(阿道, 墨胡子)가 전해 주었는데 민간차원의 비밀포교에 머물렀고 법흥왕 8년 521년 남조(南朝) 양(梁)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사신 원표(元表)가 침단향(沈檀香),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경주에 오면서 왕실에 알려지고 23대 법흥왕 14년 527년 이차돈(異次頓)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 22년 535년에 불교를 공인하였다.
불교는 세속오계와 같이 국가정신확립에 기여하였으며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했으며 여러 왕들이 불교식 이름을 가졌고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음악, 미술, 건축, 공예, 의학 등 선진문화가 함께 수용되었다.
신라 불교의 중심교리는 업(業)과 미륵불신앙(彌勒佛信仰)이었다.
Ⅱ. 과학기술
1. 천문학
하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천문 관측에 노력했다. 청동기 시대의 천문기술이 삼국시대로 전승되었다. 고구려는 정확한 관측에 의하여 그려진 천문도가 장천1호분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다. 신라는 선덕여왕때인 647년에 첨성대(瞻星臺. 국보 제31호)가 건설되었다.
2. 수학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고 고구려 고분의 석실, 천장 구조, 백제의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 신라 황룡사(黃龍寺) 9층목탑, 분황사(芬皇寺) 모전탑(模塼塔)이 대표적이다.
3. 금속기술
고구려는 철 생산이 국가적 산업이었고 철제 무기와 도구 품질이 우수했다. 백제의 칠지도(七支刀), 금동대항로는 금속공예 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신라는 금관을 통해 세공기술의 발달을 볼 수 있다.
Ⅲ. 예술
1. 분묘 양식
삼국시대의 무덤 양식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 | 초기 | 돌무지무덤(積石塚. 적석총) | 장군총(將軍塚)<吉林省 通溝>태왕릉(太王陵) | pyramid식으로 석재를 쌓아올린 형식의 7층계단식 무덤 |
후기 | 굴식돌방무덤(봉토돌방무덤, 橫穴式石室墳. 횡혈식석실분) | 쌍영총(雙楹塚), 무용총(舞踊塚), 강서대묘(江西大墓) | 석재를 널방(玄室)을 만든 위에 흙을 덮어서 만든 봉분 사신도(四神圖) :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 |
백제 | 한성시대 | 돌무지무덤 | 석촌동고분(石村洞古墳), 가락동 | 고구려의 영향 |
굴식돌방무덤 | 宋山里古墳(송산리고분) | 거대한 규모 | ||
웅진시대 | 굴식돌방무덤 | 능산리고분(陵山里古墳) | 규모가 작고 세련됨 | |
벽돌무덤(塼築墳, 塼室墳) | 무령왕릉 | 중국 남조의 영향 | ||
사비시대 | 굴식돌방무덤 | |||
분구묘(墳丘墓) | ||||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장고분(長鼓墳) keyhole-shaped tomb) |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분시대(4~6C경)에 성행했던 무덤양식. 평면도상으로 보면 원형(圓形)과 방형(方形)의 분구가 붙어있는 모습. | |||
가야 | 덧널무덤(木槨墓) | |||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 구덩식 돌방무덤(竪穴式石室墓, 수혈식석실묘) | |||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 | 고성 송학동 고분군 1호분 B지구의 횡혈식석실분은 국내 최초의 채색고분 | 원형(圓形)의 분구에 직사각형 또는 사각형 분구를 붙여놓은 평면형을 나타내는 무덤 가야고분의 분포와 출토지역은 고령지역(지산동고분군・중화동고분군・고아동고분군), 함안지역(말이산고분군), 김해지역(예안리고분군・양전동고분군・생곡리고분군), 부산지역(복천동과 연산동고분군・당감동고분군), 경상북도 구미지역(비산동과 내당동고분군) 등이다. | ||
신라 | 3세기 이후 | 경주식덧널무덤 | ||
4세기 이후 |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 경주평야의 98호고분(皇南大塚, 황남대총) : 南墳과 北墳의 쌍무덤(瓢形墳), 봉황대고분(鳳凰大古墳),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천마총(天馬塚), 서봉총(瑞鳳塚) | 도굴이 어려움 | |
지방 |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陵 | 경산, 대구, 창령, 안양, 부산, 의성, 안동 |
2. 고분벽화((古墳壁畵)
가. 고분벽화
고분벽화는 무덤 안의 천장이나 벽면에 그려 놓은 벽화(壁畵, murals, mural paintings)로서 성격상 장의미술(葬儀美術)에 속하므로 공회화적 요소이다. 최초의 고분변화는 2세기 말경 만들어진 평양 낙랑(樂浪) 채협총 벽화(彩篋冢 壁畵)로서 중국 한 대에 유행하던 무덤장식 습속으로 평안남도 대동군 남천면 남정리에 있는 낙랑시기의 횡혈식목실분. 1931년 10월 조선고적연구회가 발굴하였다.
나. 삼국시대의 고분벽화
삼국시대 고분벽화는 113기(고구려 108기, 백제 2기, 신라 2기, 가야 1기)가 있다.
고구려(108) | 기수 | 대동강 유역 63기, 재령강 유역 13기. 집안・환인지역 32기 |
초기(3세기 중엽~5세기 초) | 여러방 무덤에 생활풍속이 즐겨 그려지는 시기. 외방무덤에 사신(四神), 장식무늬. 각저총(角抵冢). 습지벽화법 | |
중기(5세기 중엽~6세기 초) | 여러방 무덤과 외방 무덤에 생활풍속, 장식무늬(同心圓文, 王字文, 연꽃문), 사신(四神)이 독자적으로 혹은 뒤섞여 그려지는 시기로서 평양, 안악 지역은 생활풍속과 사신(四神)(靑龍(좌, 동), 白虎(우, 서), 朱雀(전, 남), 玄武(후, 북)[쌍영총, 안학2호분]이고 환인과 집안지역 은 생활풍속과 장식무늬 또는 장식무늬[장천1호분(집안)].습지벽화법+건지벽화법 | |
후기(6세기 중엽~7세기 전반) | 외방무덤에 사신이 유일한 주제로 등장. 평양과 안악 지역(진파리 1호분, 진파리 4호분, 내리1호분, 강서대모, 강서중묘) 및 집안 지역(통구사신총, 오회분4호묘 오회분 5호묘). 조벽지법 | |
백제(2) | 공주 송산리 전축분(宋山里 塼築墳), 부여 능산리 석실분(陵山里 石室墳) | |
신라(2) | 경주 천마총(天馬冢)의 「천마도(天馬圖)」,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서조도(瑞鳥圖)」와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출토된 「우마도(牛馬圖)」 등) | |
가야(1) | 대가야의 고아동 벽화분벽화 |
3. 건축
가. 궁궐
⑴ 고구려
졸본성(卒本城, 桓仁 BC 57)-국내성(集安, BC 57~427)-평양성(대성산성밑의 안학궁, 427년 장수왕 15년)-평양성(6세기 후반)
⑵ 백제
하남위례성(BC 18~475)-웅진(475~538)-사비(538~660+3)
⑶ 신라
금성(경주읍)-월성(경주시 인화동, 5대 파사이사금)
통일후 월성 중수(문무왕 7세기 후반) 및 雁鴨池(안압지, 月池), 東宮(동궁, 月池宮) 신축
나. 성곽(城郭)
⑴ 도성(都城)
정치・사회의중심지인 수도에 축조
⑵ 고구려
졸본성→국내성(2대유리왕) | 평양성(20대장수왕) | 장안성(25대평원왕) | |
평지성 | 국내성 | 안학궁성,청암동토성 | 복합식 평산성 |
산성 | 환도산성 | 대성산성 |
천리장성
고구려가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이 야욕을 보이자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631년(영류왕 13년)부터 16년 간에 걸쳐 647년에 완성된 북의 부여성부터 요동반도 비사성(중국명: 大黑山山城)에 이르는 성.
⑶ 백제
평지성 | 위례성) | 웅진성 | 사비성 |
산성 | 풍납토성, 몽촌토성(왕궁성) | 웅진성 | 내성 : 부소산성, 나성 : 외곽 |
⑷ 신라
월성 : 평지성
나성 역할 : 남산성(南山城), 명활성(明活城), 서형산성(西兄山城), 북형산성(北兄山城)
다. 사원
⑴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 전진의 순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되고 375년 소수림왕 5년 초문사(肖門寺, 省門寺 順道가 세움)와 이불란사(伊弗蘭寺, 阿道) 건립하고 광개토왕 3년 393년 평양에 9개 사찰 건립(평원군 원오리사지, 대동군의 상오리사지, 평양교외의 정릉사지와 청암리사지)하였다.
⑵ 백제
침류왕 원년 384년 동진의 마라난타(摩羅難陀)로부터 불교가 전래되고 385년 대규모 사찰을 한산에 건립하여 승려 10명을 상주시켰다고 한다. 공주 대통사, 부여 미륵사(彌勒寺, 무왕때 지명법사, 익산), 왕흥사(王興寺, 600년)시,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금강사지, 서북사지, 정림사지가 있다.
⑶ 신라
527년 이차돈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고 진흥왕 5년 544년 흥륜사(興輪寺)를 지어 말년 출가후 법운(法雲)이 되었으며 영흥사(永興寺)에서는 진흥왕비가 여승이 되었다. 그 외 황룡사(黃龍寺), 기원사. 삼량사, 분황사 등이 있었다.
4. 불탑
가. 최초의 탑(舍利塔. 사리탑)
釋迦牟尼(석가모니) 사망시 屍身 火葬(시신 화장)하고 身骨(신골)과 舍利(사리)를 모아 8기의 탑과 재를 奉安(봉안)한 2기
나. 삼국시대의 불탑
구분 | 탑 | 특징 |
고구려 | 요동성 3층토탑(三層土塔), 5층목탑(五層木塔) | 삼국유사 기록. 미전 |
백제 | 익산 미르사지탑(益山彌勒寺址塔) | 7C초. 무왕. 목탐양식의 석탑. 국보 제11호.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夫餘定林寺址五層石塔) | 7C 안정되면서도 경쾌한 모습.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 지정문화재 국보 제9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 |
신라 | 경주 황룡사9층목탑(慶州黃龍寺九層木塔) | 7C 선덕여왕 .거대한 규모. 9개국을 정복하여 조공을 받을 상징. 몽고병란때 소실 |
경주 분황사모전석탑(慶州芬皇寺模塼石塔) | 7C선덕여왕. 석재를 벽돌모양으로 만들어 축조. 국보 제30호.원 래 9층 현재 3층.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
5. 불상
가. 삼국시대의 불상의 특징
불상도 기본적으로 종교적 규범을 충실히 따랐고 여래와 보살은 완전한 인격체이므로 그 모습도 완전해야 한다. 불상들은 사람 냄새나는 우리네 모습 그 자체이며 불상은 사람의 얼굴이면서 설치되는 공간도 인간적이다. 초기는 중국의 불상양식을 크게 영향 받았고 삼존형식 및 반가사유상의 형태가 주로 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은 주불상에 종속되거나 한 부분적인 존재에 불과했지만 백제에 와서는 종속적인 관계를 벗어나 독립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조형성을 획득하였다.
나. 대표적인 불상
고구려 | 금동연가7연명여래입상(金銅延嘉7年銘如來立像)(국보 제119호),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국보 제118호) |
백제 |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국보 제84호. 본존여래입상의 유협시로 집보주보살입상이, 자협시로 반가사유상), 4화관(花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국보 제83호),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 국보 제307호. 집보주보살상을 본존으로 삼고 좌우에 여래상을 배치한 양식) |
신라 | 경주 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9보물 제63호), 보관(寶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일월식삼산관사유상(日月飾三山冠思惟像))(제78호) |
금동연가7연명여래입상(金銅延嘉7年銘如來立像)국보 제119호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국보 제118호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국보 제84호
4화관(花冠)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국보 제83호
경주 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보물 제63호
보관(寶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국보 제78호
6. 글씨, 그림, 음악
가. 글씨
고구려의 광개토왕비, 중원고구려비, 모두류묘지명(牟頭婁墓誌銘. 고구려 광개토왕 때 북부여 수사(守事)인 모두루의 묘지. 1935년 10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하양어두(下羊魚頭)에서 발견), 백제의 부여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신라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성덕왕 37년 732년)이 있다.
나. 그림
고구려 | 영양왕 21년 610년 담징(曇徵)이 일본 호오류사(法隆寺) 금당벽화 그림 |
백제 | 위덕왕 44년 597년 아좌태자(阿佐太子)는 일본의 쇼토쿠태자(聖德太子)상 그림 |
신라 | 솔거(率居)는 황룡사벽화(老松圖), 분황사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摩像)을 그렸다고 하고 전하지 않는다. 천마총의 마구의 다래(障泥, 장니)에 그린 천마도는 신라 그림의 패기에 찬 수준을 보여준다. |
다. 시가와 음악
⑴ 시가(詩歌)
고구려와 백제에는 어떠한 형식의 시가가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가야에는 원시적인 전통을 이은 주가(呪歌)로서 구지가(龜旨歌. 迎神君歌. 가락국의 추장들이 구지봉에 모여서 김수로왕을 맞이 하기 위해 불렀다는 노래)가 전해오고 있다. 신라에는 회소곡(會蘇曲. 가사가 전해지지 않은 시라가요로 팔월 대보름의 가배(嘉俳)때 길쌈 내기에서 진 여자가 회소, 회소해서 회소곡이라함)이 있었고 이것은 향가(鄕歌)로 발전하였다. 향가는 주로 화랑이나 승려들이 지은 주원적(呪願的) 의미를 지닌 것으로써 원시적 주가에 대치되는 불교적인 것으로써 도솔가(兜率歌)및 사뇌가(詞腦歌)를 포함한 이 시기의 모든 시가를 총칭하는 말로 신라가요・신라시가・사뇌가라고도 하며 중국의 시(詩)나 불교의 범패(梵唄)에 대해 '우리 고유의 시가', '시골노래'라는 개념으로 향가라고 했다. 통일신라시대말 진성여왕대에 향가집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이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으나 전하지 않고 현재 가사가 전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14수, 균여전(均如傳)에 11수로, 모두 25수이다. 보통 향찰로 기록되었으며 문헌상의 최초의 작품은 진평왕대(579~631)의 서동요(薯童謠)와 혜성가(彗星歌)에서부터 마지막 작품은 고려 광종(917~973) 때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이다.
⑵ 음악
음악과 무용은 종교적 성격을 지녔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어느 나라나 음악이 성하였고 악기로는 관(管)・현(絃)・타(打)악기 합하여 수십 종이 있었는데 서역에서 들어온 것도 있었다.
고구려 | 왕산악(王山岳)이 진(晋)의 7현금(七絃琴)을 개량하여 현학금(玄鶴琴)을 만들고 100곡을 지었다고 한다. |
백제 | 음악에 관하여 상세한 기록이 없으나 일본에 악공(樂工)・악사(樂師)・악기(樂器)기)를 전한 사실로 보아 고구려나 신라 못지 않게 음악이 발달하였을 것이다. |
신라 | 자비마립간때 백결선생(百結先生)은 방아타령(碓樂. 대악)으로 유명하며 고구려 현악금은 신라에 전해져 경덕왕때 옥보고(玉寶高)같은 대가를 낳았다. |
가야 | 우륵(于勒)은 가야금(伽倻琴)으로 12악곡을 짓고 신라에 가야금을 전했으며 계고(階古)에게 가야금, 법지(法知)에게 노래, 만덕(萬德)에게 춤을 가르쳤다고 한다. |
옥보고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5)때 사찬(沙) 벼슬을 하던 공영(恭永)의 아들로 지리산의 운상원(雲上院, 雲峰)에 들어가 50년 만에 스스로 새로운 곡조 30곡을 지어 속명득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악지에는 상원곡 1, 중원곡 1, 하원곡 1, 남해곡 2, 기암곡 1, 노인곡 7, 죽암곡 2, 현함곡 1, 춘조곡 1, 추석곡 1, 오사식곡 1, 원앙곡 1, 원호곡 6, 비목곡 1, 입실상곡 1, 유곡청성곡 1, 강천성곡 1 등이 옥보고가 지은 것으로 전한다.
향가 25수
향가(鄕歌)
향가(鄕歌)는 신라시대로부터 고려 전기까지 창작되었으며, 도솔가(兜率歌)와 사뇌가(詞腦歌)도 포함한다. 중국시가에 대한 우리 나라 고유의 시가를 지칭하기도 하며, 신라가요·신라시가라고도 부른다.
도솔가는 오늘날의 농악이나 쾌지나칭칭·강강수월래에서 볼 수 있는 회악(會樂)·원무가(圓舞歌)·윤무가(輪舞歌)의 성격을 가진 것과, 불교의 도솔(tusita : 欲界六天)과 관련된 월명사(月明師)의 도솔가(兜率歌)로 나누어진다. 전자를 도율가(또는 두율가)라 부르고 후자를 도솔가라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도솔가의 의미와 개념에 의하여 도솔가는 향가 중에서 도율가로 일컬어지는 유리왕대의 도솔가(兜率歌)와 월명사의 도솔가(兜率歌)에만 쓰이는 명칭이다.
사뇌가는 처음에 사뇌야(詞腦野 : 신라의 수도인 경주주변을 사릿들에서 유래) 지방에서 주로 승려계층을 중심으로 유포되다가 뒤에 신라시가 전체를 대표하게 된 일종의 정형시이다. 사뇌가가 신라시가 전체를 대표하게 된 것은 균여전 (均如傳)에 기인한다. 신라향가 전체를 통하여 사뇌가라는 명칭은 찬기파랑사뇌가(讚耆婆郎詞腦歌) 및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와 균여전 소재의 향가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뇌가는 사뇌격조(詞腦格調)로 노래된 극히 일부의 가요에 한정된 개념으로 통설화되고 있다.
종래에는 향가의 개념을 중국 시가에 대응하는 ‘우리 나라 노래’ 또는 ‘우리말 노래’로 이해하여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우리말로 된 노래라면 모두 향가로 이해했으나 최근에는 그 가운데서도 ‘작자가 분명한 개인 창작의 시가’ 또는 ‘젓대나 가야금·향비파 같은 선율악기를 동반한 세련된 고급의 가악’으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 향가로 이해하던 해가(海歌), 지귀주사(志鬼呪詞), 비형랑주사(鼻荊郞呪詞) 같은 주술가요나 풍요(風謠)와 같은 민요(民謠), 무애가(無碍歌, 원효)와 산화가와 같은 화청(和請 : 불교의 포교를 위한 방편으로 생성된 교술적인 弘法가요로서, 북이나 목탁(木鐸)·꽹과리 같은 장단악기의 반주가 따름.) 등의 노래는 개인 창작의 고급음악이 아니므로 향가에서 제외한다.
향가의 하위 장르로는 월명사의 도솔가 같은 주술계 향가, 유리왕대의 도솔가, 회소곡(會蘇曲), 사내악, 돌아악 같은 차사(嗟辭) 사뇌계 향가(詞腦系鄕歌), 헌화가(獻花歌), 양산가(陽山歌), 해론가(奚論歌) 같은 민요계 향가, 이른바 10구체 향가라 불리는 사뇌가 등의 네 종류를 든다.
여기에 도솔가를 향가의 하위 장르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사뇌가는 모죽지랑가, 혜성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같은 화랑집단 중심의 풍월계 향가와 원왕생가, 도천수대비가, 우적가 같은 불교신앙 중심의 화청계 향가로 그 성격을 나누기도 한다. 현재 전하는 향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14수, 균여전(均如傳)에 11수로 모두 25수이다. 다음과 같다.
1. 삼국유사 14수
향가 | 지은이 | 내용 |
1. 혜성가(彗星歌) | 융천사(融天師) | 신라 진평왕 때 융천사(融天師)가 지은 10구체 향가. 혜성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였으므로 이 노래로써 물리쳤다는 설화가 전한다. |
2. 서동요(薯童謠) | 서동(백제 武王의 아명) | 서동요에 관한 설화 나오는 향가로, 설화에는 서동(백제 무왕의 아명)이 신라 진평왕의 선화공주와 인연을 맺기 위해 일부러 퍼뜨린 노래라고 나와 있다. |
3. 풍요(風謠) | 미상 |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4구체 향가로서 지은이를 알 수 없다. 양지(良志)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 때 부역 온 성내 남녀가 불렀다는 민요. 양지사석가(良志使錫歌). |
4. 헌화가(獻花歌) | 실명 노옹(失名老翁) | 삼국유사에는 “소를 끌고 가던 늙은이가 수로부인에게 절벽의 철쭉꽃을 꺾어다 드릴 때에 부른 노래”라고 하여 “노인헌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헌화가라고 부른다고 한다. 신라 성덕왕 때에 지어진 4구체 향가이다. “수로(水路)부인”이 한국어로 지은 이름을 한자로 뜻을 옮겨 만든 것인지, 바다를 끼고 곧 물을 따라가는 부인이라는 뜻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
5. 도솔가(兜率歌) | 월명사(月明師) | 삼국유사 권5에 신라 경덕왕 때(760년)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4구체 향가이다. 해 2개가 나란히 나타나매 왕이 월명사로 하여금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어 재앙을 물리치게 하였다는 설화가 전한다. |
6. 제망매가(祭亡妹歌) | 월명사(月明師) | 신라의 승려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삼국유사》 권5 “월명사 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 “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부처에게 공양하는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제천의 〈월명〉(月明)은 〈제망매가〉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작품으로, 나뭇잎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을 노래하고 있다. 나무를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나뭇잎들을 통해 죽음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 인간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
7.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 충담사(忠談師) |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 때의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화랑 기파랑(耆婆郞)을 추모하여 지은 십구체(十句體) 향가(鄕歌). |
8. 안민가(安民歌) | 충담사(忠談師) | 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스님, 표훈대덕 편”에 실려 있다. 경덕왕이 충담 스님에게 “나를 위하여 편안하게 다스리도록 하는 노래를 지으라.”라고 명령을 내려서 지은 노래이다. 10구체 향가. |
9. 처용가(處容歌) | 처용(處容) | 삼국유사 기이편 “처용랑과 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란 인물이 지었다고 하며 역신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동침하고 같이 잠자리에 있는 것을 돌아와서 보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러자 역신은 처용이 노하지 않은 것에 감동하여 그 앞에 나타나 꿇어앉았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역신을 쫓았다고 한다. 고려 가요 중에도 처용가가 악학궤범에 전해 후에 향가 해독에 도움을 주었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兮隱吾下於叱古 二兮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
10. 우적가(遇賊歌) | 영재(永才) | 삼국유사의 권5 “도적을 만나다”에 이 노래를 짓게 된 이유 등이 실려 있으며, 이 노래의 내용을 칭송하여 지은 한시 한 편이 있다. 8세기 중엽에 지어진 노래이다. |
11. 원왕생가(願往生歌) | 광덕(廣德)의 처 | 노래의 원문에 “願往生”이란 말이 겹쳐서 나와서 불교에서는 이를 “극락에 가고 싶다”라는 말로 풀이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극락노래”라고 한다.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며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문무왕 때 또는 효소왕 때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광덕(廣德)의 처가 지은 10구체 향가라고 하는데, 광덕이 죽자 그의 친구 엄장(嚴莊)이 그 처에게 동침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했다는 설화만 전해 온다.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 多可支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 阿邪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 달하 이제 서방까지 가십니까? 무량수불전에 일러다가 사뢰고 싶습니다 다짐 깊으신 부처님께 우러러 두 손 모두어 사뢰어 원왕생 원왕생 그릴 사람 있다 사뢰고 싶습니다 야으, 이몸 남겨 두고 사십팔대만 이루실까. |
12.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 득오곡(得烏谷) | 신라 효소왕 때에 만들어진 8구체 향가로서, 화랑가이다. 화랑 죽지랑의 낭도였던 득오곡(得烏谷, 또는 득오랑)이, 그의 스승 죽지랑을 사모하고 찬양하여 지은 8구체 향가로서, 노래의 주인공은 화랑 죽지랑이므로 노래의 이름이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이며, 일명 득오곡모랑가(得烏谷慕郞歌)라고도 부른다. 죽지랑은 김유신(金庾信)의 부원수로서 삼국 통일에 공이 컸다. 득오곡은 그의 낭도로서 풍류와 도술로 이름이 높았다. 노래는 이두문으로 되어 있다. |
13. 원가(怨歌) | 신충(信忠) | 원가(怨歌)는 신라 효성왕 때 신충(信忠)이 지은 8구체 향가로서, 연군가(戀君歌)이다. 효성왕이 등극 전 신충과 잣나무를 두고 후일을 언약하였으나, 등극 후 그 일을 잊으매 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그 나무가 말랐다. |
14.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 희명(希明) | 신라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 지은 향가. 한기리(漢岐里)의 여인 희명(希明)은 다섯 날 난 제 아이 눈이 멀자 분황사 좌전(左殿)에 있는 천수관음(千手觀音) 벽화 앞에 데려서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를 불렀더니 기적적으로 눈이 틔었다는 한다. |
2. 균여전에 실린 향가 11수
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고려 초 균여대사(923~973)가 지은 11수의 10구체 향가다. 균여대사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화엄경의 보현보살 열 가지 행원에다 낱낱이 향가 한 수씩을 짓고, 11장은 그 결론으로 된 사뇌가이다. 고려 제4대 고려 광종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글은 해인사 장경판으로 전하는 균여전에 향찰로 기록되어 있다
나. 그 외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 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 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 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 청불왕생가(請佛王生歌), 상수불학가(常隨佛學歌), 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 보현회향가(普賢廻向歌), 총결무진가(總結无盡歌)
3. 기타
화랑세기 6세 세종 장에 미실(美室, 546/548 ~ 612년 이후)이 사다함(斯多含, 생몰년 미상, 풍월주 562년 ~ 564년, 신라의 화랑으로 진흥왕의 대가야 정복에서 활약하였다. 성은 김, 급찬 구리지의 아들로서 내물 마립간의 7세손)이 출정할 때 지었다는 풍랑가(哀願歌)가 기록되어 있다. 진위에 대해 논란이 많다. 고려 예종 15년 1120년 예종이 서경에서 열린 팔관회(八關會)에서 태조 왕건이 927년 공산 동수회전(桐藪會戰)에서 견훤과 싸우다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 죽은 공신인 김락(金洛)과 신숭겸(申崇謙)의 가면극을 보고 그 둘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8구체의 향찰표기(鄕札表記)의 가요인 도이장가(悼二將歌)를 향가로 보는 이도 있다.
Ⅳ. 삼국과 가야의 문물 전파
삼국 중 백제가 지리적, 정치적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웠으며 백제의 학문과 기술을 일본의 야마토 정권(야마토 시대(大和時代, 250년 ~ 710년)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현재 나라 현의 아스카촌을 중심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국가 형성, 확립의 시대) 수립과 아스카문화(飛鳥文化, 7세기 전반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때, 아스카 지역(현재의 나라 지역)에서 발달한 문화)를 대개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6세기 중엽부터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645년)이 행해지기 이전인 7세기 중엽까지. 593~645)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아스카시대(593~710)는 두기로 나누는데 모노노베씨(物部氏)와 싸움에서 이긴 소가씨(蘇我氏)가 조카 쇼토쿠타이지를 통해서 아스카시대를 연때부터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645년)까지를 아스카문화(飛鳥文化, 593~645)라고 하고 그후를 하쿠호문화(白鳳文化, 645~71))라고 한다.
백제 | 아직기(阿直岐) | 4세기 중엽(372년) 근초고왕때 일본태자에게 한자 가르쳤다 |
칠지도(七支刀) | 근초고왕 24년 369년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어 왕자에게 왜왕에게 하사하도록 했다. | |
왕인(王仁) 박사 | 근수구왕때 천자문(1권)과 논어(10권)를 전하고 경학과 역사를 가르쳤다. | |
인사라아(因斯羅我), 정안나금(定安那錦) | 5세기 중반 개로왕때 463년 화가 인사라아(因斯羅我)는 회하 발전에 기여했고 정안나금(定安那錦)은 비단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 |
단양이(段楊爾), 고안무(高安茂) | 6세기초 무령왕때 513년 단양이(段楊爾), 516년 고안무(高安茂)가 유학을 전해 주었다. | |
마정안, 문휴마나, 동성자언, 동성자막고, 류귀(柳貴), 노리사치계, 왕보손 | 6세기 전반 성왕때 531년 마정안(馬丁安), 544년 문휴마나(汶休麻那), 547년 동성자언(同城子言), 554년 동성자막고(同城子莫古), 554년 류귀(柳貴)등이 유학, 552년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가 불교, 위덕왕 원년 554년 역박사(曆博士)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이 천문과 역법을 전해 주었다. | |
위덕왕 | 6세기 후반 위덕왕때인 554년 2월 4명의 악인(樂人) 시덕 삼근(三斤), 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진노(進奴), 대덕(對德) 진타(進陀)), 577년 불교서적, 율사, 선사, 조불사(造佛師), 조사공(造寺工), 584년 불상, 588년 승려, 사공(건축기술자), 노반박사, 기와박사, 화가를 보냈으며 위덕왕 44년 597년 아좌태자(阿佐太子)는 일본의 쇼토쿠태자(聖德太子)상 그렸다. | |
혜총(惠聰, 慧聰) | 의덕왕 3년 588년 영근(令斤)・혜식(惠寔)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불사리(佛舍利)와 계율종을 전하였고, 595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머물렀다.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상신(相臣) 소가(蘇我馬子)가 호코사(法興寺)가 낙성되자 고구려의 승려 혜자(惠慈)와 더불어 그 사찰에 있으면서 포교에 힘썼다. | |
관륵(觀勒) | 무왕 3년 602년 관륵(觀勒)은 역서, 천문, 지리, 둔갑, 방술에 관한 책을 전해주고 성왕 32년(위덕왕 원년) 554년 2월 역박사(易博士) 시덕(施德) 왕도량(王道良), 의박사(醫博士) 나솔(奈率) 왕유릉타(王有㥄陀), 채약사(採藥師) 시덕 반량풍(潘量豊), 고덕 정유타(丁有陀), 악인(樂人) 시덕 삼근(三斤), 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진노(進奴), 대덕(對德) 진타(進陀)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 | |
미마지(味摩之) | 백제(百濟)의 음악가・무용가로서 중국 오(吳)나라에서 기악무(伎樂舞)를 배우고 돌아온 후 무왕 13년 612년 일본에 귀화(歸化)하여 사쿠라이(櫻井)에서 학교를 세우고 소년들에게 음악과 춤(기악무)를 가르쳤다. | |
도장(道藏) | 640년경에 귀족으로 태어나 출가한 뒤 백제가 망한 뒤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이며 성실론소(成實論疏) 16권을 지었다. | |
고구려 | 담징(曇徵) | 영양왕 21년 610년 일본 호오류지(法隆寺) 금당벽화를 그리고 5경과 종이, 먹, 멧돌 제조기술도 가르쳐 주었다. |
가서일(加西溢) | 영류왕 5년 622년 일본 最古의 수예품인 나라(奈良)의 추구사(中宮寺)가 소장해 전시하고 있는 자수작품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 가로 8m, 세로 2m)의 원화를 그려 주었다. | |
혜자(惠慈, ?∼623・일본명 에지) | 영양왕 6년 595년 일본에 건너가 섭정(攝政)이었던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사부(師傅)가 되고 이듬해 대신(大臣)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세운 호코사(法興寺)가 낙성되자 백제의 승려 혜총(惠聰)과 더불어 그 사찰에 있으면서 포교에 힘쓰다가, 615년 쇼토쿠태자가 지은 소(疏)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 |
혜관(慧灌) | 젊었을 때 수(隋)나라로 들어가서 가상사(嘉祥寺)에서 길장(吉藏)에게 삼론종과 성실종을 배우고 영류왕 8년 625년 일본에 삼론종(三論宗)을 전하였다. 그외 도일승려로서 혜편(惠便), 승륭(僧隆), 도현(道顯) 등이 있고 의학, 약학 기술도 전해주었다. | |
도징(道澄), | 당에 들어가 길장대사(吉藏大師)에게 삼론(三論)을 익힌 뒤 영류왕 11년 628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空)사상을 전했다 | |
신라 | 조선술, 축제술, 도자기 제조법, 의약, 불상 | 왜와 사이가 좋지 않아 상대적으로 교류가 적었으나 조선술, 축제술, 도자기 제조법, 의약, 불상을 음악을 전해 주었다. |
가야 | 스에키(須惠器) 토기 | 가야의 토기는 일본 스에키(須惠器) 토기의 원류가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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