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 브뤼기에르 주교와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갈등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에 정식으로 취임함으로써 모든 준비가 본 궤도에 오른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후에 펼쳐진 상황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도착하기 훨씬 전에 마카오를 떠났던 유 파치피코 신부는 1832년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왕 요셉이 북경에 오기 약 50일 전의 일이었다. 유 파치피코 신부는 1831년 1월 27일 유럽을 출발하였으며, 1831년 7월 31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조선으로 가라는 움피에레스 신부의 명령을 받고 마카오를 떠나 1831년 8월 26일 중국 광동에 상륙하였다. 그 뒤 유 파치피코 신부는 고향인 섬서성과 산서성 일대를 지났으며, 1년 정도 지난 뒤에 북경으로 갔다. 그러므로 유 파치피코 신부는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북경교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었고, 대목구장에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되었으며, 유 파치피코 신부 자신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 내륙을 여행하는 동안에 1831년 8월 28일, 1831년 9월 7일, 1832년 1월 2일 등 세 차례에 걸쳐서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고서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자기 자신은 포교성성 소속의 조선 선교사라고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문제는 1833년 2월 17일 왕 요셉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을 가지고 북경에 도착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교황청의 결정들이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 유 파치피코 신부 그리고 조선에서 온 정하상 등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와 유 파치피코 신부의 반응에는 무언가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먼저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조선 대목구의 설정을 반기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대목구장 취임을 인정하면서도, 조선인 신자들과 교섭을 벌이는 일은 왕 요셉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전혀 나서려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적극적으로 돕기보다는 소극적인 방관의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유 파치피코 신부 역시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껄끄럽게 지켜보면서 불만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아마 유 파치피코 신부로서는 본인의 소속과 역할에 관해서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주교가 신설된 조선 대목구의 장상이 되었다면, 포교성성의 명령을 받아서 조선으로 가게 된 자신은 완전히 조선 대목구에 소속된 선교사인지, 아니면 임시적인 조치로만 조선에 입국하는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아직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지를 맡기로 결정된 것이 아니어서 이러한 혼란은 더욱 증폭되었다. 게다가 유 파치피코 신부는 움피에레스 신부의 명령을 받고 있었던 처지였기 때문에, 자신의 활동을 보고하고 명령을 받아야 할 장상이 움피에레스 신부인지 아니면 브뤼기에르 주교인지도 불분명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일단 유 파치피코 신부는 북경을 방문한 조선인 신자 정하상을 만나서, 이듬해 초에 국경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조선 입국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 아래 진행되었다.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유 파치피코 신부의 조선 입국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와 선교 활동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하였다. 말하자면 왕 요셉이 정하상 등을 만나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 문제를 상의할 때에는 모른 척하며 관여하지 않다가, 유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으로 가는 계획을 수립하자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유 파치피코 신부는 1833년 3월 28일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지원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브뤼기에르 주교에게는 서한을 보내어 보고하지 않았다. 아마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가 조선 문제에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 파치피코 신부 역시 아직 정식으로 대면하지 못한 브뤼기에르 주교보다는 움피에레스 신부와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에게 더 많이 의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 파치피코 신부는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지시를 받은 왕 요셉의 안내인으로 삼아서 1833년 4월 10일 북경을 출발하여 만주로 향했다. 왕 요셉이 만주로 간 까닭은 장차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위하여 요동 지역에 도착할 때 임시로 머물 거처를 미리 알아보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왕 요셉이 다시 북경으로 돌아간 뒤 유 파치피코 신부는 그해 연말에 조선과 중국의 국경 지대에서 정하상 및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1780~1839) 등을 만나서 그들의 안내로 1834년 1월 3일 조선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였으며, 1월 16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한양에는 남이관과 정하상의 가족들이 함께 거처하는 집이 있었다. 유 파치피코 신부는 이 집에 은신하며 극소수의 신자들에게만 성사를 베풀면서 조선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왕 요셉을 북경으로 파견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곧이어 조선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기 위하여 1832년 12월 19일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행선지는 복건 대목구장의 주교관이 있는 복건성 복안현(福安縣)이었다. 당시 복건 대목구는 마닐라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스페인 도미니코회가 관할하고 있었으며, 디아스(Jose Carpena Deaz, 1760~1849) 주교가 대목구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포르투갈 선교사들보다는 포교성성과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일단 복안으로 가서 복건 대목구장의 도움을 받아 중국 대륙을 북상할 계획이었다.
마카오를 떠나 복건으로 가는 배 안에는 브뤼기에르 주교 외에도 6명의 선교사들이 타고 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사천 대목구에 배속된 신임 선교사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신부가 있었고, 강서 대목구로 가는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라리브 신부도 있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3명이었다. 그 외에는 남경교구 관할지인 강남 지방으로 파견된 포르투갈 라자로회원 2명, 포교성성 선교사로서 산서 대목구로 가는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원 도나토(Alphonso di Donato, 1783~1848) 신부 등이 있었다. 도나토 신부는 훗날 브뤼기에르 주교가 산서 지역에 체류할 당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다음에 이 소식을 유럽에 알리는 부고 서한을 보냈던 인물이다.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이 복건성 해안 지방에 위치한 항구 도시 복안현에 도착한 것은 1833년 3월 1일이었다. 복건 대목구장 디아스 주교는 일행을 환대하였고, 각자가 임지로 출발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휴식을 취한 뒤인 3월 9일에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사천 선교지로 가는 대신에 주교를 따라서 조선으로 가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한 명의 선교사도 아쉬운 브뤼기에르 주교로서는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나, 모방 신부의 배속지를 변경하려면 우선 사천 대목구장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사천 대목구로 편지를 보내는 한편, 일단 모방 신부는 복건 대목구에 남아서 사천 대목구장 폰타나(Louis Fontana, 1780~ 1838) 주교의 허락을 얻은 다음에 북쪽으로 와서 브뤼기에르 주교와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 다음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인 신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인 북경으로 가는 여정을 계획하였다. 일단 남경으로 가서 남경 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총대리인 카스트로 에 무라(J. Franea-Castro e Moura, 趙) 신부를 만나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에게서 중국인 안내인을 소개받아 중국 대륙을 종단하여 북경까지 가려는 것이었다. 1833년 4월 23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배를 타고 복안을 떠나서 5월 12일 절강성 북부 지역에 상륙하였다. 그런 다음에는 내륙 운하를 이용하여 남경 부근에 위치한 어느 교우촌까지 갔다. 연락을 받은 남경교구의 총대리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러 5월 18일에 방문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을 북경까지 안내할 안내인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카스트로 에 무라 신부는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명령에 따라 산동 지방으로 떠나야 하는데, 자신도 안내인을 구할 수 없어서 직예 지방에서 안내인을 불러야 할 형편이라며 난색을 표하였다. 하는 수 없이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으로 보낸 왕 요셉이 자신에게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1833년 6월 26일 드디어 기다리던 왕 요셉이 브뤼기에르 주교가 머물고 있던 곳으로 찾아왔다. 왕 요셉은 북경에서 있었던 일과 요동까지 가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임시 거처를 물색한 일 등에 관해서 자세히 보고하였고,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편지도 전달하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을 향해서 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왕 요셉 외에도 2명의 안내인을 더 고용하여 모두 4명이 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1833년 7월 20일 남경 부근을 출발한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운하를 거쳐서 양자강을 건넜으며, 그 뒤로는 육로로 북상하였다. 한여름의 푹푹 찌는 무더위와 허기, 갈증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양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한 안내인들 때문에 주막에서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절강성 북쪽에서 시작하여 산서성의 경계 지역까지 약 3천 리가량 이어지는 평야 지대를 가로질렀으며, 1833년 8월 13일에는 황하를 건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고된 여행으로 병까지 난 몸을 이끌고 북경과 가까운 직예 지방의 어느 마을에 도착하였다. 때는 1833년 8월 26일의 일이었다. 결국 약 한 달 동안 중국 내륙을 종단하였던 것이다.
탈진한데다 병까지 난 브뤼기에르 주교는 어느 교우의 집에서 3주 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다. 휴식하는 동안 북경으로 파견한 연락원은 1833년 9월 22일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편지와 약간의 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편지에서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더러 산서 대목구로 가라고 하였다. 북경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는지, 아니면 북경도 박해 상황이니 서양인이 들어오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이었는지 그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아무튼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지시대로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바꾸어 산서 대목구로 향하였고, 1833년 10월 10일에야 산서 대목구장의 주교관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당시 산서 대목구를 책임지고 있던 인물은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살베티(Joachim Salvetti, 1769~1843) 주교였다. 그런데 살베티 주교의 주교관이 있던 곳, 즉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이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산서 대목구의 주교좌가 산서성 태원부(太原府)에 있었다고 하며, 또 살베티 주교가 10년 뒤인 1843년에 태원부에서 사망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브뤼기에르 주교가 도착한 곳이 태원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9월 22일 조선인 신자들과 연락하기에 더 용이한 만리장성 너머의 서만자(西灣子)로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1년 동안 체류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산서 지방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다시 한 번 북경에 다녀온 왕 요셉이 가지고 온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편지에는 주교 자신은 브뤼기에르 주교를 도와주고 싶지만 요동의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시기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왕 요셉의 말로는 요동의 신자들이 거절한 것이 아니라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가 요동의 신자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브뤼기에르 주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1833년 11월 18일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왕 요셉에게 주어 북경으로 보냈는데, 그는 조선 교우들을 만나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그 이유는 1833년 연말에 조선 신자들이 북경으로 오다가 유 파치피코 신부를 만나자 그를 입국시키기 위해서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로 하여금 북경에 있는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와 그의 영향을 받고 있는 유 파치피코 신부 등이 자신의 조선 입국을 가로막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조선 대목구의 설정 자체를 무산시키려는 책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