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과연 천주교도인가 아니면 유학자인가? 심심찮게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이다. 사실상 다산의 진정한 속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팩트(사실자체)는 알 길이 없다. 단지 우리에게는 이러저러한 기회에 다산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말이나 그가 당시에 처했을 법한 정황적 증거가 전부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다산의 속마음과 일치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다산이 살았던 당시처럼 종교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가 없이 여차하면 생사의 기로에 서야 할 감시의 서슬이 시퍼럴 때 사람들의 진심어린 속내는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숨겨지고 감추어지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산의 진정한 속내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허망한 논의라 생각된다. 이는 하늘과 다산만이 알 뿐 아무도 모를 일이니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는 게 좋으리라. 도덕성 회복을 위한 다산의 처방은? 여하튼 천주라 부르건 상제라 부르건 다산이 그런 신성의 존재를 믿었거나, 아니면 믿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니 여기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게 옳은 일이다. 조선의 양대 전란 이후 피폐한 민생과 더불어 땅에 떨어진 도덕성을 구제할 수 있는 처방이 무엇인지가 다산의 절실한 궁금증 중의 하나였다. ‘스스로 삼가하라’는 유가의 신독(愼獨)이라는 주문은 격이 높은 극소수의 선비들에게나 의미 있는 처방일 뿐 대부분의 서민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에 불과했다.
이승을 다스리는 무서운 법(法)이 있긴 하지만 그 칼날은 피할 수도 있기에 서민들의 잃어버린 양심을 되찾아줄 방법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다산에게 남아있는 심리적인 위협은 저승을 다스리는 천주나 상제의 위력 뿐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천주는 죽어서 착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주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권능을 가지고 있지만, 상제에게는 내세와 더불어 그점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천주의 존재를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은 다산에게 내키지 않는 선택지였다.
도덕성 회복을 위한 처방으로서 다산이 선택한 최선의 도덕적 처방은 스스로 내면적 수양을 통해 신독하는 것이긴 하나 이는 극소수의 上善(선택된 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력한 상선벌악의 권능을 가진 절대 유일신의 위협을 빌리자니 이는 서양에서 온 천주교의 처방이라 내키지 않았고 결국 최선이 아닌 차선의 방도인 상제라는 모호한 처방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난번 우리 사회에 충격을 안겨준 성완종 리스트를 모두들 기억하고 있다. 죽으면서도 거짓말을 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 리스트에 오른 사람 중 적어도 일부는 돈을 먹은 것이 사실일 터, 그러나 아직도 그중 한사람이라도 양심선언을 통해 죽은 성 사장의 원혼을 달래주는 사람이 이 땅에 없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리스트에 오른 인사 중에 자기수양을 통해 신독의 가르침을 실행한 선비다운 자가 하나라도 있다면 양심선언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중 독실한 기독교 신도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죽어서 내세의 혹독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백일하에 참회록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승에서 용서받지 않으면 저승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 정치계의 인사들은 상제의 처분만 기다리며 우물쭈물하고 있다는 말인가? 수양을 통한 신독이든, 상선벌악의 신성이든 정치인들만 욕할 것도 없다. 많은 사람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고 있으니 거짓말 공화국이라는 말도 지나치지 않은 듯하다. 우리는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아이나 어른에 무관하게, 남녀의 구분도 없이, 입만 열면 사실과 다른 말을 한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그걸 막기 위해 열 번 거짓말을 해야 하고 그러다가 모두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정직은 사회적 신뢰의 기반이다. 정직하지 않아서 사회에 만연한 불신풍조 속에서는 아무도 이득을 보지 못한다. 군사력보다, 경제력보다 더 강한 것이 국민 상호 간을 묶어주는 신뢰의 힘이다. 그래서 공자님도 “백성들 사이에 신뢰가 없다면 나라도 세울 수가 없다”고(民無信,不立) 했다.
자기수양의 기반위에 신독의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상선벌악의 권능을 가진 신성의 위력을 통해서라도 백성들의 도덕성을 회복해보고자 했던 다산의 충정을 우리는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천주라면 어떻고 상제라면 어떠하겠는가. 그런 존재의 힘이라도 빌어서 백성들이 거짓말 좀 적게 하고 좀 더 착해질 수 있다면 다산은 그런 처방이라도 감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