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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 대신 자장면곱빼기를 뚝딱 먹어치운 규태는 중국집을 나와 곧바로 도곡동으로 차를 몰았다.
Y세브란스병원 712호 특실. 박정민 사장이 입원한 병실을 노크하자 그의 부인이 문을 열었다. 신분증을 본 그의 아내가 박정민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가 고개를 들어 눈인사를 건넸다. 오뚝한 콧날에 귀티가 줄줄 흐르는 박정민 사장은 키까지 커서 환자복차림인데도 어딘가 우아한 멋이 풍겨나고 있었다.
팔뚝에 꽂은 링거는 거의 바닥이 보였다. 박정민의 아내 정현숙도 처녀 때는 몇 편의 영화에 주연을 맡은 톱스타출신답게 나무랄 데 없는 미인이었다. 약간 살이 붙었을 뿐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문득 그녀가 나신裸身으로 출연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가 떠올랐다.
- 제목이 뭐였더라.
영화를 좋아하는 규태는 비록 영화관출입은 자주 못하지만 비번非番인 날에는 종종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보고는 했었다. 그 영화에서 전라全裸의 몸매를 뽐냈던 정현숙의 샤워 장면이 떠올라 규태는 괜스레 그녀를 마주보기가 민망했다.
- 정말 눈부신 장면이었어.
병실이지만 화사함을 넘어 화려하기까지 한 부부의 모습을 보니 병원에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 이런 사람들 속에 있는 내 모습은…. 제길, 김 팀장 말대로 머리라도 좀 빗고 들어올 걸 그랬나.
링거를 뽑고 간호사가 나가자 규태는 정식으로 신분을 밝히며 인사를 건넸다. 남편을 부축하던 정현숙이 얼른 일어나 의자를 권했다.
“박 사장님께 몇 가지 여쭤 볼 게 좀 있어서….”
“알겠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지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정현숙은 뜻을 알아차리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병실을 나서는 그녀의 자태에서 미모 못지않은 교양과 바른 예의를 보았다. 규태는 다시 정민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미 사건 당일 잠깐 양평경찰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사건에 대해 직접 취조를 하거나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었다.
“다치신 데는….”
“괜찮습니다. 충격이 좀 크긴 했지만.”
정민이 살짝 들춘 어깨에 압박붕대가 감겨 있었다.
“상처보다는 기자들을 피하려고 숨어있을 뿐입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하고 담백하다. 그렇게 생각이 든 규태는 “다행입니다.”라고 받으며 본격 질문을 하고자 말을 이었다.
“불편하시겠지만 몇 가지만….”
“괘념치 마십시오, 최대한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범인들을 빨리 잡아야 남 교수님도 편히 눈을 감으실 테니까요.”
성공한 사업가답게 정민의 풍모나 어투는 기품이 있었다. 그런 그가 환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시원스레 응해 준다.
“어딜 가시는 길이었나요?”
“이미 소문난 바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명분은 다음에 찍을 영화의 배경장소를 물색하는 길이라고 기자들한테 둘러대기는 했습니다만…. 사실은 밀월여행 같은 거였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정민은 머리까지 긁적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너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송구스럽기까지 하군요.”
정민이 두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이해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자 규태는“충분히요.”라고 답하며 싱긋 웃었다. 이해 못할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 거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사내라면 그러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 규태는 40대 중반의 나이라는 정민의 외모가 10살쯤 아래인 자신보다도 젊어 보인다고 느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섹스파트너와 밀월여행을 즐기는 것쯤이야 이미 다반사처럼 흔한 일이다. 그걸 손가락질 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열등의식일 뿐이다. 규태는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언감생심 그런 꿈조차 꿀 수 없는 자신의 신세가 차라리 초라하게 인식되고는 했었다. 서른다섯의 노총각이 독신자 원룸의 화장실에서 자위행위를 끝내고 난 뒤, 자신의 꼬락서니가 한탄스러워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쉰 적이 어디 한두 번뿐이던가. 젊은 여자들과 중년유부남들의 쌍쌍여행이라는 게 약간 거슬리기는 했지만 규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규태가 다시 물었다.
“목적지는 어디였나요?”
“아, 예! 사건현장에서 20여 분만 더 가면 제 전원주택이 한 채 있거든요. 그리 가는 중이었습니다.”
“소문처럼 현소영씨는 남 교수님의…”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 교수님의 대학제자이기도 하고…. 잘 아시겠지만 남 교수님의 원작인 세컨드 레이디에 출연시켜 스타반열에 들어섰지요.”
규태는 애인이라고 해야 할 지, 파트너라고 해야 할 지 어휘선택에 잠시 망설였는데 정민이 눈치 빠르게 알아서 대답해주니 후련한 만큼 고맙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시원스럽게 답변을 해줄 거라고 확신하면서 규태는 짤막하게 물었다.
“그럼, 오수연씨는?”
“예, 제 파트너였습니다. 수연이 역시 남 교수님 제자고 영화배우 지망생이었지요. 현소영과는 대학 동기생이기도 했고요.”
“그럼 남 교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인가요?”
“그렇긴 하지만…. 파트너나 여자로 소개받은 건 아닙니다.”
정민은 손을 저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컵에 물을 따랐다. 물 컵을 입에서 뗀 정민은 규태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답했다.
“영화제작을 하다보면 종종 출연섭외를 받게 되지요.”
작년 12월,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 중 방화邦畵와 외화外畵를 통틀어 최대관객을 동원했고, 지금도 그 기록을 갱신 중인‘세컨드 레이디’의 흥행성공으로 박정민 사장의 JM 시네마는 몇몇 경쟁사들을 제치고 국내최대의 영화사로 우뚝 서게 된다.
남현태 교수가 정치권을 배경으로 스릴러에 멜로를 가미한‘세컨드 레이디’의 시나리오를 들고 JM 시네마를 방문했다. 그 전에도 그의 시나리오 두 편을 영화로 만든 적이 있기에 두 사람은 그럭저럭 교분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세컨드 레이디’, 영부인領夫人을 지칭하는 ‘퍼스트레이디first lady’에 빗댄 제목. 대통령의 두 번째 여자 혹은 숨겨둔 여자쯤으로 의미를 부여한 제목이다. 시나리오를 검토한 정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나리오만 놓고 볼 때는 대박 감으로 충분하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최고의 권력을 지니게 된 남자, 그는 말 그대로 지존至尊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신분변화와 함께 비틀려진 애정, 그런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판단이 듦과 동시에 복수를 택한 여자. 그 여자 세컨드 레이디와 지존인 대통령, 두 사람을 둘러싼 권력상층부, 그리고 야당정치인들 사이의 피 말리는 갈등을 기막히게 묘사했다. 전임대통령 중 누군가를 슬그머니 빗대는 것 같으면서도 현 정권의 부조리를 은근히 파헤치고 있다. 예전 같으면 감히 영화로 만들 꿈도 꾸지 못할 내용이었다.
정민은 시나리오를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고, 동시에 대박을 예감했다. 정민은 즉각 유광진 감독을 불러‘세컨드 레이디’의 원고를 건넸다. 유 감독은 JM 시네마의 전속연출자로 있던 터라 그에게 남 교수의 시나리오를 검토시키고자 건넨 것이다.
정민이 시나리오에 대해 호평을 하자 현태가 계약에 대해 언급했다. 상당히 군침 도는 계약조건을 제시했다. 계약의 대전제는 흥행에 따른 러닝개런티 제였다.
처음엔 극장상영을 통한 총매출액의 20퍼센트를 작품료로 달라는 현태의 말에 정민은 기겁을 하고 거절했다.
“제작비와 광고비, 출연료 등을 빼면 중박 정도의 흥행을 올리고도 별로 수지가 맞지 않는 게 영화제작의 현실이거든요. 그런데 이익금도 아닌 매출액의 20프로라니, 전 황당했지요. 사실 시나리오만 좋다고 영화가 모두 성공한다면 우리나라 영화산업은 지금보다 훨씬 앞섰을 겁니다.”
영화얘기로 들어서자 정민은 스스로 도취되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규태도 편안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대신 유료입장객이 600만 명에 미치지 않으면 작품료를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600만 명을 초과했을 때에 한해 총매출 대비 20퍼센트의 작품료를 달라는 남 교수님의 제안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얼추 추산해도 수지가 맞더라고요.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었지만 남현태 교수가 누굽니까. 자신감 가득한 남 교수님한테서 이미 대박을 예감했다고나 할까요.
더구나 막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온 유광진 감독이 환한 얼굴로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하자 박정민 사장은 주저 없이 남현태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출연료 등의 제작비와 광고비, 일체의 관리비를 제하고도 200만 명만 들어서면 손해 볼 일이 없다는 판단이 섰지요. 대략 어림잡아 200만 명 정도를 손익분기점損益分岐點으로 잡은 거죠. 영화사 측이 거부할 수 없게끔 제반조건을 맞춰서 들고 온 남현태 교수의 패키지 딜package deal에 구미가 당겼던 겁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제작뿐 아니라 배급까지 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남 교수의 제안이 맘에 들었던 거지요.
정민은 이 대목에서 마치 계가計家를 마치고 승리를 확신한 기성처럼 검지와 중지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남현태 교수의 두 번째 조건은 자신의 제자인 오수연을 여주인공으로 발탁하자는 것이었다. 오수연은 두 편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경력 밖에 없는 무명의 신인이라 할 수 있다. 연기력만 따라준다면 이미 알려진 흔한 얼굴보다 신선한 이미지의 신인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미모는 주연 여배우로 손색이 없었다. 연기력 또한 남 교수가 적극 추천하는데다 그의 애제자라는 사실만으로도 확인 절차가 필요치 않을 정도였기에 정민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처음 얘기를 꺼내고 불과 일주일 만에 계약이 이루어졌다. 출연자들의 섭외를 마치자 영화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웬만한 영화의 평균치에도 미치지 않는 예산, 생각보다 훨씬 적은 제작비가 소요되었기에 정민은 느긋했다. 더구나 남 교수가 촬영현장을 따라다니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편집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보수 없이 총연출자로서의 역할까지 맡은 셈이었다.
규태는 차분하게 정민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제동을 걸지 않고 그가 하는 말을 다 듣기로 했다. 사건과 관계가 있건 없건 달변인 그의 얘기는 우선 재미가 있었다. 정민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국내최고의 영화평론가이며 영화에 대한 대중선호도를 구석구석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남현태 교수의 노하우 덕분에‘세컨드 레이디’는 시사회부터 들끓기 시작했지요.”
금상첨화로 정치권 특히 여당과 청와대에서 잠시 보였던 민감한 반응이 엄청난 프리미엄으로 작용해 주었다. 영화는 상영과 동시에 문화이슈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기존의 흥행기록을 속속 깨뜨렸다.
‘세컨드 레이디’를 관람한 다수의 관객들은 영화관을 나와서까지 라스트 부분의 삽입곡‘레퀴엠requiem’의 슬프고도 처절한 선율에, 그러면서도 장중한 음향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남현태 교수의 요청에 의해 믹싱mixing된 빠른 템포의‘레퀴엠’이 다시 느릿하게 바뀌며, 펼쳐진 영상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다. 사실주의적인 내재음內在音을 최대한 줄이고, 외재음으로서 관객들의 정서를 영화 속으로 몰입시켰다. 표현에 적극적이고 상징적 의미들에 주력하는 습성 역시 남 교수의 스타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그의 입김이 다분히 배어서 만들어졌다.
음악평론가인 S대학의 이숙희 교수는 영화의 줄거리를 묘사함에 있어 주제음악을‘세컨드 레이디’만큼 적절하게 삽입한 예를 본 적이 없다고 호평했다. 여주인공의 소용돌이치는 심리상의 격변과 곧 치닫게 될 비극이 관객 스스로의 것처럼 느끼게 하는데 음악이 충분한 역할을 했다면서 박하기로 유명한 영화평론가 오성천씨도 찬사를 보냈다.
무엇보다 관객들의 대다수는 실제로 역대 대통령들 중 누군가를 영화의 내용에서 발견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영화 밖에서도 자신이 본 영화에 몰입하게 되는 건 바로 남 교수가 관객의심리를염두에두고연출자에게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게끔 조언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영화는 근거도 없이 K 전 대통령과 미스코리아 진 출신인 N씨의 스토리라는 루머로 번져 또 다른 얘깃거리로 이어졌다.
그야말로‘세컨드 레이디’는 영화 체험의 커다란 심리요소인 파이현상phi phenomenon과 잔상효과殘像效果를 톡톡히 담아낸 영화라면서 정민은 어려운 말로 긴 얘기를 마무리했다.
결국 현재까지 1,500만 명의 유료관객을 돌파함으로써 영화사상 초유의 히트를 치게 된 것이었다. 그 후로 정민과 현태 두 사람은 사업뿐 아니라 골프, 해외여행 등 생활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며 동반자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세컨드 레이디엔 오수연씨가 아니라 현소영씨가 여주인공이었잖습니까?”
정민의 얘기에 조용히 귀 기울이던 규태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정민은 마신 물 컵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그랬죠.”
“…….”
“세컨드 레이디의 연출을 맡았던 우리 유광진 감독이 오수연을 오디션까지 시켰고 꽤 만족스러워 했는데 웬일인지 남 교수는 촬영 직전에 현소영으로 배역을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난감하기는 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어요. 작품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라는 데야….”
현소영은 재학 중에 M방송사의 신인탤런트로 발탁되기는 했지만 영화나 방송 출연경력이 전혀 없었다. 간간이 조연급으로 대학가 연극무대에 섰던 게 고작이라 무명의 신인이기는 오수연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작가의 입김이 크다고 해도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영화계의 현실에 문외한이기는 하지만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규태가 물었다. 정민은 빙긋이 웃다가 덧붙였다.
“저도 나중에 알았지만 남 교수님과 현소영은 졸업 전부터 깊은 관계였더군요.”
“그랬습니까?”
“그런 걸 미리 알았다고 해도 여배우가 교체되는 걸 반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촬영이 시작된 후라면 또 모르지만요.”
“오수연씨의 실망이 컸겠는데요.”
규태는 오수연이라는 아가씨에 대해 호기심이 동했다. 사건 후 얼핏 보았지만 현소영에 뒤지지 않는 미모였다. 그녀가 여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 규태는 잠시 두 번이나 본‘세컨드 레이디’의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엔 그랬지요.”
정민의 대답에 규태는 그녀의 심정이 참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성공했으니 더욱 아쉬움이 컸을 것 같았다.
“워낙 낙천적이고 착한 아가씨인지라 금세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더군요.”
“그렇게 해서… 박 사장님이 오수연씨를 알게 된 거였군요.”
그녀가 금세 밝은 모습을 되찾는데 박 사장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군요. 그런 뜻으로 규태가 말하기도 했지만 정민도 그렇게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했다.
“그게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수연이와 특별한 관계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약간은 변명처럼 들린다. 그럼 지금은 특별한 관계? 특별한 관계란 어떤 관계일까. 그러나 규태는 그 관계의 내용을 묻지는 않았다. 우문愚問이 될 게 뻔했다. 물 한 잔을 더 마신 정민이 답변을 보탠다.
“수연이는 배우로서의 자질도 뛰어났지만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잠재력 또한 대단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 애가 원하면 배우로든 작가로서든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호감이 가면서 생긴 생각들이지만요.”
정민은 수연과 가까워지면서 그녀가 얼굴이 알려져 스캔들로 인한 구설수의 사정권 내에 있는 배우로 크기보다는 작가로서 우뚝 서기를 원했다. 영화 사업의 성공은 곳곳에 널려 있는 스타보다는 단 한 가지라도 훌륭한 작품만 있다면 성공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훌륭한 배우와 하나의 소중한 작품은 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품의 비중이 크다.
그렇게 비유한 정민의 설득을 수연이가 받아들였고, 지금은 배우의 길을 거의 포기하고 작품 활동에 전념한다면서 정민은 오수연과의 관계 설명을 마쳤다. 규태의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지어졌다. 대략 특별한 관계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솔직히 여자로서 옆에 두고도 싶었지만, 수연이한테 명작을 생산해내게 하고 싶었지요. 그 애를 통해 투자 욕구가 동했다고나 할까요. 전, 죽을 때까지 영화인이고 장사꾼이라….”
정민이 묻지 않은 속내까지 털어놓자 규태는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스몄다. 취조나 신문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일개 말단형사인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장황하게 배경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자신의 전문분야를 설명하는 자아도취적 언급이 없지 않았지만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 또한 적지 않았다. 중간에 그의 아내가 병실 문을 열기도 했는데, 정민은 오히려 아직 얘기 중이라며 아내를 나가있게 했다.
“이 형사님께서 이 사건의 일선수사관이시니까 보다 빠른 해결을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아는 한 소상히 말씀드린 겁니다.”
정민은 다소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서 말을 맺었다.
“박 사장님의 심정, 알고도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네 분의 그날 여행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까?”
정민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 주변에선 아무도 모르지만, 다른 세 사람은 어떨는지 알 수 없지요.”
“네, 그렇겠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너무 피곤하게 해드렸습니다.”
규태는 아무렇게나 뻗친 덥수룩한 머리숱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실 앞까지 나온 정민은 규태에게 악수를 청하며 부탁했다.
“수고해 주십시오. 꼭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규태는 일부러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천천히 계단으로 내려왔다. 참고인을 만나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곧바로 느낌을 정리하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었다. 그러나 오늘은‘세컨드 레이디’의 장면들만 그득하게 머리를 채운다. 이미‘세컨드 레이디’의 장르와 모티브를 모방한 아류작蛾類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컨드 레이디’를 포함해서 남 교수가 만든 영화들, 정확히는 그가 각본을 쓴 서너 편의 영화들이 방화의 장르를 선도하는 경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현태 브랜드’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중에 그가 죽고 말았다. 문득 누군가가 그의 영광을 시기해서 생긴 일처럼 느껴진다.
- 죽어서 그의 이름은 더욱 빛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처럼 훌륭한 영화인의 죽음은 당사자한테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규태는 막 박정민 사장한테서 영화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나자 마치 전문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웠다.
1층 로비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정현숙이 보였다. 그냥 가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규태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모님! 오래 나와 계시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말씀 모두 나누셨나요?”
“예, 덕분에 수사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현숙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병실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30대 후반여성의 걸음답지 않게 무척이나 경쾌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규태는 병원 현관의 회전문 속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그녀가 출연했던 그 영화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전라의 샤워 장면 후에 이어진 베드신은 파격적이었다. 당시 최고의 남자배우였던 황세현과 정현숙의 베드신은 실연實演이었다는 소문이 떠돌기까지 했었다.
- 이따가 집에 들어갈 때 비디오 가게 주인한테 물어봐야겠군.
장면이나 인물의 얼굴은 생생한 영화가 제목이나 배우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답답했다. 규태는 그럴라치면 그걸 생각해내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밖으로 나와 잠시 멈칫한 규태는 병원을 다시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정현숙을 처음 볼 때부터 들기 시작한 의구심이었다. 결과적으로 외도를 하다가 발각된 남편의 아내가 아닌가. 그런 아내치고는 얼굴에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죽었고 세상이 들먹거릴 조짐까지 보이는데.
- 그 정도쯤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건가. 그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걸까.
그래도 미심쩍어 병원 쪽을 한 번 뒤돌아보다가 주차장으로 걸었다.
- 그럴 수도 있겠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상식을 넘어서 사는 사람들이니까.
카악, 침을 뱉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잿빛 하늘에서 다시 눈발이 흩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