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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매튜 스튜어트 지음/ 석기용 옮김
9장 스피노자의 신
<에티카>,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의 기록
에티카 제1부는 ‘신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모든 것이 다 신에 관한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이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이다.
1. 신
- 17세기의 신은 골치 아픈 이름이 되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당혹스러운 종교적 신념의 다중성은 신의 본성에 관한 일군의 새로운 개념들을 산출했는데, 그중에서 모두가 특별한 문제없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은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다름 아닌 근대과학이라고 생각했다. 갈릴레오의 “그래도 그것은 돈다.” 라는 말은 인류 최첨단의 선구자들 사이에서는 비밀스런 조롱(신 또는 종교에 대한)의 외침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도대체 신이 할 일은 무엇이 남을까?(파인만) 라든가 우주의 기원에 관해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우주는 점점 더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스티븐 와이버그)라는 물리학자들의 말들이 파생됐다. 그로인해 철학적 고민이 생기는 지점인 것이다.
-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 사이에 빚어진 뚜렷한 갈등 앞에 대담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스피노자의 견해에 따르면, 신과 자연은 신이 곧 자연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갈등을 빚을 일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신과 자연에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라고 스피노자는 올덴부르크에게 설명한다.
- “신, 즉 자연”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구절은 대담무쌍한 직관에 근거하여 스피노자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와 매우 흡사해 보이는 무언가를 구축한다.
- 여기서 자연은 우리가 얘기하는 그런 종류의 자연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그것은 ‘빛의 자연(본성)’, 혹은 ‘인간의 자연(본성)’이라고 할 때의 ‘자연’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이성적인 탐구의 주제가 되는 것으로서 ‘자연’인 것이다.
- 스피노자의 자연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성이자, 어떤 의미에서 그의 철학의 요체라고도 할 수 있는 한 측면은 그러한 자연이 원리상 지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그의 철학은 세계 안에 궁극적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에 찬 선언이었다. 마음먹은 대로 결정을 내리는 불가해한 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 스피노자는 또한 ‘신, 즉 자연’을 실체라고 지칭한다. 아주 일반적으로 말해서, 실체란 ‘속성들 ’즉 무언가를 바로 그것으로 만드는 성질들이 귀속되는 그 무엇이다. 스피노자는 세계에는 오로지 단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증명했다고 주장한다. 그 유일한 실체는 무한한 속성을 고지며, 그 실체가 바로 사실상의 신이다.
-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세계의 만물은 그러한 실체, 즉 신이 가진 속성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양태는 간단히 말해 실체(신, 즉 자연)가 자신의 영원한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이다.(모든 인간, 모든 사유나 관념, 모든 역사적 사건, 지구, 별, 은하, 어제의 아침 식사, 그리고 이 책까지 어떤 의미에서 신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
- <에티카>의 가장 악명 높은 명제 중 하나는 신이 “지금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방법이나 질서를 통해 사물들을 생산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신과 세계의 관계는 실체와 속성 들 간의 관계와 같다는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된 것이다. 이런 사물들의 필연적인 측면이 존재한다는 견해는 소위 결정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존재’란 신을 제외하면 그 어떤 것의 본질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신이 “선하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스피노자에 따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상 만물이 신의 영원한 본질을 필연적으로 뒤따른 것인 한, 실제로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 역시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신 안에 있다고 추론해야만 한다.
- 스피노자는 우리가 기하학의 증명 결과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신도 아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는 “나는 삼각형의 세 각이 합이 두 직각과 같다는 것을 아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그것을 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2. 마음
신이 17세기의 문젯거리였다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 역시 완전한 오류의 냄새를 풍겼다. 이전까지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기독교적인 유럽은 문명의 원천이며, 인간이야말로 모든 창조 행위의 목적이라는 점이 자명한 사실로 이해되어왔다.
데카르트(1596~1650)
- 데카르트는 세계에는 극단적으로 구분되는 두 가지 종류의 존재자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마음(정신), 마음은 생각하고,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영원히 산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물질)가 존재한다. 신체는 일정한 기계적인 원리에 따라 공간 속을 돌아다닌다.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오로지 인간만이 마음을 갖기 때문이다. 즉, 나는 생각하고,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바위, 별, 고양이, 등으로 이루어진 나머지 세계는, 이를테면 거대한 기계로서, 자연의 법칙을 특징짓는 강철 같은 필연성 속에서 일련의 상태들을 이루며 부지런히 맞물려 돌아간다.
- 사유의 역사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야기들 중에서도 데카르트의 이른바 이원론은 흔히 사유의 근본적인 혁명이자 근대 철학의 출발점을 표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그의 작업은 아마도 새로운 위협에 직면한 오래된 진리들을 보존하고자 했던 시도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 본질적으로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기성 종교와 그 시대에 막 부흥하던 과학 사이에 맺은 일종의 정전협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철학자는 물리적인 세계에서 마음을 따로 떼어놓음으로써 영혼의 불멸성, 의지의 자유, 그리고 전반적인 인류의 ‘특별한’ 지위 등 정통파의 수많은 핵심적인 교리들이 물리 세계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초래할 수 있는 그 어떤 가능한 반박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활로를 확보해주었다.
스피노자(1632~1677)
- 스피노자는 마음이 자연 법칙의 적용에서 면제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 인간,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짧은 논문>에서 그는 핵심적인 신념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반드시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그리고 자연만이 참된 숭배의 대상이다.” 인간은 돌과 나무와 고양이가 그렇듯이 그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 왕국에 속해있다. 이런 단순한 명제와 더불어 스피노자는 지난 2천년 동안 종교와 철학의 심장에 꽂혀있던 말뚝을 뽑아낸다.
- 스피노자는 실체의 무한한 속성 중에서 두 가지는 바로 ‘사유’와 ‘연장’이라고 한다. 사유라는 속성의 측면에서 실체를 고려할 때 우리는 마음, 관념, 그리고 결심들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구 동일한 실체를 연장이라는 속성의 측면에서 고려할 때, 우리는 공간 속에 움직이는 물리적 대상으로서 신체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하는 실체는 동일한 하나이며, 이번에는 이 속성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저 속성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 심신 문제에 대한 스피노자가 말한 바에 따르면, 마음의 결정은 신체의 욕구 자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며, 신체의 기질에 따라 변동하는 것으로서 그런 점에서 신체는 생각해볼 수 있는 모든 심적인 행위를 ‘체현’할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장치라는 주장이 뒤따른다.
3. 구원
- 교회가 보편성을 상실하고 나자, 행복의 문제는 신의 처분에서 떨어져 나와 개인의 양심이라는 영역에 안착하게 된다.
- 스피노자는 행복은 곧 자유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에 따라서 행위 할 때,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현할 때” 그런 결과가 뒤따른다.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우리의 가장 깊은 본성에 따라서 행위 하는 특권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무지로 인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이 끌고 가는 대로 스스로를 방치해버리기 때문이다.
- 자유로 나아가는 스피노자의 첫 단계는 이성의 법정으로 감정을 소환하는 것이다. <에티카>에서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 이를 테면 사랑과 증오, 자만과 겸손, 놀람과 당황 등의 감정을 세 가지 개념을 써서 분석하는 이론을 제시한다. 그 세 개념은 쾌락과 고통과 코나투스다. 코나투스는 본질적으로 자기 존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충동 혹은 욕구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고 실제로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행위하고 살아가고 자신을 보존하고 그리고 각자 나름의 이해관계를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실현하고자 아는 코나투스를 지난다.
- 이러한 코나투스이 계획에 공헌하는 모든 것, 즉 어떤 사물의 힘이나 완전성의 수준을 증대시키는 것에서 기인하는 상태가 바로 쾌락이다. 그리고 고통은 그 반대의 일을 수행하는, 즉 사물의 힘을 악화시키는 것에서 기인하는 상태이다.
스피노자의 견해에 따르면 코나투스의 극대화는 모든 선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10장 신의 존재 증명/ 라이프니츠(1646~1716)
신을 구출하겠다는 라이프니츠의 꿈
2월 11일에 쓴 긴 글에서,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에게 진 자신의 철학적 부채를 한층 더 분명해 보이게 만든다.(스피노자주의?)
“일종의 가장 완벽한 마음(정신), 즉 신이....존재하는 것 같다. 이 마음이라는 총체적인 몸 안에 청체적인 영혼으로 존재한다. 사물들이 존재하게 된 것 또한 마땅히 이러한 마음 덕분이다.” 등등
- 그러나 이런 내용이 적혀있는 지면에서 몇 단락 아래에서 라이프니츠는 갑자기 입장을 철회한다. 신은 어떤 이가 묘사한 것처럼 형이상학적이고, 가상적이고, 사유나 의지나 행위를 할 수 없는 그런 무언가가 아니다. 라고
- 라이프니츠는 더 일어날 수 있는 일탈을 스스로 방지하기 위해서인 듯 스스로에게 과제를 부여 한다. “신이 인격체, 즉 지적인 실체라는 것을 보여야만 한다.” 라고 하면서 바로 지금 그리고 그이 나머지 생애 동안, 라이프니츠는 신이 행위의 주체이며, 선택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의사 결정자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확고히 고수한다.
- 라이프니츠는 다시 한 번 스피노자와 직접 접촉해봐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치른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스피노자에게 가는 편지에 질문을 던진다. 첫째는, “연장을 절대적인 의미로 생각했을 때 그것으로부터 모양과 운동을 연역해 내는 것이 가능한지 논평해 달라는 요청이었고 둘째로 편지는 스피노자에게 무한의 문제를 다룬 그의 예전 편지에서 다소 불분명하게 처리된 부분을 명확하게 해명해줄 것을 요청한다.
- 라이프니츠는 운동에 관한 대화록을 작성했다. 대화록에서 라이프니츠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를 건드린다. “진정으로 정신적인 본성을 지닌 어떤 형이상학의 불가사의 들이 ‘운동’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사유 안에서 운동의 불가사의들은 개체의 독특한 형이상학적 지위, 마음의 비(非)물질성, 그리고 인격의 불멸성 이론 등에 관한 그의 생각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에게 구두로 전달하게 될 논증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 논증의 제목은 “가장 완벽한 존재는 존재한다.”이다. 이 표현에서 그가 의미한 것은 물론 신이다. 그는 더 나아가 신을 “모든 본질을 포함하는 존재, 혹은 모든 성질이나 모든 긍정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정의 한다. 지금 라이프니츠는 마치 스피노자에게 스피노자의 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 (354쪽의 인용문)에서 논리의 연쇄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명제들을 축약된 형태로 복제한 것이나 다름없다. 요컨대 라이프니츠의 논증은 모든 사물에는 그것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충족 이유율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천착에서 시작해서, 스피노자의 핵심적인 주장들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 이론을 플라톤에게 귀속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 357쪽의 인용문에서도 핵심이론들을 재 진술한 듯 보이는 내용이 전개된(형이상학은 정확한 정의와 증명들로 쓰여야 한다..........) 같은 내용은 한마디로 라이프니츠는 그 순간만큼은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것이다.
- 1676년 라이프니츠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스피노자)에게 동의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에게 동의하지 않기 위해서도 거기에 왔던 것이다. 그 지역 자유사상가의 색조에 맞게 스스로를 채색하고(카멜레온처럼), 그런 다음에는 통상적인 의견들과 너무 심하게 충돌할 수 있는 어떤 생각도 표현하지 않기로 스스로에게 상기시킨 후, 서른 살 먹은 미분법의 고안자이자, 마인츠의 전직 추밀고문관이자, 하노버의 공작의 신임 사서로 임명된 라이프니츠는 마침내 뭍에 올랐다.
11장 ‘신 들린’ 자들의 논쟁(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논쟁)
신을 닮은 사람과 신에 미친 사람
- 파빌륜스흐라흐트에 있는 그 집(스피노자가 세 들어 있는) 거실에서 두 사람은 작은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17세기 가장 위대한 두 철학자의 만남은 실제로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최소한 3일을 머물렀으며 어쩌면 일주일이나 되는 오랜 시간 일수도)
-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열정에서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지만, 그러고자 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라이프니츠가 옹호하던 바로 그 ‘마음’이라는 생각을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 운동의 문리학(?)은 어쨌든 두 사람이 토론한 일련의 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나중에 갈루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다양한 ‘형이상학의 증명들’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한다.
- 헤이그에서 이뤄진 만남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로는 오로지 단편 하나만이 남아서 전해질 뿐이다. 1890년에 처음 출간된 문제의 그 증거는 ‘가장 완벽한 존재가 존재한다’라는 제목으로 라이프니츠가 쓴 한 장짜리 문건이다.
- 그 문건은 라이프니츠가 그때의 만남에 있어 며칠 동안 준비한 논증을 압축적인 형태로 담고 있다. 이를테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가 가능하거나 혹은 생각될 수 있고, 그로부터 그런 존재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논증이었다.
- 신에 관한 토의는 두 철학자의 만남에서 완벽하게 절정을 이루었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머릿속이 신으로 꽉 찬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둘의 마음속에 동일한 신이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와의 대면에서 마주친 핵심적인 의문은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이 진정한 신인지 여부였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인격화된 속성들을 모두 걷어내고 단지 지금 여기에 거하는 신이 도대체 신으로 불릴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 헤이그를 떠나고 10년 후에 라이프니츠의 철학 체계에서, 그는 우주와, 그 안에서 자기 만족감으로 타오르는 자신이 이유로 존재하며, 그 안에서 그가 이른바 ‘모나드’(영혼)라고 부른 형태를 띤 개개인은 화려한 고립 속에서 번성한다.
- 라이프니츠의 주석에 따르면 처음에 스피노자는 그의 논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차별성의 칼날을 세워 가면서 자신의 증명을 종이에 휘갈겼다. 그러고 나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단어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듣고 있는 사람의 무조건적인 승인을 요청했다.
- 결과적으로 모든 일은 신과 인간에게 좋은 방향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아니, 그렇게 되었다고 라이프니츠가 의기양양하게 전했다. 그의 증명이 “논리적으로 옳다.”고 판단했다. 라이프니츠의 이 주석은 우리가 이 문제에 관해 알고 있는 최종적인 결어(결론)에 해당한다.
그러나 정말로 스피노자가 승인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