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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가는 길 - 안유환
차량이 심한 정체현상을 빚는 시가지를 겨우 벗어난 택시가 낙동강대교에 접어들었다. 이대로 가면 김해공항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제주행 비행기를 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출발할 때 서둘렀던 마음을 진정시키며 습관처럼 콧등으로 흘러내린 안경 브릿지를 검지로 밀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두 손을 올려 양쪽 관자놀이 위의 안경다리를 만져보았다. 없었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보았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민얼굴이다. ‘돌아가야 하나? 그대로 가야하나?’ 머릿속 계기판의 바늘이 재빠르게 요동쳤다.
“여보, 내가 안경을 안 끼고 왔네−.”
어떻게 할까? 아내의 의향을 물었다.
“뭐요? −그대로 갑시다.”
안경 끼는 사람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아내는 비행기 타는 시간에 늦지 않는 것만 생각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평소 산책을 하거나 집에 있어도 책을 보지 않을 때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고도 잘 지내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안경 없이 지낸다는 것은 내게 큰 불편을 더할 것이었다. 당일치기가 아니고 집을 떠나 하룻밤을 지내는 여행은 언제나 챙겨야할 것이 너무 많다. 하루 전부터 속옷과 양말, 면도기를 비롯한 세면도구, 배터리 충전기, 매일 복용하는 비타민류의 약과 물을 갈아먹을 때를 대비한 정로환, 근육피로를 풀어주는 안티푸라민과 1회용 밴드, 그리고 한방 파스 등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여행가방에 넣었다. 선글라스와 여분의 안경집도 챙겼다. 안경을 바꿔 끼거나 끼지 않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몇 번이나 아내에게 “잊은 것 없는지 잘 확인해봐!” 라고 말하고 있을 때 가까스로 연결이 되었던 콜택시가 지하1층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혼자 외출할 때 비교적 택시를 자주 이용하는 아내가 스마트폰으로 연결을 했으나 회사 측에서는 세 차례나 ‘주변에 차가 없다’는 답을 해왔다. 다른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두 차례나 시도한 끝에 택시를 타게 된 것이다. 도로위에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서행을 하고 있었다. 안경을 가지러 차를 돌려 집으로 간다면 비행기 출발시간에 늦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안경을 끼지 않고 한 주간 지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경을 포기하느냐, 여행을 취소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경잡이가 ‘눈’없이 한 주간을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안경을 오래 끼지 않으면 난시인 눈이 충혈 되고 뒷골이 아프기 때문이다.
“돌아갑시다!”
내 맘 속에는 이미 늦으면 여행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안경을 안 가져왔다고 오래도록 계획한 여행을 취소하려는 생각을 하니 그것도 안 될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다른 때는 몰라도 이번 여행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12월의 결혼기념으로 연례행사처럼 올레길을 걷기위해 제주도 여행을 한다. 올레길은 서두를 필요도 없고 걷다가 한가롭게 앉아 쉬어도 좋았다. 걷기 길은 현대인들의 빠른 삶의 속도를 적절히 조절해주는 양약이었다. 어떤 해는 가지 못할 때도 있지만 이번에는 50년 만에 옛 친구 성수를 만나보기 위한 약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성수는 나의 소꿉친구이다. 북쪽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시골 마을 한가운데 그의 집은 우리 집과 담을 같이하고 있었다. 내가 성수를 좋아하는 것은 어떤 친구보다 마음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가 별나게 굴 때도 있었지만 그는 무엇이나 너그럽게 양보를 해주었다. 그러다보니 나도 차츰 양보를 배우게 되었고, 우리는 마음을 쉽게 맞출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참으로 좋아하며 잘 따랐다. 내가 가자하면 가고, 놀자하면 함께 놀아주었다. 그는 무엇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계획을 제시하기보다는 내 의견을 따라주는 편이었다. 양쪽 부모들도 우리 둘처럼 가깝게 지냈고 맛있는 것을 만들면 서로 아이들을 불러다 먹여주었다. 뒷산에 소를 먹이러 갈 때나 냇가에 멱을 감으러 갈 때도 성수는 나와 동행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은 멀리 외지로 나가야 했고, 진학할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도 친척들이 경영하는 점포의 점원이나 다른 일자리를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성수와 나도 그렇게 헤어졌다.
어디에 사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태어나서부터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몇몇을 제외하고는−. 내가 성수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초등학교 동창회에서였다. 객지에서 생활한지가 오래된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동창회는 고향에 남아있는 친구들의 몫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지난해 봄 외삼촌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오랜만에 고향친구를 만나고 가을에는 모교에서 갖는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할 기회를 가졌다. 그때 고향친구 생각만 하면 늘 떠오르는 성수의 소식을 물었다. 그는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창회 주소록에서 얻은 전화번호로 통화를 했다. 몇 년 전 공직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지금은 개인택시를 운전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여행일정을 잡고 나서 며칠 전 나는 그가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성수야, 25일 저녁 8시 제주도에 도착한다. 만날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만날 수 있겠느냐가 무슨 말이냐? 모든 것 제쳐놓고 만나야지!”라고 흔쾌히 대답을 했다. 친구에 대한 그의 의리는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했다. 내가 그를 보고 싶은 만큼 그도 나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안경 때문에 이번 여행을 포기한다면 모처럼 만나는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의리 없는 사나이로 비칠 것 같았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 안경을 갖고 나와 어떤 일이 있어도 비행기 시간은 맞추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니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그나마 차가 밀려 서행한 것이 나의 생각을 가다듬는 여유를 주었다. 만약 낙동강 대교를 지나서 안경을 끼지 않고 왔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실제로 안경과 여행,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택시 기사는 ‘돌아가자’는 내말에 “네!”라고 짧게 대답하고 낙동강대교 입구에서 화명동 쪽으로 빠지는 길로 운전대를 꺾었다. 그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북부산 톨게이트 가기 전 대저 인터체인지를 돌아 집으로 간다고 할지라도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행기 탑승 시간이 될 만큼 시내로 들어오는 차들은 주차장처럼 늘어서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집을 떠났던 사람들이 내일 월요일 출근을 위해 한꺼번에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산성고개로 넘어갑시다. 그 아래 식물원 앞이 우리 집이니까요.”
나도 길이 막힐 때는 한 번씩 이용하지만 고갯길은 중앙선도 없는 좁고 위험한 길이다.
“알겠습니다.”
택시기사는 꼬불꼬불 곡예운전을 하고 있다. 앞서가는 승용차들은 택시기사만큼 속력을 내지 못하면서도 길을 양보하지 않았다.
“늦어도 도리 없습니다. 안전하게 갑시다. ‘5분 먼저가려다 50년 앞서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기사가 쫓기는 듯한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나는 여유 있게(?) 웃었다. 비행기 시간에 늦어져도 기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한가롭게 드라이브하기에 알맞은 산길을 차는 경주하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1년에 한차례씩 갖는 의미 있는 제주여행이지만 아내도 ‘늦으면 늦으리라’ 느긋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간혹 서둘러서 될 일도 있기는 하지만 정체현상의 차량을 비집고 오토바이처럼 빠져나가거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날아서 길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난시의 눈은 참으로 예민하면서도 이상한 존재이다. 보통 때 책을 오래 보려면 나는 안경을 껴야한다. 그러나 아침 식사를 할 때는 안경을 끼지 않고도 신문의 작은 글씨를 다 볼 수 있다. 그런데 TV를 보면 눈 뿌리가 아프다가 머리가 아프고 곧 피로해진다. 멀리 경치를 바라볼 때는 안경이 없어도 되지만 뭔가 자세히 보려면 안경을 착용하는 것이 편하다.
첫 직장인 출판사 교정원으로 일할 때였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눈이 충혈 되고 머리가 아팠다. 처음에는 그것이 잦은 음주 때문이라 여겼다. 일이 끝나면 동료들과 함께 남포동 술집 골목으로 출근을 하고, 주거니 받거니 술이 취할 때까지 마시고 귀가했다. 처음에는 술을 좋아하는 부장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고, 나중에는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남포동 나들이는 거의 매일 퇴근길 행사처럼 계속되었다. 눈이 심하게 충혈 되고 머리가 아픈 것이 술 때문이란 생각이 들어 한 번씩 핑계를 대고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동안 술을 안 마셔도 눈과 머리가 아픈 증상은 개운해지지 않았다. 교정을 보는 사람의 소중한 도구는 눈과 머리이다. ‘안광이 지배를 철하듯’ 교정지를 들여다보고 오탈자를 집어내고, 비문과 꼬인 문장을 바로잡아야 한다. 눈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미련하게 몇 년을 더 견디다 마침내 안과병원을 찾았다. 눈 때문에 안과를 찾기까지는 적어도 3~4년이 걸렸다. 그처럼 병원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어떤 동료는 술 때문에 몸에 이상을 느끼면서도 병원에 가면 숨어있던 병이 튀어나올 것처럼 겁이 나서(?) 건강진료마저 기피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모르면 약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안과 진단결과는 난시였다. 의사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난시는 학생시절에 누워서 장시간 책을 읽거나 등교시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땜질공부를 하는 것으로 인해 생긴 결과였다. 요즘도 손주들이 누워서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볼 때는 “그러면 눈알이 비틀어져서 할아버지처럼 난시가 된다”고 말하며 예방법을 일러준다. 비스듬히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볼 때도 자세를 바로잡아준다. 나이 들면서 얻은 교훈은 병원이나 의사의 말을 경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난시가 이상한 것은 시력은 괜찮은데 상(물체)이 일그러져 보이고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온 몸에 피로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의사의 처방을 받아 안경을 쓰고 나자 눈이 충혈 되고, 뒷골이 당기며 머리가 아프던 증상은 깨끗이 나았다. 기분이 상쾌했다. 흰자가 맑아졌다. 눈은 행복이 들어오는 관문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안경을 끼고 나서 얻은 선물이다. 안경을 착용하기 몇 년 전까지는 ‘행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내가 가까이 가면 갈수록 행복은 내가 다가간 만큼 뒷걸음질을 하는 것 같았다. 안정된 직장을 얻은 젊은이에게 다가온 첫 번째 문제는 결혼이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직장을 갖고 번뜻한 인물을 갖추면 좋은 신부 감을 얻는 것은 전혀 염려할 것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구입하는 것과 마음에 드는 반려자를 택하는 것은 엄청나게 달랐다. 한 두 차례 선을 보기 시작하여 열 번도 넘게 마주 앉았지만 마땅한 신붓감을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낙점을 하면 언제든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더 좋은 사람을 찾으려 퇴자를 놓았다. 그런데 내가 ‘됐다’하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음에도 결혼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상대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자리로 옮아앉았다. 선을 보고 마음에 들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돌아와 기다리면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일찍이 연애를 하지 못한 것도 한 가지 원인이지만 상대방이 목매어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것이 나의 큰 잘못이었다. 선을 보고 딱지를 맞았다는 생각이 들기 까지는 몇 년의 세월이 더 지난 뒤였다. 이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상대방을 살피는 것에 주력했지만 잦은 딱지를 받아들고 나서는 차츰 자기를 뜯어보게 되었다. 5년여 동안 수없이 선을 보았지만 상대방에게 비치는 나의 눈과 얼굴 색깔이 좋을 리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사랑을 말한다’는 말처럼 눈은 마음의 창이다. 아버지의 돈을 훔친 아이들이나 범죄한 사람들은 눈의 안정을 보여줄 수 없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도 다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은 자꾸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안정된 사랑의 눈은 다르다. 호수같이 맑은 눈, 꿈을 가득 담은 눈, 원대한 계획을 갖고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하는 눈,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눈, 벚꽃이 만개한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의 눈은 영롱한 별처럼 반짝인다. 이처럼 눈은 저마다 아름다운 채색을 갖고 있다. 12색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색깔, 24색에서나 어느 정도 배합해낼 수 있는 아름답고 그윽한 색깔의 눈이다. 모처럼 황사가 걷히고 수 십리 밖까지 내다볼 수 있는 청명한 날씨와 같다. ‘지구의 푸른 눈’이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의 색깔에 비길까? 바이칼호수는 수심 40미터까지도 내려다보일 만큼 투명하다고 한다.
안경을 끼고 나서부터 나는 훤한 인물에 바이칼 호수 같은 눈을 더하게 되었다. 원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처녀 때 ‘미스 춘향’으로 이름을 날렸고, 아버지도 총각 때는 처녀들이 한 트럭을 타고도 남아 종종걸음으로 아버지 뒤를 따라다녔다고 자랑을 늘어놓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많은 아가씨들이 따른 것은 마스크도 좋지만 무엇보다 그윽한 눈 때문이었다. 어떤 여인이든지 아버지의 서글서글한 눈을 한번이라도 조용히 들여다 본 사람은 바이칼호수 같은 그 눈 속으로 빨려들기 마련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많은 아가씨들 가운데 가장 돋보였던 ‘미스 춘향’을 골라잡았으니, 요즘 같으면 두 분의 인물은 인기 연예인을 뺨칠 정도였다. 이런 미남 미녀의 몸에서 태어난 나였기에 인물이라면 나를 따를 친구들이 없었다. 나는 좀 철이 들 무렵 소꿉친구 성수가 나를 그렇게 따르던 것이 혹 내 인물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내가 대학시절에는 아버지만큼은 못했지만 수많은 여자들이 나를 따랐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는 언제든지 최고의 여인을 골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미래를 위한 동반자를 선택하는 것도 급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것은 나의 무지이며 교만이었다. 언제나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깨닫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후회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호시절은 벚꽃처럼 잠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몇 년을 지나고나니 사정은 급변했다. 내게 알맞은 연륜의 아가씨들은 대부분 시집을 가버렸다. 저들은 철이 들면서 무턱대고 외모에만 이끌려 남자를 따르던 일은 구름을 잡는 것처럼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인 적령기는 왜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29세, 30세가 되기 전에 결혼을 하려고 서두르며 안간힘을 다했지만 대학시절에 나를 따르던 그 많은 아가씨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고, 선을 볼 때마다 퇴자를 맞기 일 수였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내가 인물이 좋다는 것만 생각했고 다른 조건은 안중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유는 눈 때문이었다. 한창 심할 때는 범죄자의 눈, 살인자의 눈처럼 시뻘겋게 핏발이 서고,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마다 거부감을 느낄 정도였다. 친구들은 내가 안경을 끼고 눈이 맑아진 뒤에야 그것을 말해주었다. 마음의 창인 눈이 그렇다보니 부푼 꿈을 안고 인생의 미래를 맡길 신랑감을 찾는 아가씨들, 제법 학벌도 직장도 가진 아가씨들은 나처럼 눈이 시뻘건 사람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서른 살을 넘기고 서른한 살, 서른두 살이 되었다. 나 스스로도 범죄인이나 정신장애인 같은 불안정한 눈으로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며 신붓감을 고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의사의 처방을 받아 안경을 맞춰 끼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내가 거울속의 내 눈을 들여다보아도 매력적이었다. 누구도 바이칼호수 같이 맑고 그윽한 내 눈빛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 눈이 하나님이 지으신 원시상태를 회복하고 자신감마저 생기니 평안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의 인품까지 가늠해보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선택되기만을 바라던 자리에서 선택하는 자리로 다시 위치가 바뀌었다. 건강한 눈을 되찾기까지 어려움을 겪는 동안 지극히 겸손해진 내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축복이었다. 눈이 맑은 청년으로(노총각이었지만)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화만하면 어떤 아가씨라도 그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인물이 받쳐주고 어느 정도 철도 들게 되었으니 일은 무리 없이 풀려나갔다.
그렇게 골라잡아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다. 아내는 바이칼호수처럼 시원한 내 눈에 이끌렸지만 마음속으로 내가 안경을 쓴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안경을 쓰게 되었어요?”
제주도 신혼여행을 갔을 때 비로소 아내가 물었다.
“안경이 좋지 않나요? 안경이 얼마나 지성미를 더하고 사람을 이지적으로 돋보이게 하잖아요.”
나는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눈이 나빠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말하지 않고 안경 낀 사람에게 나타나는 장점들을 늘어놓았다. 대학교수를 비롯해 유명작가나 저명한 학자들은 대부분 안경을 쓴 사람이 많다는 것을 들어 은근히 자기를 내세우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사람들이 어디 지적으로, 이지적으로 보이기 위해 안경을 쓰나요?”
아내는 안경을 쓰는 사람은 결국 눈이 나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나는 시력이 나쁘지는 않아요! 이렇게 안경을 벗고도 책도 읽고 신문도 볼 수 있는데−. 어두운 곳이나 흔들리는 차안에서 책을 보는 버릇 때문에 난시가 생겼어요.”
“하기야 시력이 나쁘지 않아도 멋으로 안경을 쓰는 사람도 있지요.”
“그래요. 시력을 교정하는 목적 말고도 안경은 안구를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햇빛이 강할 때나 먼지가 많을 때도 선글라스를 착용합니다.”
“요즘은 알 없는 안경을 쓰는 사람도 있던데요.”
아내는 친구의 남편도 알 없는 안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나들이 하다 팬시샵에 들렸다. 기발하고 독특한 디자인 제품들을 판매하는 데서 남편이 재미삼아 안경도 써보고 선글라스도 껴 보다가 그중에서 해리포터 안경처럼 태가 동그랗고 귀여운 안경을 써보았다. 남편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멋이 있어보였다. 그의 아내도 동감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안경을 걸치자 얼굴이 완성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때부터 알 없는 안경을 즐겨 착용한다는 것이었다. 알이 없으니 가볍고, 추울 때 서리가 끼지 않고, 비가 올 때도 전혀 지장이 없는 안경의 장점만을 취한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시력이 완벽했기에 알은 필요가 없었다.
“당신도 눈을 보호하는 유리를 끼운 안경을 쓰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안경의 이점을 들어 아내에게 은근히 권했다. 그것은 안경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이었다.
“안경으로 멋을 낼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불편한 점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아내는 자기 얼굴을 객관적으로 바로보고 있었다. 사실 알맞게 잘생긴 고운 얼굴에 안경을 낀다면 아내의 미모는 손해를 볼 것이었다. 얼굴이 길거나 펑퍼짐한 형을 적당히 커버하기 위해 안경을 쓰는 사람들은 그만큼 불편도 감수해야 한다. 여름철에 땀이 날 때는 안경이 코끝으로 자꾸 미끄러져 내려온다. 매일 아침 바쁜 출근시간에도 잊지 않고 정성들여 안경알을 잘 닦아야 하루를 기분 좋게 지낼 수 있다. 최종교정 과정에서 한 두 개의 오탈자를 가려내며 완벽을 기해야 하듯 손자국을 없애기 위해 몇 번이고 안경을 밝은 빛에 비춰본다. 어떤 때는 알을 깨끗이 닦으려면 더욱 얼룩이 지거나 수건 자욱이 생겨 시간이 지체될 때도 있었다.
이런 저런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이제는 나의 안경이 몸의 일부분이 되었다. 어떤 때는 안경을 꼈는지 안 꼈는지 느끼지 못하고 지낼 때도 있다. 무엇보다 나이 들어도 그윽한 바이칼호수 같은 눈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순간순간의 삶을 승리로 이끌어갔다. 오늘까지 안경과 함께 살아오다보니 나는 이름 있는 출판사의 대표도 되었다. 그것은 눈이 맑아지고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게 되었고, 이지적인 판단으로 모든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출판사들이 불황에 시달릴 때도 나는 꾸준히 베스트셀러를 낼 수 있었다. 흔히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해 출판한 책을 며칠 만에 몽땅 사들이거나 과장된 광고를 남발하며 수억 또는 수십억을 드리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맹세코 나는 한 번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이지적인 판단으로 진실과 맞부딪혔다. 무엇보다도 원고를 받아 읽고 편집위원회에서 출판여부를 결정을 할 때 꼼꼼하게 신중을 기했다. 나는 출판되는 책이 지적미각을 자극하여 일시적으로 반짝하다 사라지는 것 보다는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책을 기획했다. 그것은 그만큼 오래 동안 회사가 튼튼한 기반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몇 권의 스테디셀러만 있으면 출판사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벌써 결혼 40주년을 맞았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고백했다. 아버지는 생전에 그보다 더 “세월이 총알 같다”고 말씀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세월의 된바람에 실려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해거름 어느 산자락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아, 내가 날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나이 들면 가진 것은 돈과 시간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어디든지 여행이 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무리 돈과 시간이 있어도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면 장기간의 여행은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틈틈이 회갑이 되기까지 세계 곳곳을 누볐다. 그것은 출판에 좋은 아이디어를 개발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북구를 비롯한 유럽 대륙과 북미지역은 일찌감치 돌아보았다. 남미의 아마존을 비롯한 이과수 폭포, 눈 덮인 러시아 대륙횡단, 아프리카의 남아공 관광명소들 까지, 너무 멀고 힘들어 사람들이 포기하는 곳을 더 늙기 전에 꼽아가며 여행을 했다.
여행을 다녀보면 볼수록 우리나라만큼 좋은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미 신혼여행 때부터 내 이지적인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내 신혼여행지로 일찍이 서구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유럽 쪽을 권했지만 나는 그것을 사양하고 제주도를 찾았다. 당시 호텔은 제주시와 서귀포에 각각 한 개씩 있었다. 서귀포 호텔은 밤새 천정에서 쥐들이 운동회를 펼쳤다. 시설은 초라했지만 분명히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될 것을 나는 믿었다. 내 이지적인 판단이 헛되지 않아 지금은 제주도가 세계 1위 수준의 관광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40년 전 내가 생각하고 판단을 내렸던 것은 놀라운 통찰이었다고 감탄하게 된다. 제주도는 사계절 어느 때 가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결혼40주년 기념으로 해외의 특별한 곳을 찾으려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신혼여행 때 갔던 제주도가 역시 좋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리고 올레길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시작해서 한동안 걷기를 중단한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남은 코스들을 마저 걸어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 11월 말이었다. 성탄절이 지나고 월요일부터 한 주간 일정을 잡고 12월 들자마자 비행기 표를 예매하려고 하니 원하는 날짜에 표를 구할 수 없었다. KAL도 아시아나도 만석이고, 저가 항공에 겨우 5석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날 저녁7시 출발이었다. 그만큼 제주도는 연말연시 인기여행 지역이 되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인터넷 예매를 했다. 잠시 뒤에 ‘출발당일 30분 전까지 김해공항에 도착해야 한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시간이 참 어중간 했다.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면 밀리는 차 때문에 비행기 시간을 놓칠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여 여유 있게 저녁식사도 할 수 있도록 넉넉한 시간을 잡아 집에서 오후5시에 출발을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성탄절 교회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찬양대 회식도 불참하고 우리는 일찍이 집으로 돌아왔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크리스마스도 여유 있게 지낼 수 없었다.
우리는 한 주간 동안 제주도에서 지내는데 필요한 준비물을 최종 점검했다. 아내도 나도 그렇게 총기가 좋았는데 요즘은 금방 손에 쥐었던 것을 어디에다 놓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아내는 외출할 때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가 꼭 한 번씩 다시 들어와 놓고 간 것을 챙겨간다. 이제는 그것이 습관처럼 되어서 전혀 이상하지도 않다. 그래서 함께 외출할 때는 “잊은 것 없나?” 서로 확인을 한다. 몇 차례 시도 끝에 콜택시가 아파트 지하1층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시 한 번 집안을 돌아보고 현관에서 가스·전기 차단 스위치를 내렸다. 모든 것을 꼼꼼히 점검하고 기분 좋게 출발을 했다.
그러나 콧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좋았던 기분은 산산이 깨트려지고 말았다. 한 주간 동안을 지내는데 안경을 포기하고 그냥 갈 수도 없고, 결혼40주년 기념에다 50년 만에 만나는 소꿉친구와의 약속도 있어 여행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만덕터널을 피해 선성 고갯길로 돌아가는 차들도 나름대로 모두 바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탄 차가 바로 앞차의 꽁무니를 물다 시피 가까이 좇아가도 길을 비켜주는 차는 없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지던 나도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꾸불꾸불 고갯길을 오르는 차의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 비상등을 켜지요!”
다른 사람의 체면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어서 순간적으로 내가 제안했다. 택시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깜박이 등을 작동했다. 사이렌을 울리지는 않지만 우리 차는 마치 응급환자를 수송하는 차 같았다. 그제서야 앞서 가던 승용차가 오른쪽으로 붙으면서 길을 내어주었다. 그 뒤에도 몇 대의 차가 서행을 하거나 길옆으로 차를 멈추어주었다. 다행히 기사가 이 길을 자주 이용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안정된 운전을 할 수 있었다. 불안하던 마음이 약간 평정을 회복했다. 택시는 1시간 전에 우리를 태우러왔던 아파트 지하1층 자리로 되돌아왔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로 내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경은 책상 옆 협탁 위에 선글라스와 함께 나란히 놓여있었다. 이 자리는 내가 평소에 안경과 차 열쇠를 놓은 자리이다. 잘 닦아놓은 안경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설 때 끼고 나가려고 생각을 했는데 깜박 잊은 것이다. 거실에서 등산가방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집안을 점검하면서 가장 중요한 ‘눈’은 놓고 나간 것이다. 다행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21층까지 올라가서 안경을 챙겨 다시 대기하는 택시로 돌아오기 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택시는 공항을 향해 재출발을 했다. 다행히 시내로 들어오는 차선은 주차장을 방불케 했지만 나가는 길은 그렇게 막히지 않았다.
만덕터널을 통과하고 다시 낙동강대교를 지나 대저 인터체인지를 돌았을 때 차들이 서행을 하고 있었다. 강변도로에 접어들자 차량은 물결을 이루고 그 속도는 낙동강 물처럼 한가롭게 흐르고 있었다. 안내문자대로라면 30분전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되지만 출발시간은 벌써 25분밖에 남지 않았다. 차가 막히지 않으면 충분히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이지만 기사도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다. 길을 가득 메운 차들은 대부분 공항으로 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서행을 하면서도 조급한 마음 때문인지 이따금 클랙슨을 누르고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차선을 바꾸어 차머리를 끼워 넣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더디 가지만 정해진 비행기 시간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가는지! 잠시 동안에 또 5분이 지났다. 15분전까지, 아니 10분전 까지만 도착해도 비행기는 탈 수 있을 것이었다. 당황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져도 비행기를 놓칠세라 불안이 엄습했다. 주차장처럼 차들이 꽉 들어찼기에 이럴 때는 오토바이를 불러 타도 빠져나가기 힘든 상황이다.
조금씩 밀려가던 차량의 물결이 이제는 아예 제자리에 멈추어버렸다. 사람들은 승용차에서 내려 정체원인이 무엇인지 앞쪽을 보려고 기웃거렸다. 답답하고 초조해서 차 안에서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에서 내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상황을 살펴보았다. 추돌이나 접촉사고일 것으로 지레 짐작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승용차 한 대가 비스듬히 다른 차를 가로막아 서있고, 스포츠 머리형에 반팔 T셔츠를 입은 사람이 다른 차의 운전자에게 삿대질 하며 시비를 걸고 있었다. 까닭을 알 수 없어 무엇 때문이냐고 옆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SUV를 뒤따라가던 BMW 승용차가 잇달아 클랙슨을 눌렀다. 앞차의 운전자가 그 소리에 놀랐다면서 망치를 들고 나와 BMW의 본네트를 내려치면서 시비가 붙었다는 것이었다.
112에 신고를 했지만 경찰차도 뒤쪽 멀리에서 사이렌을 울리며 경광등을 쏘고 있지만 사고 현장에 접근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갓길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경찰관 두 사람이 차 사이로 걸어서 현장에 접근하고 있었다. 비행기 출발시간은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정체현상이 없다면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이제야 겨우 차가 한 대씩 빠져나갈 뿐, 사고차량 뒤쪽에 밀려 선 차들은 요지부동으로 길이 트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둑어둑한 공항하늘에는 비행기가 날갯불 번쩍이며 잇달아 이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