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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겪은 온갖 고생 이야기를 올린 바가 있다.
할머니 따라 진외가 있는 일본으로 가셔서 고등학교 다니시다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 되어 현해탄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오신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내셨기에 할머니를 끔찍이도 보살피셨다. 625전쟁 중에 당신의 어머님과 피난길에 막, 해산한 아내를 집에 두고 군대 가실 때는 막막하셨을 게다.
며칠 전 막내 이모와 점심 먹으며 옛날이야기를 한참이나 했다.
하긴 이모도 해방둥이라 우리 집 고생할 때 기억이 있을 리 없지만 외삼촌과 외할머니 편에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듣다가 보니 불효막심했던 내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외삼촌이 군대에 간다고 누나 집에 들르셨다.
내 할머니와 누나, 내 엄마가 젖먹이(바로 나다)를 안고 있는 방은 불기가 하나도 없는 냉골이었다. 냉골이란 옛날 온돌방은 아궁이에 장작을 때면 뜨거운 불기가 방바닥 밑에 있는 넙적한 구들장 밑에 연기가 지나가도록 만든 골을 타고 뜨거운 불기가 굴뚝까지 지나가며 방을 덥히는 것이다. 냉골이란 불을 때지 않았으니 구들장은 냉랭할 수밖에. 밖에 나가서 장작 한 지게를(시골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서 읍네 장터에 팔러나온 걸) 들여놓고 돌아오는 길에 많이도 울었다고 했다. 돌을 갓 지난 아기가 며칠 굶은 터인데도 얌전히 할머니 품에 안겨 있더란다. 내가 이렇게 음전했다. 그래서 바닥에 뉘여 놓으면 도무지 울지도 뒤척이지 않아서 머리 뒤쪽이 넙적했다. 두상이 영 아니올시다. 요즈음은 서양식으로 얼굴 앞 면적 보다 이마에서 뒷 꼭지까지 길지 않은가?
성격이 너무 얌전하면 이런 불상사가 난다.
외삼촌도 쌀 한 됫박 사줄 돈이 없어 그냥 가신 거지.
곡기(쌀이나 보리쌀 밥)가 끊어진 우리 집에 할머니가 며느리한테 친정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외가까지 40리 길. 어머니가 날 들쳐 업고 걸어서 가셨다. 갑갑하셨겠지. 며칠 굶은 터에 아기 하나 업고서 그 긴 길을 걸어간 어머니의 심정도 답답하셨을 것이다. 자식, 그것도 돐겨우 지날까 말까한 아기가 젖은 커녕 밥 한 숫갈 먹이지 못했으니 할머니와 어머니 가슴은 찢어지게 아프셨을 거다. 할머니께서 굶더라도 며느리하고 젖먹이 손자는 밥이라도 얻어 먹을 수 있으려나. 우리 외가, 어머니야 친정에 밥 한 술이라도 얻어먹어볼까 가는 심정이야 오죽했을꼬.
친정조차 일본에서 이웃하고 사셨더랬다. 그게 인연이 되어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하게 된 셈이다. 같은 때 같은 배를 타고 나와서 고향에서 농사 지어 밥 먹기 빠듯했을텐데. 어머니도 친정에 눌러 앉아 있을까. 시어머니는 대책 없이 냉골 안방에서 굶은 채로 누워 계실 텐데. 쌀독을 탈탈 털어 쌀 한 됫박에 보리쌀이건 뭔가 잡곡을 끌어 모아 시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 심정도 기막혔을 거다.
이모편에 들은 이야기는 끔찍했다. 우리 이웃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어느날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와서 죽어 있었다. 쥐약을 먹고 죽은 거지뭐. 평소 같은면 개 주인이야 자기 집에 없으면 조금 찾아보다가 말 일인데 몇 번이고 집집마다 찾으러 다니더래. 할머니는 그 개를 숨겨두었다고 했다. 다음 날 어머니한테 그 개를 가지고 친정에 가서 고아 먹다가 오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이웃 볼까봐 보자기를 덮고 해서 머리에 이고 먼 길을 걸어가셨다. 개 한 마리도 꽤 무게가 나갔을 건데. 아기를 등에 업고서 먼길을 떠나는 발걸음도 무척 힘들었을 텐데. 외가에 가서 개 내장을 들어내고 푹 고아서 외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까지 조금 자시긴 했지만 어머니 편에 다시 커다란 남비에 담아 이고서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아마도 개 고은 국물을 먹었던 탓으로 나는 무탈하게 잘 자랐다고.
이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개주인집을 속인 거다.
쥐약 먹고 죽은 개를 땅에 끌어묻는 게 귀찮아서 알뜰하게 찾을 일도 없는데 때가 때인지라 죽은 개를 찾아서 자기도 걸쭉한 개보신탕을 자시고 싶어 빠득빠득 찾아다녔을 텐데. 그땐 그랬다. 다들 끼니 잇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다들 가난했다. 전쟁이 가져온 고통은 무섭고 질겼다. 이맘 때즈음, 3 4월을 춘궁기라 불렀다. 지난 가을에 추수한 쌀이 떨어질 때가 바로 봄이었거든. 아직 보리 이삭이 여물지 못해 먹을 양식이 없으니 산에 가서 소나무 껍질을 벗기느라 바쁘다. 학교 앞에 재재소 마당에는 커다란 나무 등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사람들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있다. 소나무 속 껍질은 부드러워 푹 삶아서 먹었다. 글쎄 들은 바에 그냥 생으로 먹었다고도 하니까 먹는 방법은 모르겠다. 하여튼 뱃속에 들어갈 때까지야 쉽게 넘어가지만 배속에서 소화될 때가 끔찍했다. 부들부들해서 넘어간 나무 껍질이 소화가 될 턱이 없지. 한동안 배가 빵빵하게 부르니 좋았지만. 어쩢건 들어간 게 나와야 할텐데. 똥구멍 좁은 틈으로 소화가 안 된 나무껍질이 나올려면 여간 힘을 써도 될까말까. 아니 똥구멍이 찢어지며 피가 흐르면서 껍질이 나오면 그것도 다행으로 여겼다. 왜 옛말에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다 라는 말 속에 이런 끔찍했던 아픈 시절이 있었다고. 우리 집은 다행히 서점을 하면서 이내 형편이 펴서 똥구멍 찢어질 슬픈 이야기는 면한 셈이다. 이것만 해도 아버지는 자식들한테 의무를 다하고도 남았다.
태극기 부대가 광화문에 집결하여 데모를 벌이는 장면 안에는 이런 끔찍한 역사가 되풀이될까봐 죽어라고 목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혹시나 삼팔선 위 공산당이 내려올까 봐.
총 들고 전쟁터로 나가신 아버진들 대책 없기는 매양 같았을 테다.
그래도 단대독자(외동 아들)인 아버지는 6 개월 만에 제대를 하고 집에 돌아오셨다. 아무리 전쟁 중에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유교의 절대 절명의 원칙으로 독자, 아들 하나만 있으면 6개월만 복무하는 규정 때문이었다. 제대하고 돌아온 집은 별수가 있었을까? 아버지도 그렇고 할머니와 어머니도 당시 힘들었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으셨다. 하긴 세상이 다들 세끼 밥 먹는 집이 드문 시절이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가난했다.
한 해 뒤에 결혼한 고모부가 책장사를 하신 것도 이때였다.
전쟁 중에도 책은 꾸준히 팔렸다. 아니 책을 서울 가서 떼(사서) 와서 사장둑(시장 건너가는 다리위)에서 보자기를 펼쳐 책을 놓고 팔면 금새 다 팔고 마는 기적이 일어났다. 물건이 없어 못 파는 당시, 전쟁 탓이지만 경기는 장사꾼들에겐 호경기였다. 우리 집도 기사회생한 셈이다. 고모부가 책을 도매금으로 사와서 고모와 아버지가 파는 방식으로 책장사는 호황이었고 우리 집도 세끼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곤 전쟁으로 황폐해진 시장 빈터를 물색해서 번듯한 서점을 차린 것이다. 서점은 읍네 중심가에 자리했지만 우리 집은 변두리 끄트머리라 아버지는 집에 며칠에 한 번씩 오셨다. 책 파느라 바쁘니 서점에서 자고 먹으며 장사를 하신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렇다. 우선 굶어도 자식들 학교에 보내는 건 양보가 없다. 그러니 책장사를 하신 거는 고모부의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점원도 많았다. 김장철엔 할머니와 어머니까지 서점에 가셔서 김장을 담그셨다. 배추를 두 접 반(250포기)이 넘도록 엄청난 김장을 담그신 것이다. 뭐 그때는 김치가 겨울을 나는 유일한 반찬이었으니. 김장을 끝내고 커다란 바케츠를 들고 오시던 어머니와 할머니를 기다리던 어둑어둑 밤길이 생각난다. 머리에 수건을 싸매고 오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는 무거워서 힘들었을 텐데 어깨는 흥이 나신 것처럼 걸음도 가뿐했다. 우리도 밥 먹고 산다고 자랑하고 싶으셨던 거 아닐까?
“오냐, 내 새끼 배고프지. 고래고기 김치 먹어보자”
어둠이 내려앉아 얼굴 표정이 보일까 싶은데도 내 눈에 환희에 찬 할머니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고래 고기로 김치를 담근 것이 얼마나 맛이 좋은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일 비싼 고래 고기로 담근 김치를 자랑하고 싶으셨던 거 아닐까?
장사가 최고라 했다.
우리 집같이 가난했던 집도 장사가 되면 금방 부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요즈음 친구들이 모이면 자식이 취직해서 직장 다니면 부러워한다. 하지만 장사한다고 뭘 벌려놓으면 고생길이 훤하다고 혀를 찬다. 사회가 안정되면 장사는 힘이 든다. 전쟁통엔 장사가 최고란 말이다. 삼성이고 럭키, 현대 등 많은 재벌들이 전쟁통에 돈 벌지 않았느냐 말이다.
우리 집도 아버지는 서점을 총괄해도 더 벌어볼 속셈으로 신시장에 지점을 냈다. 4학년 때 가게를 차리고 이사를 했다. 나도 읍네 중앙통으로 옮겨 살았다니까. 하지만 어머니와 할머니가 직원을 두고 장사를 했지만 재미를 보지 못해 5, 6년 하다가 정리 했다. 장사도 재능이 있어야 하지 함부로 할 건 아니더라고. 그런데 고모님은 본점에서 점원들을 데리고 하시는데 남다른 재주로 장사는 날개를 달았다. 우리 아버지는 경리라든가 직원들을 데리고 관리가 제격이셨는가? 사업 수완이 남다른 고모부와 관리통인 아버지의 장점을 살려 서점으로는 전국구가 될 정도로 날렸다.
뭔 이야기가 길어져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아버지 퇴근 시간은 저녁참에 집에 오셔서 저녁을 자시고 다시 서점으로 가신다. 집에 가만히 계셔보니 뭔 재미도 없으니(TV없던 시절) 다시 사무실에 가셔 일을 보시던지 친구분들과 다방으로 가신다. 옛날 그 시절 남자들은 다 그랬다. 집밖으로 나가 노시는 거다. 좋아하는 술친구와 술을 자시던지, 화투를 좋아하면 화투방에 모이든지. 우리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셔도 주량이 두어 잔이니 술집 가시는 거 보다 다방에 앉아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쪽이었지 싶다. 당시 화투와 노름은 사회문제까지 일으킬 정도였지만 친구분들과 친선게임 정도였던 것 같다. 바둑을 좋아하시거나 낚시는 하시줄 모르셨으니 화투와 다방 출입밖에. 취미가 없는 거다. 학교생활은 일본에서 지내다 오셨으니 고향이래도 아무도 없는 고립 무원한 형편.
그럭저럭 열두 시 가까워야 집에 돌아오셨다.
안방에는 할머니가 손녀들 넷 데리고 주무신다. 한창 주무시는데 불쑥 안방에 들어오셔서 문가에 자리한 할머니 요 밑에 손을 넣어 군불은 잘 들어 방은 따슨지 챙기시는 거다. 그리곤 짖궂게 할머니를 깨우셔 화투 한 판치자고 조르신다. 마지못해 할머니가 일어나 군대담요를 펼치고 화투를 친다. 그땐 민화투였다. 아직 육백이니 고스톱은 모를 때다. 담배 한 까치(개피) 거나 백 원짜리 동전 따먹기 인데 아버지는 스리슬쩍 속이는 거 잘 하신다. 눈치 빠른 할머니와 투닥투닥 싸우시다가 담배 한 개피 때문에 삐친 척하며 사랑으로 건너가시는 아버지 등에 대고 다시는 화투 치나보자. 해봤자 다음날이면 다시 화투 치는 모자분이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할머니야 매일 손주들 돌보는 거 외에 무슨 재미가 있으셨을까? 할머니와 화투 치시며 정다운 모자간의 사랑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담배 한 개피, 동전 하나 가지고 속여서 따먹으려는 우리 아버지를 누가 인색하다고 욕할까? 넉넉한 살림이 아니라 6남매 키우느라 돈에 쩔쩔 매는 아버지한테 용돈은 말씀하지 않아도 서점 쪽으로 가다가 보면 고모님이 번개 같이 쫓아 나오셔 할머니, 친정 엄마를 모시고 가게 안에 모시고 들어가 소소한 이야기 나누시다가 은근하게 용돈을 찔러 주시는 풍경을 보면 가슴이 따스해진다. 아버지와 고모님 두 분이 할머니 생각하시는 모습은 얼마나 따스한가?
어려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요즈음 부모들은 이해할까? 내 자식 행여 고생할까봐 오만 거 다 챙겨주지만 그 정성에 비해 효도를 받을 수 있던가? 한 끼 밥도 먹기 힘들던 시절, 스물에 생과부가 돼 자식 둘 손잡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니 대동아전쟁이요. 오니까 625전쟁이라 두 개의 전쟁을 혹독하게 치뤄내신 분이시다. 겨우 외동 아들 결혼시키니 6 25전쟁이라 배속에 든 손주와 며느리 손을 잡고 뒤뚱 거리며 피난길에 오르셨던 할머니와 고모님과 아버지한테는 끈질기고 따스한 정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친척 간에 일이 생기면 축의금이든 부조금이든 일일이 할머니께 여쭙던 아버지는 효자 중에 효자이셨다.
고모님도 그랬다.
남매간에 장사를 50여년 같이 하면서 의 상한 게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남매간이라도 매일 얼굴 맞대고 장사를 하면서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지 않았을까? 꼼꼼하신 아버지에 비해 서점 손님한테 털털하게 대하시던 고모님은 손이 척척 맞는 파트너셨다. 고모부님은 한창 때 큰 병을 앓으셔서 서점 경영엔 거의 손을 때셨다. 그래도 오너다운 풍모는 대단하셨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아버지가 할머니한테 대든 거 딱 한 번 있었다고 했다.
뭔가 언짢은 일 때문에 아버지가 한 거라곤 세수하던 세숫대야 물을 마당에 확 뿌린 거 말고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할머니 환갑잔치는 집 마당에서 차렸다. 문중에 친척들과 아버지 친구분들, 할머니 친구분들이 많이도 오셨다. 진외가 할아버지도 오셨다. 일본에서 이웃하고 살았던 남매간인데 가족들이 할머니한테 술잔 올릴 때 진외가 할아버지가 기생을 부르셨다. 창으로 소리까지 하는 쪽머리 찐 예쁜 기생이 자손들이 한잔씩 술을 올릴 때 지화자를 불렀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 나는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었다. 요즈음 환갑잔치 하는 집도 없을 테지만 손자가 대학졸업반은 어림도 없을 게다. 하긴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고모님 내외분과 부모님은 환갑기념으로 맏손자, 나를 장가보내는 의논까지 하셨다. 스물 두엇 되는 신랑이 어디 있을까? 내가 환갑일 때는 딸은 직장 다니고 아들은 대학원 과정이었으니 끔찍하다. 그때 날 장가보냈으면 오죽 좋았을까.
잔치에 오셨던 친척들은 하나같이 고생했던 뒤에 번듯하게 일가를 이룬 할머니를 복 노인이라고 부러워 하셨다. 먹을 쌀이 없어 돌도 지나지 못한 아기한테 밥을 굶겨서 끌어안고서 냉방에 우두커니 앉아 계시던 우리 가족사에 이런 행복이 찾아 올 줄이야. 초가삼간도 아버지께서 혼자 산에 가서 나무해서 지으신 거라고 했다. 땅인들 있어서 지었을까? 진외가 할아버지가 한 귀퉁이 떼어 주신 덕에 집을 지었으니 주위에서 도와주신 은덕을 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맏손자가 장가를 갔다.
신혼여행 돌아와서 할머니 인솔 하에 시골에 인사드리러 갔다.(무슨 용어가 있는데...아 신행인가 보다)
친척 집을 일일이 다니며 예쁜 손부라고 인사하는 거다. 5월 좋은 계절에 한복을 입은 꽃같이 예쁜 손부를 데리고 이 집은 우리한테 몇 촌간이고 택호가 단촌 댁이고 다음 차례는 노루실 댁이다. 이렇게 소개하는 할머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얼마나 뿌듯하셨을까. 생과부가 되어 일본 친정으로 떠나는 우리 할머니를 두고 다들 몇 년 안 가서 개가할 꺼라고 수근거렸을 건데 이렇게 정절을 지켜서 번듯하게 키운 손부까지 봤잖은가. 하회 양반 마을에서 시집오신 콧대 높으셨던 우리 할머니. 그때에는 여자는 한번 시집가면 개가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시절이다. 더욱이 사별로 혼자가 되어도 개가는 어려웠다. 거기다 손부가 대학 나와 중학교 영어선생님이라고 은근 슬쩍 자랑하시던 할머니, 대학 물먹은 마누라 얻은 건 참 잘한 짓이다. 용모는 얼마나 이쁜데. 한복 입은 새댁 내 마누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그런데 선녀같이 고운 새댁이 깜짝 놀랐지 뭐니.
'전설 따라 삼천리' 드라마가 있었다. 귀신도 나오는 옛날 시골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드라마. 우리 집안이 사는 집성촌이 흡사 그처럼 드라마에 나오는 첩첩산중에 사는 시골마을이란 말이다. 화장실, 변소라고 했다. 에 가고선 끔찍했던지 종일 오줌을 참느라 쩔쩔맸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 할머니, 부모님한테 가장 잘 한 효도는 그날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고생고생해서 키운 자식들이 변변하게 대접도 못 해드리고 올해로 돌아가신지 십 년이 흘렀다. t십 주년 제사는 아우들과 고향에 내려가 재미나게 놀다가 산소에 들려 성묘 다녀오기로 했다.
부모님의 내리사랑에 비해 자식들이 보답하는 효도는 어림 반푼어치도 안 될 것이다. 덤덤하게 지내온 세월이 죄스럽고 얼굴 들 낯짝이 없다.
아~ 우리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님 죄송합니다. 자식 키워봐야 안다는 말이 있지만 아직도 그 사랑 보답하지 못한 불효자를 용서하옵소서.
우애 좋으셨던 고모님도 아버지 가신 몇해 안 돼 하늘나라로 가셨다. 친정 어머님과 우애 좋은 오빠 찾아서 가셨다.
고모님은 구정 며칠 뒤 일산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딸네들과 하루 이틀 사이로 저를 부르셨다. 떡국에 식혜를 담가서 자식들과 친정조카들(내 여동생들)한테 먹이시려고. 유달리 친정조카를 챙겨주시던 고모님은 우리가 식혜를 맛나게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시고는 사흘인가 지나서 잠이 드셨다.
구정날에 결혼을 앞둔 우리 아들 내외 세배 받으시고 조카며느리 손을 잡고 "좋구나 좋다" 하며 흥겨워 하신 고모님. 저 세상에서 만난 우리 아버지한테 며느리 인상을 설명하느라 기뻐하실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할머니와 부모님, 고모님까지 살아온 파란만장하셨던 세월 속에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우릴 이렇게 번듯하게 키워주시고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던 고마우신 부모님한테 세배드립니다. 저 세상에서도 아름운 우애 잊지마시고 내내 재미나게 사셔요. 제가 올라 갈 때까지.
우리 5남매와 고모님네 여자사촌 셋은 자식들 하나씩 혼사를 치루며 큰일 치룬 후에 모여서 점심을 먹는 게 굳어져서 다른 핑게를 대고 점심을 함께 한다. 나는 아내까지 동반해서 모이면 참 좋다. 미국 이민 간 사촌 아우가 나오면 또 모이게 된다. 옛날 추억 안에서 일어났던 추억 한 가지씩 꺼내 이야기를 하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고모님의 은덕이라고 생각한다. 고모네 아우들도 저들 사촌보다 우리와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다들 칠순을 넘기고 미처 따라오는 나이라 추억 이야기에 빠져드는 건 달콤하다. 고모님이 우리에게 주신 내리사랑에 감동받은 탓이다. 오래오래 이렇게 모여서 사이좋게 지냈으면 한다. 모이면 꼭 떡을 해오는 사촌 누이도, 집으로 초대해서 맛난 거를 대접하는 누이도 고맙다. 추억에 의지해 우리 우애도 부모님처럼 돈독했으면 한다.
-부모는 우리의 영웅이었다가, 넘지 못할 산이었다가, 절망과 수치와 미움이 되기도 하죠. 그리고 그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달아 평생 후회하고 아프게 합니다. 그런 부모 자식의 요동치는(turbulent) 관계가 우리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든다면, 그건 왜일까요?
“그게 바로 인생의 진정한 모습이기 때문이죠. 부모 자식이라는, 거짓이 끼어들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관계가 모든 인간관계의 원형이니까요. 그걸 빼고 우리가 인생을,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