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 전문>
서른의 나이에 요절(夭折)한 시인, 기형도.
사후에 지인들에 의해 출간된 그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을 통해 비로소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작품도 그의 유고 시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젊은 시절 끼적였던 자신의 글에 대해 돌아보는 내용이라 하겠다.
서가에 꽂힌 책을 펼치다가 우연히 발견한, 과거에 자신이 썼던 메모지가 작품의 소재이다.
그것을 다시 읽어본 순간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고,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음을 확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시의 심정이 마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음을 확인하였다.
즉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꿈을 꿨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던 것이리라.
이제 시인은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자신이 ‘살아온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직시하게 되었다.
메모지에 채워진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고, 다시 그 심정을 ‘짧은 글’인 이 작품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과거에 썼던 메모를 통해서, 자신이 지나온 삶의 원동력을 역설적으로 ‘질투’에서 찾았을 것이라 이해된다.
어느 영화 감독은 이 시의 제목을 빌어 영화로 만들기도 했는데, 그만큼 평범한 이들이 겪는 삶의 진면목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