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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애써 무시하고 살아가기는 정말 쉽지 않다.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세상의 다양한 사건들에 관한 소식이 곧바로 나의 눈과 귀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변화에 조금은 거리를 두고 살고 싶은 것이 내 개인적인 소망이라고 하겠다. 언제부턴가 그저 조금이라도 ‘내 몫의 시간’을 온전하게 누리려는 생각에서, ‘느리고 불편하게 살자!’라는 표현을 앞으로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에 ‘36년을 종사해온 교직 생활을 마감하고 전업시인의 길’로 접어든 김광규의 시집을 읽으면서, 세상과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노시인의 성찰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개별 작품으로는 접했어도, 김광규 시인의 시집을 온전하게 읽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집 뒷부분의 ‘해설’에서, 시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면모를 ‘시는 중얼거림이다’라는 명제로 규정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었다. 다만 그 ‘중얼거림’이 혼자만의 넋두리에 그치지 않고, 주위와 세상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음을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시집을 출간했을 당시 시인의 모습에서, 머지 않아 닥칠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기만 하는 책들을 보면서, 정년을 맞아 오랫동안 사용했던 연구실을 비우는 시인의 모습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십팔 년간 사용해온 연구실 비워주려니
지나간 세기의 고전 양서들
천여 권이 쏟아져 나옵니다
집의 서재도 발 디딜 틈 없이 책이 쌓여
옮겨갈 곳도 없습니다
책 욕심 많고 책 사랑 깊던 젊은 날의 흔적들
한 권 한 권 책갈피마다 남아 있어
선뜻 내 손으로 버릴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인터넷 검색에 열중할 뿐
오래된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져가지도 않지요
정년퇴임을 맞은 백면서생이 어찌할 바 모르고
돌아서서 창밖의 교정만 바라볼 때
청소원 아줌마와 수위 아저씨가 나타나
순식간에 책더미를 치워줍니다
근으로 달아서 파지로 팔면
용돈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책의 용도> 전문)
정년이 가까워진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요즘 자주 듣는 고민 중의 하나가 바로 연구실에 쌓인 책의 처리에 관한 내용이다. 젊은 시절부터 애써 모은 한 권 한 권의 책들에 대한 저마다의 사연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 디딜 틈 없이 책이 쌓여’ 있는 집의 서재는 이미 다른 책들로 포화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대학에서는 ‘청소원 아줌마와 수위 아저씨가 나타나 / 순식간에 책더미를 치워’주기에 시인의 고민이 줄어들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책들을 치워주고 파지로 팔면, 그들에게 얼마간의 ‘용돈’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책 욕심’과 ‘책 사랑’으로 모은 책들의 사연이 그렇게 ‘순식간에’ 마무리되는 모습이 조금은 아련하게 다가온다고 하겠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서, 시인이 주변의 모습들을 관찰하는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해설에서는 ‘시인과 언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 있는 중얼거림의 지평이 형성’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전화번호 지우기>라는 작품에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는 상황을 ‘전화를 걸 수 없게 된 / 옛 친구’로 표현하면서, ‘그 친구 이름을 전화번호부에서 / 지워버리’는 ‘씁쓸한 기분’을 표출하기도 한다. 모처럼 찾은 ‘꼬불꼬불 골목길 지나 / 통인동에서 적선동으로 이어지는 길’(<강북행>)에서 과거와 달라진 거리와 주변 건물들에 대한 단상을 토로하는가 하면, ‘아무리 기어 올라오려고 해도 / 반들반들한 욕조의 중간에 못 미쳐 / 미끄러져 떨어’(<그리마와 더불어 2>)지는 그리마를 꺼내 무사하게 보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온 후 언잰가 닥칠 자신의 미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새롭게 들어서는 아파트를 모두 ‘우리 아파트’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말장난’을 통해서 ‘아파트 공화국’의 모습을 환기하기도 한다. 더욱이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십장생보다 오래> 살아남은 존재들을 열거하는 시인의 어법은 험하고 모진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다름 아니라고 이해된다. 스스로 ‘체념과 초탈의 시점에 이를 때까지 노년을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는 ‘시인의 말’을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 역시 시집을 읽는 동안, 노시인의 ‘중얼거림’에 저절로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고 하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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