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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이란 어떤 일이나 상황이 잘못되어 완전히 깨어지는 것을 일컫는 단어이다. 문화평론가로서 저자는 이 글을 쓴 시점의 상황을 '파국'의 조짐으로 이해했고, 그에 대한 나름의 '지형학'을 그려보고자 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코로나19가 지속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아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국면은 2010년 즈음이다. 계간지에 기고했던 글들과 함께 대부분의 글에 '보유'편을 첨부하여, 모두 11개의 글들이 모여 책으로 엮어졌다.
지금은 부패 혐의로 감옥에 가있지만, 저자가 이 글을 쓰고 있던 시점은 '경제 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던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군림하던 시기였다. 저자는 첫 번째 글에서 그 시대를 '디스토피아적 감성'이 지배하던 '늑대의 시간의 도래'로 명명하고 있다.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를 비롯한 영화와 소설들을 대상으로, 암울한 현실의 모습에 대해 '자본논리의 극단화'로 치닫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보유'편으로써 지금도 드라마와 소설 등에서 유행하고 있는 '좀비물'이 지니는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저자는 '좀비는 파국의 상황을 예비하면서 동시에 파국을 전파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좀비물이 유행하는 시대는 그만큼 대중들이 현재의 상황을 절망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의미의 무한연쇄'라는 두 번째의 글에서는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돈>을 통해, 위조지폐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의 연쇄에 주목하고 있다. 위조지폐의 유퉁으로 벌어지는 비극적 사건들은 바로 '돈'으로 표상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속성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글에는 '엔터테인먼트와 포르노그라피'의 문제를 다룬 보유편이 나란히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에 대중들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던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지닌 '무의미의 연쇄'에 주목하고 있다. 10여 년 전에 출간했던 이 책을 다시 펴낸 출판사의 의도는, 지금의 상황이 여전히 '파국'을 예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된다.
아마도 저자가 바라보는 2010년 즈음의 현실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더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저자의 그러한 생각은 달라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의미의 '유토피아'에 대한 주제로, 20세기의 시대 정신을 지배했던 맑시즘과 그것을 추종하던 혁명가들의 열정과 전망에 대한 부재에 대한 논의가 세 번째 항목의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 만능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과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누구나 쉽게 예견할 수 있듯이, 이미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저자는이 항목의 보유편에서 마거릿 애트우드의 <인간 종말 리포트>라는 'SF소설'이라는 용어 대신에 사용한 '추론소설'을 통해서, 미래 사회의 불투명한 전망을 그려내고 있다.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네 번째 항목에서는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과 함께 자신만만하게 선포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주장의 허망한 후일담을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는 승리했을지라도,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체제가 도래함으로써 인류의 삶은 더욱 암담한 상황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정투쟁의 전선'이라는 이 항목의 보유에서는 페이스 북을 만든 저커버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소셜 네트워크>라는 영화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과 접속할 수 있지만 거기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소외되는 SNS의 역설적 상황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실제로 인터넷은 수많은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다른 이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개인화되어 가는 현대인들을 양상하고 있다. 실제로는 서로 '알지 못하지만' 상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인터넷과 SNS가 만들어내는 효과라 할 것이다.
저자에게 당시의 현실을 규정하는 단어는 아마도 파국을 의미하는 ‘아포칼립소’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네 번째 항목의 제목은 ‘아포칼립소 나우 : 파국 시대의 윤리를 위하여’이다. 동서양의 역사에서 흔히 절망의 시대에 대중들에게 도래했던 종말론 혹은 ‘천년왕국’에 대한 이념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저자가 진단하는 파국의 징후는 아마도 극단적인 자본의 이윤으로 치닫는 신자유주의라고 이해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진부하지만 영원한 이념으로 치환되고 있다. 그래서 보유편으로 일본 영화인 <치카마즈 이야기>와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를 통해 제도와 관습의 억압에 ‘사랑’이라는 이념으로 맞선 이들의 이야기를 덧붙여놓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항목은 ‘허무를 허물기’라는 제목의 글로 끝맺음하고 있다.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절망하기보다는 ‘허무를 허물기’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저자의 권유를 담은 것이라 이해된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이성적 사유가 전제되어야 하며, '파국'으로 치닫는 작금의 현실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통해 결국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저자가 이러한 화두를 던진 후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파국’이라는 주제가 공감이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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