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유민의 넋을 기리는 유왕산(留王山)추모제
2015년 10월 03일 (토) 21:16:32 이경 imk0802@hanmail.net
[불교공뉴스-문화] 백제 멸망에 의해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태자 및 세 왕자, 대신 88명, 백성 12,807명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부여군 양화면 유왕산에서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왕산추모제가 지난 3일 열렸다.
이날 추모제에는 이용우 군수를 비롯한 기관단체장, 지역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방호위대를 앞세운 삼헌관, 후방호위대, 제집사, 백제유민 등 제향 참여단 행렬이 양화면사무소를 출발해 양화면 암수리 유왕산에 도착, 제향을 봉행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어 의식행사를 마친 후 망국의 한과 이별의 아픔을 승화시키고자 했던 옛 선인들의 삶의 지혜를 되살려 유왕산놀이, 노래자랑 등의 주민화합 한마당 행사를 가졌다.
유왕산 추모제에 참석한 이용우 군수는 “유왕산에 얽힌 백제문화의 가치는 크며 백제의 후예인 우리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며 “앞으로도 유왕산 추모제가 백제문화와 백제정신을 지킬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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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왕산(留王山)은 의자왕(義慈王, 641~660)이 머물렀다는 산이다.
추모(추모)라는 것이 왕, 왕자, 대신, 백성이 당나라에 끌려 간것을 추모하는 것 같다.
추모도 중요하지만 역사는 교훈도 중요하기 때문에 철저한 비판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의자왕은 태자 때부터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어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다. 재위기간 초기에 개혁정치를 펼쳐 국정을 쇄신하고 642년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서 영토를 대야성을 비롯하여 40여성을 빼앗았다. 이때 대장군 부여윤충 장군이 1만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사전에 매수한 금일이 성문을 열어서 성주 김품석과 그 아내 소랑도 죽였다. 이것은 나중에 신라가 당나라와 엽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자왕은 주색에 탐닉하였다. 신라 김유신은 백제를 무너뜨리게 하기 위하여 백제의 임자(壬子)와 내통하고 있었고 임자(壬子)가 보낸 뛰어난 미모와 빼어난 몸매를 가진 무당 금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충신 부여성충과 부여윤충을 옥에 가두고 흥수는 고마미지(古馬彌知,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보냈다..
병관좌평 부여성충(扶餘成忠)은 상소후 28일 단식하다가 옥사하고 흥수의 충언도 뿌리치고 왕족 북신(福信)을 파면하여 더 이상 충간할 사람이 없어 결국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함으로써 백제의 멸망시킨 와이 되었다.
의자왕은 바로 그해 당나라에서 사망하고 그곳에서 매정되었다.
부흥운동은 잘 나가다가 당나라 농간에 백제부흥운동을 하던 흑지상치(黑齒常之)는 당에 항복하고 당나라에서 가서 초반에는 출세했으나 이용당하고 결국은 모함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이것이 바로 개죽음이다.
부여융(扶餘隆, 615(무왕 16)~682(신문왕 2))
백제 마지막 왕 31대 의자왕의 아들. 의자왕 4년 64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태자의 이름이 효(孝)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회요(唐會要) 백제전에는 숭(崇)으로 되어 있다.
660년 나당동맹군의 공격을 받자 의자왕과 웅진성(공주)으로 피난했다가 왕과 함께 곧 항복했다. 소정방(蘇定方)이 귀국하면서 의자왕, 부여융, 세 왕자, 대신 88명, 백성 12,807명이 당(唐)으로 압송되었다. 당에서 사가경을 제수받았고 662년 수군을 이끌고 귀국하여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주류성에서 백제부흥군 부여풍을 공격하는 데 참가했다. 주류성이 항복하고 백제 저항군이 모두 진압된 뒤 당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웅진도독의 자격으로 664년 유인원(劉仁願)의 주재하에 웅진에서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천존(天存)과 함께 화친을 맹약했다. 또 665년에는 신라 문무왕과 취리산에서 2차 맹약을 함으로써 백제고지에 대한 지배를 용인받았다. 그러나 신라를 두려워한 그는 곧 당으로 돌아가서 당에서 죽었다.
망국의 태자가 당의 앞잡이 되어 부흥운동을 진압하러 오다니.........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은 당에 항복하고 조선군왕에 임명되었지만 끊임없이 부흥운동을 꾀해 결국 당에 소환되었고 그 아들과 손자들도 비록 실패했지만 계속 고구려 재건운동을 했었다.
부여 융은 여기에 비하면 아주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