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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길 한 가운데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
본문 : 행 7:9-10
(기도)
,,,를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좁은 문이 무엇인지 좁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또 그 은혜의 길을 선뜻 선택할 수 있게 우리에게 그 은혜 베풀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아침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만이 오롯이 드러나서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행복하게 하는지 우리가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행전 7장 9절에서 10절 봅니다.
행 7:9-10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아멘.
목사님 잘 갔다 오셨습니까? ㅎ. 늘 그 자리에 앉아 계시다가 비니까 되게 허전하더라고요. ㅎ 다들 그냥 허전해가지고.
우리 그 지난 시간에 요셉에 대해서 우리 조금 살펴봤는데 갑자기 스테반이 아브라함 얘기를 하다가 요셉의 이야기로 이제 싹 넘어 갔는데, 그게 무엇을 이야기하는 거냐 하면 믿음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선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필연적으로 필요하죠? 믿음의 조상이고 믿음의 시작이니까. 그가 뭐가 잘난 사람이 아니라 믿음은 이렇게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를 최초로 모형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본받자, 뭐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산헤드린 공회원, 그들을,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서 요셉이라는 인물을 끌어다 쓰는 거죠. 이삭과 야곱을 그냥 싹 빼버리고 요셉, 요셉이라는 인물의 특징은 형들에게 팔려서 죽은 거예요, 그거는요. 형들이 그냥 그 구덩이를 파고, 판 게 아니라 원래 짐승 잡는 구덩이에다가 쳐 넣고 그냥 가려다가 죽인 거죠, 그죠? 죽으라고 거기에다 놓은 거니까. 그러다가 이제 미디안 상인들한테 파는데 그것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당시에 가족과 친족, 공동체를 떠나 다른 외국인에게 팔린다는 게 그냥 생사여탈을 함께 빼앗기는 거거든요. 그걸 갖다가 그 형들이 돈 몇 푼 받고 요셉을 팔아버렸잖아요? 죽인 거죠. 그렇게 죽였는데 그 자기를 죽인 이들을 오히려 살려내는, 기아에서. 아사 직전에 있는 그들을 살려내는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를 설명하기 위해서 스테반이 요셉의 이야기를 끌어다 쓰는 거죠.
일차적으로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산헤드린 공회원들, 바리새인 서기관들아 니들이 예수님 죽인 거야. 이 얘기하는 거예요. 화가 나죠, 돌에 맞아죽을 만도 한 거예요, 그죠? 이 이야기하고 바로 맞아 죽었습니다. ㅎ. 그러니까 복음을 전한다는 건 바로 그거에요. 당신들이 바로 예수님을 때려죽인 사람들입니다,를 깨닫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진다는 거. 설교라는 단어가 전도라는 단어랑 똑같은 단어거든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설교라는 단어에요. 그러니까 설교나 전도나 똑같은 거. 여러분은 삶으로 또 입으로 설교하시는 분들입니다. 목사만 설교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설교에요.
근데 그 설교는 어떻게 우리에게 떨어져야 되냐면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어떤 시약처럼. 알칼리와 산성을 구분하는 시약처럼 우리에게 떨어지는 거예요, 이렇게. 그래갖고 우리가 이 죄인으로 이렇게 확, 어, 진짜 죄인이었네? 이렇게 드러나는 거. 그게 이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거든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뭐 길가 밭, 돌짝밭, 가시 떨기가 되지 말자, 그걸 갈아엎어서 좋은 밭이 되자. 이거는 아주 유치원수준의 해석도 안 되는 거라 그랬어요. 그건 될 수도 없는 거고 어떻게 보면 그거는 정말 성경의 진의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해석하는 거기 때문에 마귀적 해석인 것입니다. 그거는요. 씨앗이 떨어지니까 그들이 비로소 아, 이게 길가 밭이었구나? 가시떨기였구나? 이게 바로 돌짝밭이었구나? 가 드러나는 거잖아요? 씨앗이 떨어지기 전에는 그게 어떤 밭인지 모르죠, 그죠? 근데 그게, 그 씨가 뭐라 그랬어요? 말씀이라 그랬죠? 예수님이 설명해주잖아요. 말씀이 떨어지니까 사람들의 본질이 이렇게 폭로되는 거예요, 본전이. 어 이거 길가 밭이네, 돌짝밭이네!
그런데 그 길가 밭, 돌짝밭, 가시떨기의 모습이 우리 안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잖아요? 자, 그렇다면 좋은 밭이라는 게 뭘까요? 좋은 밭은 말씀이 떨어졌을 때 내가 길가 밭이구나! 왜?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떨어지는데 수시로 그걸 홀랑홀랑 집어가잖아요, 마귀가. 금방 잊어버리고 살잖아요? 마찬가지로, 세상의 유혹과 이 재리의 유혹 이런 것들이 왔을 때 우리 수시로 넘어지죠? 그리고 몸이 아프거나 환란과 핍박이 오면 금방 또 하나님 원망하고 그러잖아요. 네? 뭐 아닌 것처럼 그렇게 ㅎㅎ, 그러죠? 그러니까 그게 다 우리 모습 아닙니까?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어, 내가 바로 그런 존재네요? 라는 것을 이렇게 리트머스 시험지에 의해서 명확하게 폭로당하는 걸 그걸 내가 알게 되는 거. 아, 내가 이런 존재네? 라고 알게 되는 걸 좋은 밭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 게 그거에요. 상한 심령이라는 단어 자체가 ‘오, 하나님, 저는 아니군요. 저는 Nothing이고 하나님이 전부이시네요.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저는 영원히 길가 밭이고 영원히 돌짝밭이며 영원히 가시떨기네요.’를 말씀에 의해 내가 폭로당하는 걸 그게 열매 맺는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미워짐으로 말미암아 진짜 내 안에 하나님께서 진짜 열매를 맺어내시는 거. 그게 좋은 밭이라니까요. 근데 돌 걸러내고 가시떨기를 제하고, 그게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그게 되냔 말에요? 그거 안 돼서 예수님 오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보십쇼. 그렇게 돌짝밭이고 길가 밭이고 가시떨기일 수밖에 없는 우리 안에 좋은 씨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 좋은 씨가 뭐라 그래요? 예수님은 자기를? 한 알의 밀알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게 들어와서 엉터리 밭 안에 들어가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열매가 맺히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지혜.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밭은 씨로 해서 좋은 밭으로 결정이 되어지는 거지 밭 자체가 뒤집어엎어서 변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말씀을 들을 때 그렇게 아파야 되는 거예요. 폭로가 되는 거예요, 죄인으로 폭로가 되는 거예요. 디모데서에 보면은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그러면서 그 말씀을 전하는 내용을 뭐라 그래요? 경책하고, 야단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디모데야, 정말로 살살 달래 가면서 해라, 안 그랬다니까요. 야단쳐라! 그랬단 말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여러분은 야단을 맞는 기분이 들으셔야지 아이구, 오늘은 왜 또 저렇게 그냥, 뭐가 집에서 뭔 일이 있었나? 왜 그렇게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ㅎ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네? 아니, 자꾸 사람들이 저한테 소리 지르지 말라고 그러는데 아니, 소리를 어떻게 지금 안 질러요? 불이 지금 나갖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게 내 눈에 보이는데 그럼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질러야지 불이에요, 나오세요. ㅎ 이러면 돼요? 그게 진심이겠냐고요? 그게? 네?
그냥 마지못해서. ‘하나님 나는’, 요나처럼. 요나가 그랬을 거예요. 그놈의 니느웨에 가갖고 하나님이 그냥 물고기 뱃속에 사흘씩 넣고 막 그냥 달달볶으니까 그랬을 거예요.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이랬겠어요? 그냥 조그맣게 회개하세요. ㅎㅎ. 안 그러면 클나요. 뭐 이랬을 거 아닙니까? 거 안 봐도 뻔해요. 왜냐하면, 마지막에 요나가 어떻게 했어요? 저놈들 분명히 망할 거야, 그러고는 보고 있었다니까요. 저 불타는 거 한번. 불구경한번 고 가자, 그러고. 근데 그 사람이 뭐가 신나서 거기 들어가 갖고 회개하라! 그랬겠어요? 그냥 하나님이 시킨 거니까 회개하라, 회개하세요. 여보세요, 회개 좀 하시죠. ㅎㅎ 이러고 다녔을 거란 말에요. 그래야 되겠느냐고요, 제가? 그게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보일 때는 이게 조용, 조용 한다고 마음에 다짐하고, 다짐하고 왔어도. 이게 자제가 안 돼야, 되는 게 맞지 않아요? 그래야 진짜 이 사람들을 살려내겠다는 그 진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소리가 안 나와요?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전부 알아듣는 것 같은데 아닌 걸 아는데 어떻게 소리가 안 나와요? 불이야! 하고 소릴 질어야지. 그러니 야단을 치라잖아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길 한 가운데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
본문 : 행 7:9-10
(기도)
,,,를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좁은 문이 무엇인지 좁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또 그 은혜의 길을 선뜻 선택할 수 있게 우리에게 그 은혜 베풀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아침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만이 오롯이 드러나서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행복하게 하는지 우리가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행전 7장 9절에서 10절 봅니다.
행 7:9-10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아멘.
목사님 잘 갔다 오셨습니까? ㅎ. 늘 그 자리에 앉아 계시다가 비니까 되게 허전하더라고요. ㅎ 다들 그냥 허전해가지고.
우리 그 지난 시간에 요셉에 대해서 우리 조금 살펴봤는데 갑자기 스테반이 아브라함 얘기를 하다가 요셉의 이야기로 이제 싹 넘어 갔는데, 그게 무엇을 이야기하는 거냐 하면 믿음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선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필연적으로 필요하죠? 믿음의 조상이고 믿음의 시작이니까. 그가 뭐가 잘난 사람이 아니라 믿음은 이렇게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를 최초로 모형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본받자, 뭐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산헤드린 공회원, 그들을,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서 요셉이라는 인물을 끌어다 쓰는 거죠. 이삭과 야곱을 그냥 싹 빼버리고 요셉, 요셉이라는 인물의 특징은 형들에게 팔려서 죽은 거예요, 그거는요. 형들이 그냥 그 구덩이를 파고, 판 게 아니라 원래 짐승 잡는 구덩이에다가 쳐 넣고 그냥 가려다가 죽인 거죠, 그죠? 죽으라고 거기에다 놓은 거니까. 그러다가 이제 미디안 상인들한테 파는데 그것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당시에 가족과 친족, 공동체를 떠나 다른 외국인에게 팔린다는 게 그냥 생사여탈을 함께 빼앗기는 거거든요. 그걸 갖다가 그 형들이 돈 몇 푼 받고 요셉을 팔아버렸잖아요? 죽인 거죠. 그렇게 죽였는데 그 자기를 죽인 이들을 오히려 살려내는, 기아에서. 아사 직전에 있는 그들을 살려내는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를 설명하기 위해서 스테반이 요셉의 이야기를 끌어다 쓰는 거죠.
일차적으로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산헤드린 공회원들, 바리새인 서기관들아 니들이 예수님 죽인 거야. 이 얘기하는 거예요. 화가 나죠, 돌에 맞아죽을 만도 한 거예요, 그죠? 이 이야기하고 바로 맞아 죽었습니다. ㅎ. 그러니까 복음을 전한다는 건 바로 그거에요. 당신들이 바로 예수님을 때려죽인 사람들입니다,를 깨닫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진다는 거. 설교라는 단어가 전도라는 단어랑 똑같은 단어거든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설교라는 단어에요. 그러니까 설교나 전도나 똑같은 거. 여러분은 삶으로 또 입으로 설교하시는 분들입니다. 목사만 설교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설교에요.
근데 그 설교는 어떻게 우리에게 떨어져야 되냐면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어떤 시약처럼. 알칼리와 산성을 구분하는 시약처럼 우리에게 떨어지는 거예요, 이렇게. 그래갖고 우리가 이 죄인으로 이렇게 확, 어, 진짜 죄인이었네? 이렇게 드러나는 거. 그게 이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거든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뭐 길가 밭, 돌짝밭, 가시 떨기가 되지 말자, 그걸 갈아엎어서 좋은 밭이 되자. 이거는 아주 유치원수준의 해석도 안 되는 거라 그랬어요. 그건 될 수도 없는 거고 어떻게 보면 그거는 정말 성경의 진의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해석하는 거기 때문에 마귀적 해석인 것입니다. 그거는요. 씨앗이 떨어지니까 그들이 비로소 아, 이게 길가 밭이었구나? 가시떨기였구나? 이게 바로 돌짝밭이었구나? 가 드러나는 거잖아요? 씨앗이 떨어지기 전에는 그게 어떤 밭인지 모르죠, 그죠? 근데 그게, 그 씨가 뭐라 그랬어요? 말씀이라 그랬죠? 예수님이 설명해주잖아요. 말씀이 떨어지니까 사람들의 본질이 이렇게 폭로되는 거예요, 본전이. 어 이거 길가 밭이네, 돌짝밭이네!
그런데 그 길가 밭, 돌짝밭, 가시떨기의 모습이 우리 안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잖아요? 자, 그렇다면 좋은 밭이라는 게 뭘까요? 좋은 밭은 말씀이 떨어졌을 때 내가 길가 밭이구나! 왜?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떨어지는데 수시로 그걸 홀랑홀랑 집어가잖아요, 마귀가. 금방 잊어버리고 살잖아요? 마찬가지로, 세상의 유혹과 이 재리의 유혹 이런 것들이 왔을 때 우리 수시로 넘어지죠? 그리고 몸이 아프거나 환란과 핍박이 오면 금방 또 하나님 원망하고 그러잖아요. 네? 뭐 아닌 것처럼 그렇게 ㅎㅎ, 그러죠? 그러니까 그게 다 우리 모습 아닙니까?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어, 내가 바로 그런 존재네요? 라는 것을 이렇게 리트머스 시험지에 의해서 명확하게 폭로당하는 걸 그걸 내가 알게 되는 거. 아, 내가 이런 존재네? 라고 알게 되는 걸 좋은 밭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 게 그거에요. 상한 심령이라는 단어 자체가 ‘오, 하나님, 저는 아니군요. 저는 Nothing이고 하나님이 전부이시네요.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저는 영원히 길가 밭이고 영원히 돌짝밭이며 영원히 가시떨기네요.’를 말씀에 의해 내가 폭로당하는 걸 그게 열매 맺는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미워짐으로 말미암아 진짜 내 안에 하나님께서 진짜 열매를 맺어내시는 거. 그게 좋은 밭이라니까요. 근데 돌 걸러내고 가시떨기를 제하고, 그게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그게 되냔 말에요? 그거 안 돼서 예수님 오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보십쇼. 그렇게 돌짝밭이고 길가 밭이고 가시떨기일 수밖에 없는 우리 안에 좋은 씨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 좋은 씨가 뭐라 그래요? 예수님은 자기를? 한 알의 밀알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게 들어와서 엉터리 밭 안에 들어가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열매가 맺히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지혜.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밭은 씨로 해서 좋은 밭으로 결정이 되어지는 거지 밭 자체가 뒤집어엎어서 변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말씀을 들을 때 그렇게 아파야 되는 거예요. 폭로가 되는 거예요, 죄인으로 폭로가 되는 거예요. 디모데서에 보면은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그러면서 그 말씀을 전하는 내용을 뭐라 그래요? 경책하고, 야단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디모데야, 정말로 살살 달래 가면서 해라, 안 그랬다니까요. 야단쳐라! 그랬단 말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여러분은 야단을 맞는 기분이 들으셔야지 아이구, 오늘은 왜 또 저렇게 그냥, 뭐가 집에서 뭔 일이 있었나? 왜 그렇게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ㅎ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네? 아니, 자꾸 사람들이 저한테 소리 지르지 말라고 그러는데 아니, 소리를 어떻게 지금 안 질러요? 불이 지금 나갖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게 내 눈에 보이는데 그럼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질러야지 불이에요, 나오세요. ㅎ 이러면 돼요? 그게 진심이겠냐고요? 그게? 네?
그냥 마지못해서. ‘하나님 나는’, 요나처럼. 요나가 그랬을 거예요. 그놈의 니느웨에 가갖고 하나님이 그냥 물고기 뱃속에 사흘씩 넣고 막 그냥 달달볶으니까 그랬을 거예요.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이랬겠어요? 그냥 조그맣게 회개하세요. ㅎㅎ. 안 그러면 클나요. 뭐 이랬을 거 아닙니까? 거 안 봐도 뻔해요. 왜냐하면, 마지막에 요나가 어떻게 했어요? 저놈들 분명히 망할 거야, 그러고는 보고 있었다니까요. 저 불타는 거 한번. 불구경한번 고 가자, 그러고. 근데 그 사람이 뭐가 신나서 거기 들어가 갖고 회개하라! 그랬겠어요? 그냥 하나님이 시킨 거니까 회개하라, 회개하세요. 여보세요, 회개 좀 하시죠. ㅎㅎ 이러고 다녔을 거란 말에요. 그래야 되겠느냐고요, 제가? 그게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보일 때는 이게 조용, 조용 한다고 마음에 다짐하고, 다짐하고 왔어도. 이게 자제가 안 돼야, 되는 게 맞지 않아요? 그래야 진짜 이 사람들을 살려내겠다는 그 진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소리가 안 나와요?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전부 알아듣는 것 같은데 아닌 걸 아는데 어떻게 소리가 안 나와요? 불이야! 하고 소릴 질어야지. 그러니 야단을 치라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자기를 도덕과 윤리로 근사하게 포장하여 굉장히 자기를 좋은 밭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가면을 확 벗겨서 그 좀비 같은 얼굴을 드러내주는 게 말씀이란 말에요. 시약이라니까요. 똑 떨어트리는, 산성물과 알카리 물이요 맛으로도 구별이 안 가요. 산성물은 뭐 실 거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시약을 떨어트려봐야 아 이거 산성이구나, 알카리구나를 알 수 있어요.말씀이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큰일 날 뻔했구나! 를 깨닫고 그 하나님의 은혜, 그럼에도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임했다고 하니까 그냥 그걸로 감사하는 거.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 저 같은 거 그냥 지옥 보내시지 뭐 하러 그렇게 애를 쓰셔서 아들까지 죽이시면서 저를 구원하셨어요? 라는 면목 없음의 자리까지 내려가는 걸 성도의 성화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자기가 자기를 계발하여 뭐 자기를 굉장히 괜찮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요셉과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셨다, 그래요. 요셉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 그래요. 근데 왜 팔게 만들어요?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는 왜 보내시고.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감옥에는 왜 들어가게 하시냐고요?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며? 아니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까 그냥 뭐 팔고 자시고 이런 거 말고 그냥 좋은 경로를 통해 애굽으로 보내서 거기서 그냥 승승장구하게, 과거에 급제하고 뭐 이렇게 승승장구하게 만들어서 애굽의 총리를 만들 수도 있는 분인데 왜 구차하게 그런 지저분한 일을 다 겪게 해갖고 십년이 넘도록 그냥 종으로 감옥에서 죄인으로 왜 그렇게 살게 만들다가 그 오랜 세월을 거치고 거치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셔서 형들을 구하게 하냐고요?
그런 우리가 모르는 거,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이 우리의 도덕과 윤리, 그리고 우리의 이 상식으로 자꾸 판단하려고 하면 안 돼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 속에서 그냥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여보낼 수도 있어요. 많은 분들이 뭐 하러 이 역사와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고 우리를 여기에다가 집어넣느냐고 그냥 볼멘소리들을 하는데 그냥 선택했으면 하나님 나라로 옮기시지 뭐 하러?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는 헤아릴 수 없다니까요. 왜 요셉을 이년간이나 감옥에다가 넣어놔야 돼요? 아 그것도 그 술 맡은 관원장이 출옥한 이후로도 이년을 더 있었어요. 걔가 나가서 분명히 바로에게 이야기해서 사면시켜준다고 그래놓고 잊어버렸어요. 인간이라는 게 그래요, 원래. 근데 그 이후로도 이년을 더 놔둬, 거기에서 뭘 했다는 소리는 단 한 줄도 안 나와요. 근데 요셉은 이년간 있어야 돼요, 거기에, 그 후로도. 그런데 그게 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지를,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신이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어떠한 대우를 받게 되고 어떠한 해를 입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하나님의 편인 우리에게 경험케 해주시는 거예요. 아주 절절하게. 그러니까 여러분은 사망의 증상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어떤 모습으로라도 다 경험을 하셔야 돼요. 안 그렇고 는 이 세상이나 하나님 나라나 뭐가 달라? 몰라요, 우리는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경험하고 가셔야 돼요. 아주 처절하게.
자,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셨다면 지금 모든 게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거죠? 창세기의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은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으로 보냈고, 하나님이 그 모든 과정을 다 선으로 바꾸셨다, 라고 요셉이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 형들을 방법과 도구로 사용하신 거죠? 물론 그들의 악이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악이 악으로 표출 안 되고 이런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이 형제들이 만약에 요셉을 안 팔았다고 그러면 그 안 판 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천국 갈 수 있나요? 어차피 지옥 가요. 모든 인간은, 그죠? 근데 이 형들의 그 죄악상이 어떤 것인지를 그들이 지금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본전이 무엇인지를 요셉을 팔게 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원래 이 형들의 본전이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그냥 드러내준 거거든요. 하나님이 그들을 이용해서 형들을 팔게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선한 그들을 악한 자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원래 악이라는 건 어떤 행위를 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바로가 모세의 요구를 계속 거절한 게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걍팍하게 했다고 하고 바로가 걍팍해서, 라고도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걍팍하게 했다, 라는 건 그 말이, 착한 바로를 하나님이 걍팍하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 인간은 그렇게 걍팍해요. 걍팍한데 하나님께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 몇 가지 사건들을 이렇게 그들에게 허락하는 거, 이걸 어떻게 죄의 조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냔 말에요? 참 답답한 거예요. 그래요, 유다가 하나님에 의해 예수를 파는 데에 사용이 됐어요. 그러면 유다가 하나님에 의해 예수를 파는 도구로 사용이 안 되고 그냥 예수만 안 팔면 천국 가는 거예요? 어차피 지옥행이란 말에요. 그런데 왜? 우리는 왜 하나님이 유다를 예수를 팔자로 선택해놓고 그를 지옥 보내냐고 그래요. 아니, 원래 지옥 갈 사람을, 원래 니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해주기 위해 그런 일을 허락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로가 걍팍한 모습을 보인 거, 이 형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서 요셉을 판 거. 유다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예수를 판 거, 그 모습을 보면서 야, 하나님은 참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도구로 방법으로 써서 저렇게 악당을 만들 수 있지? 가 아니라 그게 나래요,를 봐야 되는 게 성도란 말입니다. 저는 수시로 예수를 팔 사람이고 저는 내 유익을 위해 누가 노예로 우리 땅에서 내 우리 울타리 안에서 고생을 하든말든 아무런 상관을 안 하는 자이고 저는 언제든지 내 시기와 질투로 동생까지도 팔아먹을 수 있는 존잽니다.를 우리는 거기서 봐야 되는 거지. 건방지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해놓고 어떻게 지옥 보내냐고? 아니에요. 그러니까 참 얼마나 무식합니까? 이 시대 교회가. 그런 거 하나도 해결이 안 되어 있어요. 지금요.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교회에서 가르쳐주질 않고요, 리트머스 시험지를 던지지 않고 그냥 너는 몸에 좋은 알칼리수란다. 늘 그렇게만 배워왔기 때문에 인간들이 기고만장해갖고 이제 하나님은 내 허락 없이는 그런 일을 함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오히려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버렸어요. 왜 내 허락도 안 받고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유기키시냐고. 아 이게 요즘 교회에서 나오는 질문들 아니에요? 예정이 뭐에요? 도대체? 이건 무슨 말이에요? 왜 내 허락도 안 받고 왜 내 상식에 반하는 일을 하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하여튼 말씀에 의해서 부수어지고 부수어지고 완전히 개박살이 나야 그래야 그런 소리 못하는 거예요. 어딜 하나님 앞에서 왜 내 허락도 안 받고 당신 맘대로 일을 하냐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게 진짜 복이거든요. 말씀에 의해서 내가 완전히 해체되고 산산조각이 나야 그래야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납작 엎드리는 자가 되는데 그런 말씀을 전하면요 아, 그냥 가슴이 패이고 너무 아프다고. 너는 얼마나 잘 사나보자, 막 이러질 않나? ㅎ. 참 이거 아주. 어저께 여기 퀸즈, 뉴욕 퀸즈한인 장로교횐가? 그 한 ㅇㅇ 목사가 간 그 교횐가, 거기 부목사가 아마 우리 설교를 계속 듣고 그걸로 청년부 설교를 했나봐요. 고대로 뭐 자기가 실토하더라고요. 그냥 고대로 표절해서 했다고. 설교를 했다고. 그래 저는 잘했다고 그랬어요. 표절이 어딨냐고. 이해가 되어져서 그거를 그거 이상으로 더 보탤 거 없다, 라는 생각에 그냥 했으면 그거 표절 아니다. 당신 거 맞다. 근데 그 설교, 그렇게 몇 개월을 그렇게 설교를 하다보니까 청년들이 하나 둘씩 나가기 시작해갖고 담임목사한테 죽도록 혼나고. ㅎㅎ 거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뉴욕에 있는 어떤 친구가 어, 목사님, 김성수 목사 설교 표절했다고 그랬나봐요. 그래갖고 이제 완전 진퇴양난이. 완전히 표절목사가 되고 거기다가 담임 목사한테 너는 교회 부흥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아주 못된 목사라는 이야기까지 들은 모양이에요. 그래갖고 하소연을 한다고 이제 저한테. 생전 처음 보는 분인데. 나이도 저랑 동갑이더라고요, 보니까
여러분 말씀이 떨어져서 사람들이 이렇게 편안하고 아우 너무 좋아, 막 너무 행복해, 너무 위로가 돼. 그래 우리도 이 세상도 참 살만한 곳이야 아, 이 평안, 이 안식 어쩌면 좋아? 이렇게 되면요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죽는 거예요. 거기에 아골 골짝 쌓이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럴 여유가 없어요. 진짜 평안은 하나님이 내 삶을 폭격해서 내 뜻과 내 비전과 야망과 내 일상, 희망을 다 뺏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 뜻대로 할 수 있어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당신이 쉴 곳이 없으면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뜻을 못 펼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여러분이 어떤 내 인기나 평판을 챙기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꾸 내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려고 하는 그 어떤 시도 그것도 다 추악한 거예요, 그게 다. 여러분 인간은 이 땅에서 소멸이 되어 가는 거예요. 소멸.
제가 어저께 이제 칼럼을 또 쓰면서 어후 그것도 아주 되게 일이에요, 그 칼럼 한편씩 쓰는 것도. 설교를 하라면 하겠는데 그냥 칼럼을 자꾸 쓰라고 그래갖고. 근데 그 칼럼을 쓰려고 딱 앉아가지고 펜을 들었는데 쓸 게 없어요. 그 중앙방송이라는 라디오에서 다 나가는데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게 너무 종교적인 색채를 띠지 말라고. 그러니까 종교적인 색채를 띠지 않고 거기다가 메시지를 넣으려니까 그게 너무 힘들어요. 그래 인제 산에, 제가 등산 가다가 이제 예전에 제가 우리 집에 관악산이고 또 학교가 관악캠퍼스에 있었으니까 관악산에 제가 수시로 올라갔거든요. 산에 다니는 거 되게 좋아했어요. 여기 와갖고 산이 산답지 않아서 별로 안가지만. 산에 올라가다보면 너무 이렇게 마음이 행복해져요, 저는. 그러니까 혼자 늘 가니까. 올라가다보면 그게 인생인 것 같아요, 저는. 올라가다보면 지루하게도 하고 때론 먹먹하기도 하고 때로는 난삽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뭐 고요하다가. 때로는 뭐 높은 골짜기를 또 열심히 기어 올라가야 되고 또 어떤 땐 평지가 나오고 어떤 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고. 어떤 땐 비와 눈이 쏟아지기도 하고 그냥 산을 한번 올라갔다 내려오면 아, 이게 내 인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주 올라갔는데 어느 날 산에 올라갔는데 눈이 와요, 갑자기. 근데 눈이, 봄에 그것도. 관악산에 눈이 오는데 내리자마자 그 눈이 나무에 탁 닿자마자 이게 싹 소멸되어지는 거, 없어지는 거예요. 근데 없어지는데 그 없어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구차하지 않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갖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아주 그냥 천군만마처럼 쏟아져내려오는데 내려오는 즉시 이렇게 싸악, 별 미련 없이 이렇게 소멸되어져가는 모습을 보고 아, 이들이 이렇게 소멸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눈으로 다시 올 수 있는 거예요. 그들이 거기에 집착하여 딱 붙어 있으면 이제 눈은 없는 거예요. 그들이 소멸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소멸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끌려 올라간다는 뜻이거든요. 증발한다는. 그래야 또 다른 눈으로, 새로운 눈으로 쏟아질 수 있는 건데 그들이 난 안 갈 거예요, 딱 붙어버리면? 집착해버리면 또 다른 눈으로 다시 새롭게 올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거기에 붙어 있는 한 이들이 소멸이 되어지면 이게 불멸로 이어지거든요. 왜? 하나님 손에 잡히면 영원히 죽지 않아요. 불멸이에요. 그러니까 진짜 소멸은 불멸을 품고 있는 거예요. 근데 어딘가에 집착을 해버리면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지 못하면 얘는 거기에 머물 수밖에 없어요. 그게 지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에 의해 쭉 빨려 올라갈 수 있는, 소멸되어지는 자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잘난 존재가 자꾸 되려고 하면 안 된다니까요. 근데 뭐 우리가 사람들에게 좋은 일, 착한 일 선한 일 구제, 몇 가지 해놓고 그냥 그것으로 내 가치를 자꾸 챙기려고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그게.
아니 좀비가 좀비에게 밥 한 숟가락 더 떠먹여준다고 그걸 착한 일이라고 하냐고요. 여러분 영화 같은 거 많이 보셨잖아요? 좀비 영화, 강시 영화. 강시들이 콩콩 뛰면서 지들끼리 싸우다가 야, 밥 먹자 그러고 서로 밥을 막 먹여줬어요, 강시가. 그럼 여러분이 강시 영화 보면서 아, 저 강시 참 착하네 저거. 착한 강시. ㅎㅎ. 저건 나쁜 강시. 그러냐고요? 그 시체를. 근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다 죽었어요. 성도만 살았어요. 강시가 강시를 죽인들 그걸 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죄라고 할 수 있냐고요?
그러니까 죄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통용되는 게 아니라 그랬잖아요. 선도 마찬가지에요. 죽은 자가 죽은 자에게 하는 것은 선이 아니에요. 선과 악, 죄라는 개념은 진짜 산자인 하나님과 하나님에 의해 살아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단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살해하는 것을 죄라 그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걸 선이라 그래요.
근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존재는 이렇게 형들이 요셉을 죽여 버린 것처럼 이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처럼 자기를 위해 사는 한, 자기 이외에 다른 존재, 그게 하나님일지라도 형제, 가족일지라도 죽이는 게 죄인인 거예요. 그게 죄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살해하는 모든 행위를 죄라고 하는 것이지. 그리고 하나님께 해드리는, 하나님을 인정해드리는 모든 행위를 선이라고 하는 것이지 인간들 사이에서 여러분이 빵 몇 개 나눠주고 무슨 뭐 촛불 들고 나가서 용산 참사 철거민들을 뭐 그들에게 보상금을 주자. 한 사람 앞에 십 몇 억씩 받았다면서요? 그래서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래요, 교회에서 나서서 십 몇 억씩 받아줬어요. 못 받은 것 보단 나은데 그 십 몇 억을 갖고 그들이 지옥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걸, 그 행위를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냐고요? 근데 왜 촛불 들고 자꾸 어딜 나가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역사의식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니라니까요.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역사의식이 있어야 되지만, 그 역사의식 속에 내가 개입을 하여 내가 뭔가 그들을 나은 삶을, 그들에게 나은 삶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이런 교만, 이게 어떻게 교회와 성도의 삶 속에서 나오냐고요? 도대체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착하고 거룩한 삶을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성도가 이 땅에서 그거 하는 거냐고요?
리트머스 시험지인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큰일 날 뻔했군요!를 깨닫고 가는 거라니까요. 무슨 거룩한 삶을 올려드려요? 어떻게? 내 마음은 여전히 찢어진 똥 걸렌데 그 상태에서 거룩한 걸 하나님이 받으시냐고요? 제가 난곡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 그 아이들 가정방문을 하면 부모들이 대부분 80%이상이 정신 지체에요. 알콜중독 내지는 뭐 못사는데 암 환자는 왜 이렇게 많은지? 위장이 3분의 1밖에 안 남은 그런 사람들. 그런데도 술을 못 끊어요. 그 더럽고 지저분하고 열악한 데에서. 진짜 손바닥만 해요. 손바닥만 한 판잣집 안에 부엌이고 뭐고 다 거기서 써야 되니까. 가면은 꼭 밥을 줘요. 그 한국 사람들의 손님접대. 선생님이 또 왔다 그러니까. 밥을 주는데, 정신지체에다가 알콜중독이된 엄마가. 집안에 딱 들어서는 순간 지린내, 오물 냄새가 코를 찔러서 그냥 토할 거 같애요, 바로. 저는 또 비위까지 약해가지고. 근데 그 손으로 그 그릇에다가 먹던 밥을,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 사람은. 그거 억지로라도 먹어야 돼요. 물 말아서라도 꿀떡꿀떡 삼켜야 되는데 미칠 거 같아요.
여러분 인간들이 하나님께 내놓는 거룩과 선행이라는 건 그것보다 더 더러운 거예요. 밥숟갈을 뜨는데 언제 먹던 건지 고춧가루, 김칫국물 밥알에 다 묻어 있고. 김치 안에는 언제 쏟아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먹던 밥풀이 퉁퉁 불어갖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데 그거 먹고 싶겠어요? 여러분? 여러분이 하는 선한 행위라고 하나님께 내놓는 거 하나님이 기특해서 받는 것 같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그거 역겨워하세요. 그거 말고 내가 너희에게 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다, 라는 그 감사함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거 말고 딴 거 없어요, 딴 거 없어요.
가끔 우리 아들들이 어버이날 이럴 때 뭐 타겟 이런 데 가갖고 이상한 선물을 하나씩 사갖고 와요, ㅎㅎ. 지 엄마한테 무슨 브로치 이런 거. 그거 안 달로 다녀요. 에? 아니 뭐 어린 애가 아빠 시계 만들어준다고 시계, 뭐 이렇게 그려갖고 주고. 엄마 양말 안 신었네? 양말 그렇게 스티커 붙여갖고 주고 그러면 귀엽고 기특하지만 여러분 그걸 가치 있다고 여기세요? 더러운 옷이라고 했잖아요. 우리의 모든 의가.
그렇다면 그 더러운 의 내놓을 생각마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력한 자인지를 폭로당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드는 자가 되면 거기에서 자기부인이라는 게 일어나고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함이 그의 삶 속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줍지 않은 그러한 착한 삶을 산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 보면은 참 난감해요. 대략난감. ㅎㅎ. 그러니까 그냥 착하게 산 사람들 롤모델 삼아서 저들처럼 살아야지, 해보는 거예요. 왜? 남들이 존경해주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나도 그런 존경받고 싶다는 거예요. 고게 죄에요. 고게 마귀새끼라니까요. 마귀가 하는 일이 그거란 말에요, 여러분. 근데 우리가 그러한 일에 전념, 우리의 삶을 올인해서야 되겠냐고요? 여러분 우리는 다 망치에요, 톱이에요. 그냥 못이에요. 도구에요, 도구.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집을 짓는데 도구로 쓰이는 거예요. 그 집 멋지게 지어놓고 야, 이집 멋있다! 그러지. 그리고 야 이 건축자 누구야? 그러지 아 그 망치 참 가치 있네! 그럽니까? 아 그 톱 참 기특하다.
어제 제가 새로 온 분의 집에 심방을 갔는데 그러더라고요. 이제 예수 믿은 지 며칠 안 되는 분이에요. 그분은. 그러니까 창세기 읽다보니까 이거 뭐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꼭두각시로 만들어놓은 거네요? 이러더라고요, 어저께.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 부인 보고. 꼭두각시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가면 인제 먼지네요? 라는 고백이 나올 거라고. 막 흥분을 해갖고 그러더라고요. 이건 뭐? 꼭두각시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다 하시면서. 우리는 뭐에요? 꼭두각시가 뭐에요? 먼지에요, 먼지. 우리는 꼭두각시도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꼭두각십니까? 정말 저는 그 팔레스 보디스에, 수백만 불짜리 집이에요. 그러니까 코스텀 메이드로 집을 지어놨는데 어떤 지점에서도 바다가 다 보여요. 부엌에서 설거지 하면서도 바다가 보이고 저는 아파튼 줄 알았어요. 너무 커서. 거기 한 열댓 명은 사는 줄 알았더니 둘이 살아요. 거기에다가 진짜 이 스텔스 폭격기, 인공위성 이런 걸 만드는 과학자죠. 나이도 젊어요, 또. 그러니까 모든 걸 소유하고 있고 부러울 게 없는 거예요. 전 세계에서 몇 명 안 되는 또 컴퓨터 전문가고. 그런데 내가 왜 꼭두각시여야 되느냐는 거예요. 나는 다 가지고 있대요. 난 자기 말로 자기가 부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첨 봤어요. 자긴 부자래요, 다 가지고 있대요. 그래서 죽기 싫대요. 그리고, 근데 내가 왜 꼭두각시냐는 거예요. 전 그런 거 못 참아요. 그래서 한 네 시간을 ㅎㅎ 네가 왜 꼭두각신지를 완전히 초전박살을 내놓고 나중에는 인사도 못할 정도로 아주 묵사발을 내놓고 왔는데 고깟 거, 고깟 거 갖고 인간들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었다라고 착각하는 존재에요. 그게 뭡니까? 그게 도대체 뭐에요? 바닷가에 그까짓 거 몇 백만 불짜리 집이, 아니 비행기 타고 내려오면서 엄지손가락으로 LA 다 가릴 수 있어요. 그게 하늘이면 어떻겠어요? 그건 점도 아니에요. 근데 그 중에 고까짓 집 한 채를 갖고 나는 다 가졌다고 이야기하는 게 인간이라니까요. 하나님의 새끼손톱에 있는 먼지로도 다 가릴 수 있는 게 우주에요. 그걸 다 가져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그 현실 그거와 못 바꾸는 거예요. 근데 인간들이 하나님과 맞먹고요 아니 당신이 함께 있으면서 도대체 나를 왜 이런 모양으로 놔 두냐는 둥 왜 나랑 상의 안 하냐냐는 둥 왜 네 의견을 존중하지 않느냐는 둥 이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아예 신앙이라는 걸 다 해체하고 다 뜯어버리라니까요. 여태 배운 것들 이런 것들을 다 뜯어버리고 아예 불태워버리세요. 그리고 다시 쌓아 올라가야 돼요. 인본주의에 물들어서 진짜 기특한 신앙이라고 개혁주의니 뭐니 이래갖고 우리에게 지금 와 있는 것들이 전부 쓰레기란 말입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한 다 쓰레기에요. 좀비들의 세상에서 좀비들이 만들어놓은 그런 가치 신 쫓아다니면서. 또 좀비들이 만들어놓은 도덕과 윤리.
마치 해적선 안에서 자기들끼리 선행도 하고 구제도 하고 그러다 걔네들은 지금 도적질하러 가는 길이거든요. 해적선 안에서 자기들끼리 선행 하는 걸 선이라고 이야기해주나요? 해적들이라고 착한 일 하나도 안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의 신분이 안 바뀐단 말입니다. 아, 이 답답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붙드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은 은연중에 진화론 아니에요. 이러면서 교회가 진화론을 쫓고 있어요. 자기가 더 훌륭하게 진화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내가 진화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게 영향을 주어 세상이 진화될 수 있대, 좀 더 낫게. 그게 역사낙관주의에요. 그게 마귀의 신학이란 말입니다. 근데 내가 진화될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진화되는 게 아니라 나는 소멸되어져 가고 내 안에 있는 예수가 드러난다고 말씀하셔야죠. 근데 어디서 내가 나는 이 정도면 됐어요. 당신은 뭐에요? 신앙이 그 정도밖에 안 돼? 이게 어디서 이런 말이 나와요? 그걸 여러분 불신앙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계속 버려져야 돼요. 진짜로 버려짐이 아니에요, 근데. 버려진다, 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하나였던 적이 있던 사람이라는 전제가 들어 있는 거거든요. 그들만 버려질 수 있어요. 원래 아니었던 건? 하나님 꺼 아니었던 건 뭘 버려요? 하나님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버려짐을 못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버려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침묵과 하나님의 외면하심, 이걸 느낄 수 있는 사람만 하나님과 하나인 사람이에요. 그때에 그걸 느끼면서도 하나님은 나와 하나라는 것을 꼭 붙드는,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이 진짜 작은 예수인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랬잖아요.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렇게 버려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의 삶 속에서. 그게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이거에요. 왜 날 버리세요? 그래놓고 금방 ‘다 이루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둘이 어떻게 화해가 되냐고요? 그러나 이 역설을 이해하는 게 성도란 말입니다. 그게 예수의 삶이었듯이.
그러니 여러분은 버려짐을 자꾸 경험하셔야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놓지 못하는 이 지긋지긋한 사랑은 뭔가? 아, 그렇게 나를 오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그런 사랑. 그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돼요. 그걸 이 땅에서 조금씩 경험하고 가는 게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거 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힘써 아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려고 하지 않아도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가 여러분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로 만드실 거예요.
일단 여러분이 먼저, 일차적으로 신앙생활을 통해 가져야 할 것은 상한 심령이에요. 말씀에 의해서 폭격을 당해 나는 산성수로구나. 몸에 해로운. 그냥 그거 낯짝에나 발라야, 바를 수밖에 없는 가치 없는 존재구나. 알카리는 먹고 산성은 또 바른다며요? 하여튼 그런 거. 그걸 폭로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만 사랑하세요. 그분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면 비로소 여러분이 그분을 머리로 한 교회의 존재, 저, 그 일원이 되는 거예요. 그들을 천국백성이라고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지로 끌려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근데 하나님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내 뜻을 자꾸 관철시키려고 하고 있고
그 나의 기특한 모습을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합의하여 바벨탑을 여전히 쌓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 몇 백 미터 올라가지도 못할 바벨탑을 그토록 미워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 우리 인간은 이 땅에서 그렇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우리의 모습, 너무 역겹습니다.
하나님,
하나님만이 주인이시고 주체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는 그러한 개체임을 잊지 말게 하시고 그 앞에서 더 낮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니까 뭔가 자기를 도덕과 윤리로 근사하게 포장하여 굉장히 자기를 좋은 밭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가면을 확 벗겨서 그 좀비 같은 얼굴을 드러내주는 게 말씀이란 말에요. 시약이라니까요. 똑 떨어트리는, 산성물과 알카리 물이요 맛으로도 구별이 안 가요. 산성물은 뭐 실 거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시약을 떨어트려봐야 아 이거 산성이구나, 알카리구나를 알 수 있어요.말씀이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큰일 날 뻔했구나! 를 깨닫고 그 하나님의 은혜, 그럼에도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임했다고 하니까 그냥 그걸로 감사하는 거.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 저 같은 거 그냥 지옥 보내시지 뭐 하러 그렇게 애를 쓰셔서 아들까지 죽이시면서 저를 구원하셨어요? 라는 면목 없음의 자리까지 내려가는 걸 성도의 성화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자기가 자기를 계발하여 뭐 자기를 굉장히 괜찮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요셉과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셨다, 그래요. 요셉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 그래요. 근데 왜 팔게 만들어요?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는 왜 보내시고.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감옥에는 왜 들어가게 하시냐고요?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며? 아니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까 그냥 뭐 팔고 자시고 이런 거 말고 그냥 좋은 경로를 통해 애굽으로 보내서 거기서 그냥 승승장구하게, 과거에 급제하고 뭐 이렇게 승승장구하게 만들어서 애굽의 총리를 만들 수도 있는 분인데 왜 구차하게 그런 지저분한 일을 다 겪게 해갖고 십년이 넘도록 그냥 종으로 감옥에서 죄인으로 왜 그렇게 살게 만들다가 그 오랜 세월을 거치고 거치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셔서 형들을 구하게 하냐고요?
그런 우리가 모르는 거,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이 우리의 도덕과 윤리, 그리고 우리의 이 상식으로 자꾸 판단하려고 하면 안 돼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 속에서 그냥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여보낼 수도 있어요. 많은 분들이 뭐 하러 이 역사와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고 우리를 여기에다가 집어넣느냐고 그냥 볼멘소리들을 하는데 그냥 선택했으면 하나님 나라로 옮기시지 뭐 하러?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는 헤아릴 수 없다니까요. 왜 요셉을 이년간이나 감옥에다가 넣어놔야 돼요? 아 그것도 그 술 맡은 관원장이 출옥한 이후로도 이년을 더 있었어요. 걔가 나가서 분명히 바로에게 이야기해서 사면시켜준다고 그래놓고 잊어버렸어요. 인간이라는 게 그래요, 원래. 근데 그 이후로도 이년을 더 놔둬, 거기에서 뭘 했다는 소리는 단 한 줄도 안 나와요. 근데 요셉은 이년간 있어야 돼요, 거기에, 그 후로도. 그런데 그게 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지를,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신이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어떠한 대우를 받게 되고 어떠한 해를 입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하나님의 편인 우리에게 경험케 해주시는 거예요. 아주 절절하게. 그러니까 여러분은 사망의 증상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어떤 모습으로라도 다 경험을 하셔야 돼요. 안 그렇고 는 이 세상이나 하나님 나라나 뭐가 달라? 몰라요, 우리는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경험하고 가셔야 돼요. 아주 처절하게.
자,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셨다면 지금 모든 게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거죠? 창세기의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은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으로 보냈고, 하나님이 그 모든 과정을 다 선으로 바꾸셨다, 라고 요셉이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 형들을 방법과 도구로 사용하신 거죠? 물론 그들의 악이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악이 악으로 표출 안 되고 이런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이 형제들이 만약에 요셉을 안 팔았다고 그러면 그 안 판 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천국 갈 수 있나요? 어차피 지옥 가요. 모든 인간은, 그죠? 근데 이 형들의 그 죄악상이 어떤 것인지를 그들이 지금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본전이 무엇인지를 요셉을 팔게 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원래 이 형들의 본전이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그냥 드러내준 거거든요. 하나님이 그들을 이용해서 형들을 팔게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선한 그들을 악한 자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원래 악이라는 건 어떤 행위를 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바로가 모세의 요구를 계속 거절한 게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걍팍하게 했다고 하고 바로가 걍팍해서, 라고도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걍팍하게 했다, 라는 건 그 말이, 착한 바로를 하나님이 걍팍하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 인간은 그렇게 걍팍해요. 걍팍한데 하나님께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 몇 가지 사건들을 이렇게 그들에게 허락하는 거, 이걸 어떻게 죄의 조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냔 말에요? 참 답답한 거예요. 그래요, 유다가 하나님에 의해 예수를 파는 데에 사용이 됐어요. 그러면 유다가 하나님에 의해 예수를 파는 도구로 사용이 안 되고 그냥 예수만 안 팔면 천국 가는 거예요? 어차피 지옥행이란 말에요. 그런데 왜? 우리는 왜 하나님이 유다를 예수를 팔자로 선택해놓고 그를 지옥 보내냐고 그래요. 아니, 원래 지옥 갈 사람을, 원래 니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해주기 위해 그런 일을 허락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로가 걍팍한 모습을 보인 거, 이 형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서 요셉을 판 거. 유다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예수를 판 거, 그 모습을 보면서 야, 하나님은 참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도구로 방법으로 써서 저렇게 악당을 만들 수 있지? 가 아니라 그게 나래요,를 봐야 되는 게 성도란 말입니다. 저는 수시로 예수를 팔 사람이고 저는 내 유익을 위해 누가 노예로 우리 땅에서 내 우리 울타리 안에서 고생을 하든말든 아무런 상관을 안 하는 자이고 저는 언제든지 내 시기와 질투로 동생까지도 팔아먹을 수 있는 존잽니다.를 우리는 거기서 봐야 되는 거지. 건방지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해놓고 어떻게 지옥 보내냐고? 아니에요. 그러니까 참 얼마나 무식합니까? 이 시대 교회가. 그런 거 하나도 해결이 안 되어 있어요. 지금요.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교회에서 가르쳐주질 않고요, 리트머스 시험지를 던지지 않고 그냥 너는 몸에 좋은 알칼리수란다. 늘 그렇게만 배워왔기 때문에 인간들이 기고만장해갖고 이제 하나님은 내 허락 없이는 그런 일을 함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오히려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버렸어요. 왜 내 허락도 안 받고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유기키시냐고. 아 이게 요즘 교회에서 나오는 질문들 아니에요? 예정이 뭐에요? 도대체? 이건 무슨 말이에요? 왜 내 허락도 안 받고 왜 내 상식에 반하는 일을 하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하여튼 말씀에 의해서 부수어지고 부수어지고 완전히 개박살이 나야 그래야 그런 소리 못하는 거예요. 어딜 하나님 앞에서 왜 내 허락도 안 받고 당신 맘대로 일을 하냐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게 진짜 복이거든요. 말씀에 의해서 내가 완전히 해체되고 산산조각이 나야 그래야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납작 엎드리는 자가 되는데 그런 말씀을 전하면요 아, 그냥 가슴이 패이고 너무 아프다고. 너는 얼마나 잘 사나보자, 막 이러질 않나? ㅎ. 참 이거 아주. 어저께 여기 퀸즈, 뉴욕 퀸즈한인 장로교횐가? 그 한 ㅇㅇ 목사가 간 그 교횐가, 거기 부목사가 아마 우리 설교를 계속 듣고 그걸로 청년부 설교를 했나봐요. 고대로 뭐 자기가 실토하더라고요. 그냥 고대로 표절해서 했다고. 설교를 했다고. 그래 저는 잘했다고 그랬어요. 표절이 어딨냐고. 이해가 되어져서 그거를 그거 이상으로 더 보탤 거 없다, 라는 생각에 그냥 했으면 그거 표절 아니다. 당신 거 맞다. 근데 그 설교, 그렇게 몇 개월을 그렇게 설교를 하다보니까 청년들이 하나 둘씩 나가기 시작해갖고 담임목사한테 죽도록 혼나고. ㅎㅎ 거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뉴욕에 있는 어떤 친구가 어, 목사님, 김성수 목사 설교 표절했다고 그랬나봐요. 그래갖고 이제 완전 진퇴양난이. 완전히 표절목사가 되고 거기다가 담임 목사한테 너는 교회 부흥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아주 못된 목사라는 이야기까지 들은 모양이에요. 그래갖고 하소연을 한다고 이제 저한테. 생전 처음 보는 분인데. 나이도 저랑 동갑이더라고요, 보니까
여러분 말씀이 떨어져서 사람들이 이렇게 편안하고 아우 너무 좋아, 막 너무 행복해, 너무 위로가 돼. 그래 우리도 이 세상도 참 살만한 곳이야 아, 이 평안, 이 안식 어쩌면 좋아? 이렇게 되면요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죽는 거예요. 거기에 아골 골짝 쌓이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럴 여유가 없어요. 진짜 평안은 하나님이 내 삶을 폭격해서 내 뜻과 내 비전과 야망과 내 일상, 희망을 다 뺏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 뜻대로 할 수 있어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당신이 쉴 곳이 없으면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뜻을 못 펼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여러분이 어떤 내 인기나 평판을 챙기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꾸 내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려고 하는 그 어떤 시도 그것도 다 추악한 거예요, 그게 다. 여러분 인간은 이 땅에서 소멸이 되어 가는 거예요. 소멸.
제가 어저께 이제 칼럼을 또 쓰면서 어후 그것도 아주 되게 일이에요, 그 칼럼 한편씩 쓰는 것도. 설교를 하라면 하겠는데 그냥 칼럼을 자꾸 쓰라고 그래갖고. 근데 그 칼럼을 쓰려고 딱 앉아가지고 펜을 들었는데 쓸 게 없어요. 그 중앙방송이라는 라디오에서 다 나가는데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게 너무 종교적인 색채를 띠지 말라고. 그러니까 종교적인 색채를 띠지 않고 거기다가 메시지를 넣으려니까 그게 너무 힘들어요. 그래 인제 산에, 제가 등산 가다가 이제 예전에 제가 우리 집에 관악산이고 또 학교가 관악캠퍼스에 있었으니까 관악산에 제가 수시로 올라갔거든요. 산에 다니는 거 되게 좋아했어요. 여기 와갖고 산이 산답지 않아서 별로 안가지만. 산에 올라가다보면 너무 이렇게 마음이 행복해져요, 저는. 그러니까 혼자 늘 가니까. 올라가다보면 그게 인생인 것 같아요, 저는. 올라가다보면 지루하게도 하고 때론 먹먹하기도 하고 때로는 난삽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뭐 고요하다가. 때로는 뭐 높은 골짜기를 또 열심히 기어 올라가야 되고 또 어떤 땐 평지가 나오고 어떤 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고. 어떤 땐 비와 눈이 쏟아지기도 하고 그냥 산을 한번 올라갔다 내려오면 아, 이게 내 인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주 올라갔는데 어느 날 산에 올라갔는데 눈이 와요, 갑자기. 근데 눈이, 봄에 그것도. 관악산에 눈이 오는데 내리자마자 그 눈이 나무에 탁 닿자마자 이게 싹 소멸되어지는 거, 없어지는 거예요. 근데 없어지는데 그 없어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구차하지 않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갖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아주 그냥 천군만마처럼 쏟아져내려오는데 내려오는 즉시 이렇게 싸악, 별 미련 없이 이렇게 소멸되어져가는 모습을 보고 아, 이들이 이렇게 소멸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눈으로 다시 올 수 있는 거예요. 그들이 거기에 집착하여 딱 붙어 있으면 이제 눈은 없는 거예요. 그들이 소멸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소멸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끌려 올라간다는 뜻이거든요. 증발한다는. 그래야 또 다른 눈으로, 새로운 눈으로 쏟아질 수 있는 건데 그들이 난 안 갈 거예요, 딱 붙어버리면? 집착해버리면 또 다른 눈으로 다시 새롭게 올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거기에 붙어 있는 한 이들이 소멸이 되어지면 이게 불멸로 이어지거든요. 왜? 하나님 손에 잡히면 영원히 죽지 않아요. 불멸이에요. 그러니까 진짜 소멸은 불멸을 품고 있는 거예요. 근데 어딘가에 집착을 해버리면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지 못하면 얘는 거기에 머물 수밖에 없어요. 그게 지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에 의해 쭉 빨려 올라갈 수 있는, 소멸되어지는 자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잘난 존재가 자꾸 되려고 하면 안 된다니까요. 근데 뭐 우리가 사람들에게 좋은 일, 착한 일 선한 일 구제, 몇 가지 해놓고 그냥 그것으로 내 가치를 자꾸 챙기려고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그게.
아니 좀비가 좀비에게 밥 한 숟가락 더 떠먹여준다고 그걸 착한 일이라고 하냐고요. 여러분 영화 같은 거 많이 보셨잖아요? 좀비 영화, 강시 영화. 강시들이 콩콩 뛰면서 지들끼리 싸우다가 야, 밥 먹자 그러고 서로 밥을 막 먹여줬어요, 강시가. 그럼 여러분이 강시 영화 보면서 아, 저 강시 참 착하네 저거. 착한 강시. ㅎㅎ. 저건 나쁜 강시. 그러냐고요? 그 시체를. 근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다 죽었어요. 성도만 살았어요. 강시가 강시를 죽인들 그걸 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죄라고 할 수 있냐고요?
그러니까 죄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통용되는 게 아니라 그랬잖아요. 선도 마찬가지에요. 죽은 자가 죽은 자에게 하는 것은 선이 아니에요. 선과 악, 죄라는 개념은 진짜 산자인 하나님과 하나님에 의해 살아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단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살해하는 것을 죄라 그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걸 선이라 그래요.
근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존재는 이렇게 형들이 요셉을 죽여 버린 것처럼 이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처럼 자기를 위해 사는 한, 자기 이외에 다른 존재, 그게 하나님일지라도 형제, 가족일지라도 죽이는 게 죄인인 거예요. 그게 죄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살해하는 모든 행위를 죄라고 하는 것이지. 그리고 하나님께 해드리는, 하나님을 인정해드리는 모든 행위를 선이라고 하는 것이지 인간들 사이에서 여러분이 빵 몇 개 나눠주고 무슨 뭐 촛불 들고 나가서 용산 참사 철거민들을 뭐 그들에게 보상금을 주자. 한 사람 앞에 십 몇 억씩 받았다면서요? 그래서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래요, 교회에서 나서서 십 몇 억씩 받아줬어요. 못 받은 것 보단 나은데 그 십 몇 억을 갖고 그들이 지옥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걸, 그 행위를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냐고요? 근데 왜 촛불 들고 자꾸 어딜 나가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역사의식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니라니까요.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역사의식이 있어야 되지만, 그 역사의식 속에 내가 개입을 하여 내가 뭔가 그들을 나은 삶을, 그들에게 나은 삶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이런 교만, 이게 어떻게 교회와 성도의 삶 속에서 나오냐고요? 도대체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착하고 거룩한 삶을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성도가 이 땅에서 그거 하는 거냐고요?
리트머스 시험지인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큰일 날 뻔했군요!를 깨닫고 가는 거라니까요. 무슨 거룩한 삶을 올려드려요? 어떻게? 내 마음은 여전히 찢어진 똥 걸렌데 그 상태에서 거룩한 걸 하나님이 받으시냐고요? 제가 난곡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 그 아이들 가정방문을 하면 부모들이 대부분 80%이상이 정신 지체에요. 알콜중독 내지는 뭐 못사는데 암 환자는 왜 이렇게 많은지? 위장이 3분의 1밖에 안 남은 그런 사람들. 그런데도 술을 못 끊어요. 그 더럽고 지저분하고 열악한 데에서. 진짜 손바닥만 해요. 손바닥만 한 판잣집 안에 부엌이고 뭐고 다 거기서 써야 되니까. 가면은 꼭 밥을 줘요. 그 한국 사람들의 손님접대. 선생님이 또 왔다 그러니까. 밥을 주는데, 정신지체에다가 알콜중독이된 엄마가. 집안에 딱 들어서는 순간 지린내, 오물 냄새가 코를 찔러서 그냥 토할 거 같애요, 바로. 저는 또 비위까지 약해가지고. 근데 그 손으로 그 그릇에다가 먹던 밥을,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 사람은. 그거 억지로라도 먹어야 돼요. 물 말아서라도 꿀떡꿀떡 삼켜야 되는데 미칠 거 같아요.
여러분 인간들이 하나님께 내놓는 거룩과 선행이라는 건 그것보다 더 더러운 거예요. 밥숟갈을 뜨는데 언제 먹던 건지 고춧가루, 김칫국물 밥알에 다 묻어 있고. 김치 안에는 언제 쏟아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먹던 밥풀이 퉁퉁 불어갖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데 그거 먹고 싶겠어요? 여러분? 여러분이 하는 선한 행위라고 하나님께 내놓는 거 하나님이 기특해서 받는 것 같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그거 역겨워하세요. 그거 말고 내가 너희에게 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다, 라는 그 감사함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거 말고 딴 거 없어요, 딴 거 없어요.
가끔 우리 아들들이 어버이날 이럴 때 뭐 타겟 이런 데 가갖고 이상한 선물을 하나씩 사갖고 와요, ㅎㅎ. 지 엄마한테 무슨 브로치 이런 거. 그거 안 달로 다녀요. 에? 아니 뭐 어린 애가 아빠 시계 만들어준다고 시계, 뭐 이렇게 그려갖고 주고. 엄마 양말 안 신었네? 양말 그렇게 스티커 붙여갖고 주고 그러면 귀엽고 기특하지만 여러분 그걸 가치 있다고 여기세요? 더러운 옷이라고 했잖아요. 우리의 모든 의가.
그렇다면 그 더러운 의 내놓을 생각마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력한 자인지를 폭로당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드는 자가 되면 거기에서 자기부인이라는 게 일어나고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함이 그의 삶 속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줍지 않은 그러한 착한 삶을 산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 보면은 참 난감해요. 대략난감. ㅎㅎ. 그러니까 그냥 착하게 산 사람들 롤모델 삼아서 저들처럼 살아야지, 해보는 거예요. 왜? 남들이 존경해주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나도 그런 존경받고 싶다는 거예요. 고게 죄에요. 고게 마귀새끼라니까요. 마귀가 하는 일이 그거란 말에요, 여러분. 근데 우리가 그러한 일에 전념, 우리의 삶을 올인해서야 되겠냐고요? 여러분 우리는 다 망치에요, 톱이에요. 그냥 못이에요. 도구에요, 도구.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집을 짓는데 도구로 쓰이는 거예요. 그 집 멋지게 지어놓고 야, 이집 멋있다! 그러지. 그리고 야 이 건축자 누구야? 그러지 아 그 망치 참 가치 있네! 그럽니까? 아 그 톱 참 기특하다.
어제 제가 새로 온 분의 집에 심방을 갔는데 그러더라고요. 이제 예수 믿은 지 며칠 안 되는 분이에요. 그분은. 그러니까 창세기 읽다보니까 이거 뭐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꼭두각시로 만들어놓은 거네요? 이러더라고요, 어저께.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 부인 보고. 꼭두각시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가면 인제 먼지네요? 라는 고백이 나올 거라고. 막 흥분을 해갖고 그러더라고요. 이건 뭐? 꼭두각시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다 하시면서. 우리는 뭐에요? 꼭두각시가 뭐에요? 먼지에요, 먼지. 우리는 꼭두각시도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꼭두각십니까? 정말 저는 그 팔레스 보디스에, 수백만 불짜리 집이에요. 그러니까 코스텀 메이드로 집을 지어놨는데 어떤 지점에서도 바다가 다 보여요. 부엌에서 설거지 하면서도 바다가 보이고 저는 아파튼 줄 알았어요. 너무 커서. 거기 한 열댓 명은 사는 줄 알았더니 둘이 살아요. 거기에다가 진짜 이 스텔스 폭격기, 인공위성 이런 걸 만드는 과학자죠. 나이도 젊어요, 또. 그러니까 모든 걸 소유하고 있고 부러울 게 없는 거예요. 전 세계에서 몇 명 안 되는 또 컴퓨터 전문가고. 그런데 내가 왜 꼭두각시여야 되느냐는 거예요. 나는 다 가지고 있대요. 난 자기 말로 자기가 부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첨 봤어요. 자긴 부자래요, 다 가지고 있대요. 그래서 죽기 싫대요. 그리고, 근데 내가 왜 꼭두각시냐는 거예요. 전 그런 거 못 참아요. 그래서 한 네 시간을 ㅎㅎ 네가 왜 꼭두각신지를 완전히 초전박살을 내놓고 나중에는 인사도 못할 정도로 아주 묵사발을 내놓고 왔는데 고깟 거, 고깟 거 갖고 인간들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었다라고 착각하는 존재에요. 그게 뭡니까? 그게 도대체 뭐에요? 바닷가에 그까짓 거 몇 백만 불짜리 집이, 아니 비행기 타고 내려오면서 엄지손가락으로 LA 다 가릴 수 있어요. 그게 하늘이면 어떻겠어요? 그건 점도 아니에요. 근데 그 중에 고까짓 집 한 채를 갖고 나는 다 가졌다고 이야기하는 게 인간이라니까요. 하나님의 새끼손톱에 있는 먼지로도 다 가릴 수 있는 게 우주에요. 그걸 다 가져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그 현실 그거와 못 바꾸는 거예요. 근데 인간들이 하나님과 맞먹고요 아니 당신이 함께 있으면서 도대체 나를 왜 이런 모양으로 놔 두냐는 둥 왜 나랑 상의 안 하냐냐는 둥 왜 네 의견을 존중하지 않느냐는 둥 이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아예 신앙이라는 걸 다 해체하고 다 뜯어버리라니까요. 여태 배운 것들 이런 것들을 다 뜯어버리고 아예 불태워버리세요. 그리고 다시 쌓아 올라가야 돼요. 인본주의에 물들어서 진짜 기특한 신앙이라고 개혁주의니 뭐니 이래갖고 우리에게 지금 와 있는 것들이 전부 쓰레기란 말입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한 다 쓰레기에요. 좀비들의 세상에서 좀비들이 만들어놓은 그런 가치 신 쫓아다니면서. 또 좀비들이 만들어놓은 도덕과 윤리.
마치 해적선 안에서 자기들끼리 선행도 하고 구제도 하고 그러다 걔네들은 지금 도적질하러 가는 길이거든요. 해적선 안에서 자기들끼리 선행 하는 걸 선이라고 이야기해주나요? 해적들이라고 착한 일 하나도 안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의 신분이 안 바뀐단 말입니다. 아, 이 답답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붙드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은 은연중에 진화론 아니에요. 이러면서 교회가 진화론을 쫓고 있어요. 자기가 더 훌륭하게 진화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내가 진화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게 영향을 주어 세상이 진화될 수 있대, 좀 더 낫게. 그게 역사낙관주의에요. 그게 마귀의 신학이란 말입니다. 근데 내가 진화될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진화되는 게 아니라 나는 소멸되어져 가고 내 안에 있는 예수가 드러난다고 말씀하셔야죠. 근데 어디서 내가 나는 이 정도면 됐어요. 당신은 뭐에요? 신앙이 그 정도밖에 안 돼? 이게 어디서 이런 말이 나와요? 그걸 여러분 불신앙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계속 버려져야 돼요. 진짜로 버려짐이 아니에요, 근데. 버려진다, 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하나였던 적이 있던 사람이라는 전제가 들어 있는 거거든요. 그들만 버려질 수 있어요. 원래 아니었던 건? 하나님 꺼 아니었던 건 뭘 버려요? 하나님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버려짐을 못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버려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침묵과 하나님의 외면하심, 이걸 느낄 수 있는 사람만 하나님과 하나인 사람이에요. 그때에 그걸 느끼면서도 하나님은 나와 하나라는 것을 꼭 붙드는,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이 진짜 작은 예수인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랬잖아요.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렇게 버려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의 삶 속에서. 그게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이거에요. 왜 날 버리세요? 그래놓고 금방 ‘다 이루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둘이 어떻게 화해가 되냐고요? 그러나 이 역설을 이해하는 게 성도란 말입니다. 그게 예수의 삶이었듯이.
그러니 여러분은 버려짐을 자꾸 경험하셔야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놓지 못하는 이 지긋지긋한 사랑은 뭔가? 아, 그렇게 나를 오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그런 사랑. 그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돼요. 그걸 이 땅에서 조금씩 경험하고 가는 게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거 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힘써 아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려고 하지 않아도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가 여러분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로 만드실 거예요.
일단 여러분이 먼저, 일차적으로 신앙생활을 통해 가져야 할 것은 상한 심령이에요. 말씀에 의해서 폭격을 당해 나는 산성수로구나. 몸에 해로운. 그냥 그거 낯짝에나 발라야, 바를 수밖에 없는 가치 없는 존재구나. 알카리는 먹고 산성은 또 바른다며요? 하여튼 그런 거. 그걸 폭로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만 사랑하세요. 그분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면 비로소 여러분이 그분을 머리로 한 교회의 존재, 저, 그 일원이 되는 거예요. 그들을 천국백성이라고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지로 끌려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근데 하나님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내 뜻을 자꾸 관철시키려고 하고 있고
그 나의 기특한 모습을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합의하여 바벨탑을 여전히 쌓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 몇 백 미터 올라가지도 못할 바벨탑을 그토록 미워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 우리 인간은 이 땅에서 그렇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우리의 모습, 너무 역겹습니다.
하나님,
하나님만이 주인이시고 주체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는 그러한 개체임을 잊지 말게 하시고 그 앞에서 더 낮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