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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재집에 실려 있는 한문 원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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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병서: (원본: 임연재집 출처:백죽문향 (裵三益 墓碣銘)/ 2018.01.15. 月菴 裵珍燮 飜譯
저자: 李廷龜 (1564 명종9 ~ 1635 인조13) 號: 月沙 /資憲大夫/中樞府事(37줄x42자+8=1,562字)
裵系出興海麗之季有諱尙志判僕寺事與中書郞抗禮不屈脫幘南馳諭嶺隱居于安東之金溪村種柏與竹名其堂以見志入本朝不仕以終卽麗朝益佐命功臣三重大匡僉議平理興海君詮之子典理判書平壤尹榮至之孫檢校將軍景分其鼻祖也生四男幷貴顯遂爲安東世族長曰權司憲府持坪生孝長孝長生袵卽公高祖曾祖諱以純成均進士贈左通禮祖諱巘成均生員贈左承旨考諱天錫忠佐衛副司果贈兵曹參判同知義禁府事皆以公貴參判聚迎日鄭氏處士世豪之女生公於嘉靖甲午諱三益汝友字也幼雋穎不凡年十一從參判公遊學京師人見者咸稱其偉器拜退溪先生受心經詩傳得聞僞學之方戊午中司馬甲子釋褐辛未自成均博士例陞戶曹佐郎癸酉丁外艱服除拜禮刑曹佐郎正郎夏以定言召幷辭疾不赴授豐基郡守秩滿歸鄕除安東縣監以本官辭復除襄陽府使癸未徵拜掌令自是朋遊益附歷敭華要於諫院爲正言獻納司諫者各二於憲府再爲掌令於成均再爲司藝司成一爲直講典籍以公文學宜在經幄遂自薇垣選入玉堂爲修撰副校理乙酉冬以司諫擢陞同副承旨至左副明年遞爲判決事俄長國子監又明年銜命朝京購得會典宗系條初本以進上下書獎之曰使予知已雪先王之累特賜內廏馬俄拜右承旨病甚辭遞海西饑擇方伯朝廷李爲非公莫可遂起公爲觀察使人或勸之辭公慨然曰臣起草萊榮位至此上憂民飢敢言病乎遂輿疾而行至卽悉棄倉實與民活事之有利病於民者施罷不竟日民賴以蘇以公瘁病日劇戊子五月上章辭上行其逾以卒惠民不允閏유月又辭乃許道卒靑丹驛得年五十五疾比薨朝中知舊日發書問訊比葬弔賜賻祭使者相及又命沿路官庀以其年시月卜葬于府北乃城縣虎崖之山先參判瑩後辰坐兌向原從治命也公天性至孝穉年喪母夫人庶母待小恩參判公將逐之公爲作詩書座隅冀以感悟不果逐其居參判公之喪哀有過而禮不逾廬于墓側三年一不下家治殮葬奉祭祀一出於己不以累弟妹及喪畢分産乃以所分田歸庶母以耕食友諸弟睦宗姻好班施不立資由由是處約以終其世平居以禮法自飭總僚友之戚輕重各盡其制家廟祭式悉革俗習時節朔望出告反面之禮至老如一日待子弟嚴以有禮不敢以華衣美食見常戒見朝報曰爲士者當讀書求志與聞朝政非爾事也在海西病且革子弟勸進牛肉以補虛羸公厲色卻之曰持一方之憲而敢自蹈乎居官斬斬人不敢干以私爲治以敦風厲俗爲先束吏寬民爲務不屑屑於末節嘗以修邊幅取聲譽爲湥恥故未嘗察也而吏不敢欺未嘗孟也而民不敢犯罷羸以逸疵蠹盡袪在豐基將籍歲逋負文簿悉令塗之官壁曰非不知聚民以焚之棄有用以取虛名吾不爲也襄陽俗右鬼多淫祠公悉撤以焚之如祀典所當祭則必虔誠躳執事雖風雨不廢故水旱災厲凡有禱必應民夢其惠海西多斥鹵始載寧守朴忠侃建請設堰屯田人病歲築而又取盈以衒能民皆稱貸而充之怨聲載路公之按廉卽驛聞陳弊監穫平分民治安焉理荒政纖悉有條晝夜焦勞病亟猶不懈子弟勸歸公曰何必死於妻子之手乎吾旣委質於朝死於職職也況死生有命雖遞職可逃命乎至死諄諄惟國事無一言及家私在臺省論事愼重不以利害動其中宋祀連誣告賢相安瑭誅陷主家其子翰弼等交結名流安氏子孫抗憤庭訟弱不能申人皆規避不斷公卽啓削冒勳而快之輿情咸快樂善愛人襟次坦然酒酣輒高歌朗詠音調淸越爲文章以溫婉爲主雖不役志大肆而語或驚人筆法遒勁尤逼古人作者貞夫人南氏處士藎臣之女參判敏生六代孫也生二男二女長曰龍吉擢文科選內翰今爲忠淸都事次曰龍弼早死女長適士人李惟聖生一男一女男曰壽豊女適張雲翰次適李逈側室子常吉孫男淑全澤全潤全女爲生員金准妻道事與余同年友也懷奇負才不能隨人後年五十尙栖遲幕佐然人皆曰裵氏有子夜嘗聞位不滿德者後必昌吾於是乎徵銘曰裵遷永嘉粤自高麗颺于嶺裔柏竹風高翩然遠逝家聲世繼叢而未稔篤生俊藝克紹其系積之于庭惟孝悌乃乃儀于世邇列攸鶱外庸或滯罔不砥礪義震周行澤流輿衛聲華以揭上軫西饑公往乃濟蘇枯剗弊惟誠益篤惟疾不憩載勞而勩人曰公歸公逾自勵矢爲國斃西民攀泣曰篤遺惠理不浹歲年虧位窒半途以稅謂天或泥虎崖之陽曰協龜筮佳城載閉未艾報惟後是逮若符左契最迹貞珉爲示無替我言匪贅 (1,562字) 資憲大夫知中樞府事 月沙 李廷龜 撰
배씨는 흥해인에서 그 계보가 나왔다. 고려조 말에 배상지(백죽당)라는 분이 판사복사사로 있으면서 증서랑과 예에 대한 의견을 굽히지 않다가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말을 달려 죽령을 넘어 안동 금계촌(외가)에 은거하여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백죽(불사이군-절개)이란 당호를 지어 선비 정신의 의지를 드러내 보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마쳤으니, 그가 바로 고려말의 익대좌명공신 삼중대광 첨의평리를 역임한 흥해군 배전의 아들이다. 전리판서와 평양윤을 지낸 배영지의 손자이며, 검교장군 배경분은 그 시조이다. 배상지는 4남을 낳았는데 모두가 귀하고 현달하여 드디어 안동지방의 세족이 되었다. 장남 배권은 사헌부 지평으로 배효장을 낳았고,배효장은 배임을 낳았으니, 바로 공(백죽당 배상지)의 고조이다. 증조 배이순은 성균관 진사(증 좌통례)이고, 조부 배헌은 성균관 생원(증 좌승지)이고, 부친 배천석은 충좌위부사과(증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이니, 모두 공으로 인해 증직(사후에 벼슬을 하사받음)된 것이다.
참판공(배천석)이 연일 정씨 처사 정세호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가정 갑오년(1534, 증종29)에 공을 낳으니, 휘는 삼익이요 여우가 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俊潁준영)하고 비범하여 11세에 부친 참판공을 따라 한양에서 유학했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퇴계선생을 배알하여 심경(송나라 진덕수 지음), 시전(시경을 풀이한 책)과 배움의 도리를 배웠다.
무오년에 사마시(戊午年, 1558년 명종 13년)에 입격하고 갑자년(1564년)에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가고(석갈), 신미년(1571,선조4)에 성균관 박사를 거쳐 관례에 따라 호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계유년(1573)에는 부친(참판공 배천석)의 사망으로 상기(복입기,1575년)를 마치고, 예조와 형조의 좌랑 · 정랑, 여름에는 정언으로 소명을 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풍기군수에 제수되어 임기(5년)를 마치고 귀향했는 데, 공이 태어난 안동현감을 제수받자 고향이라는 이유를 들어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양양 부사(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에 명을 받고 장령에 제수되었다. 이때부터 따르는 벗들이 더욱 많아지고 요직을 역임하여 사간원에서는 정언 · 헌납 · 사간이 된 것이 각각 두 차례씩이고 사헌부에서는 두 차례 장령이 되었고 성균관에선 두 차례씩 사예 · 사성이 되고 한 차례 직강 · 전적이 되었다. 공의 학문으로 보아서는 의당 경악(경연)에 있었으며 드디어 사간원(薇垣)을 거쳐 옥당에 선발되어 수찬부교리가 되었다.
을유년(1585, 선조18) 겨울에는 사간으로 있다가 동부승지로 승진 발탁되어 좌부승지에 이르렀으며, 그 이듬해에 전임(체직)되어 판결사가 되었다. 이후 바로 성균관(국자감) 대사성이 되었고, 다음 해에 어명을 받고 북경에 가서 대명회전의 종계조의 초본(초안)을 구하여 선조께 바치니, 왕이 글을 내려 칭찬하기를, “나로 하여금 선왕의 허물이 이미 씻겼음을 알게 하였다.”하고 특별히 내구마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우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이 심하여 사직하였다. 해서(황해도)에 번갈아 기근이 들어 방백(관찰사)을 선임할 때 조정에서 모두 공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여 드디어 관찰사로 기용하였다. 혹자가 공에게 (병으로)사양하라고 권하자 공은 개연히 말하기를, “신하가 초야에서 일어나 영광과 지위가 여기에 이르렀고, 왕이 백성들의 기근을 근심하시고 계시는 이때 신하가 어찌 감히 병을 핑계 댈 수 있겠는가.”하고는 드디어 병든 몸으로 수레를 타고 순행을 나섰다. 공은 부임하자 창고의 곡식을 모두 내어서 구활하니 백성들이 살아났다. 백성들에게 도움되는 것은 행하고 손이 되는 것은 피하니, 하루도 못 되어 백성들이 믿고 그 덕분에 소생하였다. 그러나 공의 병은 날로 심해져 무자년(1588) 5월에 사직을 상소하였으나 선조는 행여 공의 병이 나아 백성들에게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고 윤허하지 않다가 윤6월에 재차 사직하자 그제야 윤허하였다. 체직되어 돌아오는 도중 청단역에서 병으로 운명하니, 향년 55세였다. 조정의 지인(친구,친척)들이 날마다 서신을 보내 장례를 준비하고, 조문과 제사 준비를 위해 조정에서 일꾼들이 내려졌다. 또 연도의 지방관들에게는 장례일행을 보살피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그해 10월에 경상도 북쪽 내성현 호애산(호골산), 선친 참판공의 묘소 뒤 진좌태향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공의 유언을 따른 것이다.
공은 타고난 효성이 지극하엮고. 어릴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한 뒤 서모가 섭섭하게 대하자 참판공이 서모를 쫓아 내려 하였다. 공이 참판공의 마음을 돌리고자 시를 지어 거실벽에 붙여 두니 과연 참판공이 서모를 쫓아내지 않았다. 참판공의 상중에 슬픔은 끝이 없었으나 예의법절은 한도를 넘지 않았으며, 묘소 곁 여막에서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내려 온 적이 없었으며 염습과 장례, 제사 등의 비용을 모두 공이 주선하여 아우와 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상기를 마치고 재산을 나눌 때에는 서모에게 자기 몫의 전답을 줘서 경작하여 생활2할 수 있게 하였다. 형제와 우애롭고 친척 종친과 화목하였으며 항상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평생을 검소하게 마쳤다. 평소 생활에서는 예법으로 자신을 훈계하고 친척과 동료들의 경조사에는 그 경중에 따라 극진히 하였으며 종묘와 제식에는 나쁜 습속을 모두 혁파하고 삭망 때가 되면 출입할 때 마다 문안을 여쭈는 예절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하루 같았다. 자제들을 대함에는 엄하고도 예법이 있어 감히 화려한 옷과 좋은 음식을 보이지 않았으며 늘 조정의 소식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선비는 당연히 책을 읽고 자신을 뜻을 구해야지 조정의 정사에는 너희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하였다.
해서(황해도)에 있을 때 병이 위중하자 자제들이 쇠고기로 허약한 원기를 보충할 것을 권하니, 공이 노기를 띠고 물리치며 말하기를, “한 지방의 법을 맡은 자로서 감히 스스로 법을 어기란 말인가?”하였다. 관직 생활에는 의리가 분명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청탁을 못하였고 백성을 다스릴 때는 기풍을 순후하게 하고 백성을 면려하는 것을 우선하고, 아전들을 관용으로 검속하고 백성이 편안하도록 힘썼으며 하찮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늘 겉모습을 꾸며 명예를 얻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세세히 규찰하지 않아도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고 애써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백성들이 감히 범법하지 못하였으니, 이에 피로한 백성들이 편안해지고 모든 병폐(허물)들이 없어졌다. 풍기에 있을 때 여러 해 쌓인 포흠장부(체납세금장부)를 죄다 뜯어서 관청 벽에 도배를 하고 말하기를, “백성들을 모아 놓고 이 장부를 불사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유용한 것을 버려서 헛된 명예를 얻는 짓을 하지 않는다.”하였다.
양양의 풍속은 귀신을 숭상하여 귀신을 모신 사당들이 많았는데 공이 모두 철거하여 불태웠다. 그러나 祀典에 올라 있는 정당한 제사에는 몸소 경건하게 제사를 지냈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제사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홍수와 가뭄, 재해와 돌림병 등이 있을 때 공이 기도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어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 해서에는 척로(소금기 먹은 땅)가 많은데 당초에 재령의 수령 박충간이 건의하여 제언을 쌓고 둔전을 만들게 되니 백성들은 해마다 둑을 쌓느라 고생하였다. 게다가 능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관리들이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이니, 백성들이 모두 이자를 주고 곡식을 빌려서 세금에 충당해야 할 판이라 원성이 자자하였다. 공이 이 지방에 관찰사로 와서는 살펴보아, 즉시 그 폐단을 없애고 수확을 감찰하여 공평하게 분배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그리고 황정을 처리할 때에는 조목조목 섬세하게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며 병이 위중해도 부지런히 일하니, 자제들이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자 공이 말하기를, “처자식의 손에 죽을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이미 조정에 몸을 맡겼으니, 직분에 죽는 것이 직분이다. 더구나 생사는 운명에 달린 것이니, 체직된다 하더라도 운명을 피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죽음에 이르러도 오직 국사를 말하고 집안일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성(사간원과 사헌부)에 있을 때는 논사가 신중하여 이해 관계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송사련이 어진 재상 안당을 무고하여 자신의 주인 집안을 주살케 하고, 송씨의 아들인 송한필등이 명문가들과 친분을 맺고 사귀었다. 이에 안씨 자손이 분노하여 조정에 항소하였으나 세력이 미약하여 이길 수 없었다. 이때 사람들은 모두 책임을 회피하고 과감히 나서지 못하였는데 공이 즉시 모훈을 삭탈할 것을 주청하여 결정되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이 일로 인하여 송씨 집안은 노비로 환천되었다)
공은 백성의 동정엔 정성스럽고, 善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마음이 너그럽고 술이 취하면 곧잘(문득)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 음조가 맑게 울려 퍼졌다. 문장을 지을 때는 온후하고 완곡한 것을 위주로 하여 비록 애써 공력을 들이지는 않아도 혹 사람을 놀라게 하는 구절들이 있었다. 필법은 힘차고 굳세어 더욱 너그러우니 옛날의 명필가 수준에 가까웠다.
정부인 남씨는 처사 신신의 따님이요 참의 신민생의 6대손으로, 2남2녀를 낳았다. 공의 장남 배용길은 문과에 급제하여 내한에 선임되었고 지금 충청도 도사로 있으며, 차남 용필은 어려서 죽었다. 장녀는 선비 이유성에게 출가하여 아들 이수풍을 낳았고, 그 장녀와 차녀는 張雲翰과 李逈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공의 손자로는 숙전, 택전, 윤전을 두었다. 손녀는 생원 김준에게 출가하였다. 충청도 도사인 배용길은 나(李廷龜)와 동방급제(함께 과거급제)한 벗으로써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니, 남의 뒤나 따르는 것을 탐탁잖게 여겨 나이 쉰에도 외직(지방관료)의 막좌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배씨는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라고 했다. 일찌기 듣건대, “지위가 덕에 차지 못하는 사람은 후손이 반드시 창성한다.” 하였는데, 나는 여기에 이 말을 징험하며 비명을 쓰니 다음과 같다.
배씨가 영가로 이주한 것은/裵遷永嘉 (영가=안동옛이름)
멀리 고려 말엽 때였는데/粤自高麗
영남에서 그 명성 떨쳤어라/颺于嶺裔
백죽당의 기풍이 드높다가/柏竹風高
훌쩍 조정을 떠나 은거하니/翩然遠逝(나부낄편,훌쩍날다)
집안의 명성 대대로 이어졌네/家聲世繼
음덕을 쌓고 결실을 못 보다가/叢而未稔(익을임)
준수하고 탁월한 후손 낳으니/篤生俊藝
능히 그 집안의 계통을 이었도다/克紹其系
가정에서 쌓아 온 것은/積之于庭
오직 효제의 덕목이었으니/惟孝悌乃(생각유,공손할제)
이에 세상에 모범이 되었어라/乃儀于世
근신의 반열에 우뚝 섰고/邇列攸鶱(가까울이,훨훨날 건)
외직의 자리에도 머물렀는데/外庸或滯
언제나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했지/罔不砥礪(숫돌)
의리는 조정 반열에서 떨쳤고/義震周行
은택은 미천한 사람에 미쳤으니/澤流輿衛
명성이 이에 높이 솟았도다/聲華以揭
왕께서 해서의 기근 걱정하시자/上軫西饑(슬퍼할진)
공이 그 지방에 가서 구제하니/公往乃濟
백성이 소생하고 폐단이 없어졌네/蘇枯剗弊(마를고,벨/다르릴잔)
정성은 더욱 돈독하여/惟誠益篤
병환 속에서 쉬지 않아/惟疾不憩
노심초사 정사에 애를 썼네/載勞而勩(지칠예,수고로울예)
중병에 사람들은 쉬하고 말했으나/人曰公歸
공은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公逾自勵(더욱/넘을유)
나라를 위해 죽으리라 맹세했네/矢爲國斃(맹세할시)
해서의 백성들 흐느끼면서/西民攀泣(매잡을반, 끌어잡을반)
그토록 우리 보살피느라 애쓰셨으니/曰篤遺惠
한 해도 못 넘기시는 건 당연하다 했지/理不浹歲(퍼지나,두루미칠협,잦다)
천수도 못 누리고 지위도 높지 않은 채/年虧位窒
중도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半途以稅(稅:수의입다,죽다)
하늘의 도가 혹 막힌 것은 아닐까/謂天或泥
저 호애산 남쪽 기슭이/虎崖之陽
좋은 무덤의 터라/曰協龜筮(점칠다)
여기에 공을 안장하였네/佳城載閉
다 누리지 않은 음덕은/未艾之報(쑥,늙은이, 보답할애)
후손의 대에 발복하느니/惟後是逮
그 이치 부적처럼 틀림이 없어라/若符左契(약속의증거)
이에 비석에 그 행적을 새겨서/最迹貞珉
무궁한 후세에 보이노니/爲示無替(시들체)
이는 나의 틀림 없는 말이오/我言匪贅(혹,근더더기췌, 모을췌)
-끝-資憲大夫知中樞府事 月沙 李廷龜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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