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
하스모네아 왕조의 통치 종식
(기원전 76~63년)
39.1 알렉산드라 살로메의 통치(기원전 76~67년).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히르카노스 2세로 교체되다
(기원전 67~66년)
알렉산드로스 얀네오스가 죽자 아내 알렉산드라 살로메가 왕위를 넘겨받았고 반면 장남 히르카노스 2세는 대사제가 되었다. 남편의 유지에 따라 알렉산드라 살로메는 바리사이들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폈다. 그러는 동안 셀레우코스왕국은 종말을 맞이했다. 마지막 왕 안티오코스 13세는 로마로 피신했고,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는 시리아 전체와 코일레 시리아를 장악하여 프톨레마이스까지 이르렀다(기원전 83~69년). 그곳에서 알렉산드라 살로메 여왕은 유다인들의 왕국에 대한 국권과 그 지배권을 인정받기 위해 티그라네스를 만났다. 티그라네스는 소아시아에서 동쪽으로 진군하는 로마군을 대적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사실 로마는 폰토스(현재의 터키에서 흑해 남쪽 연안 지역)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를 무찌르고 아르메니아 왕과 연합했으므로 알렉산드라 살로메의 왕국은 평화롭고 번창했다. 그녀가 죽자 대사제였던 히르카노스 2세가 왕이 되었으나 겨우 석 달간 통치했다. 알렉산드로스 얀네오스의 다른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사두가이들의 군대와 아버지의 정책을 지지하던 이들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요새 알렉산드레이온을 떠나 예리코에서 히르카노스 2세의 군대를 무찌르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를 포위했다. 히르카노스는 항복하여 모든 직위를 박탈당했다. 반면 아리스토불로스 2세(기원전 67~63년)는 대사제직과 왕위를 차지했다.
39.2 안티파트로스와 아레타스 3세의 개입. 폼페이우스의 대리인 스카우루스가 아리스토불로스를 합법적 왕으로 인정하다
(기원전 65년)
유다교로 개종한 이두매아인으로서 하스모네아왕조의 봉신으로 이두매아를 통치하던 안티파트로스가 히르카노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국을 재정복하라고 부추겼다. 페트라에 거주하던 나바태아인들의 왕 아레타스 3세와도 연합했다. 안티파트로스와 아레타스 3세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에게 승리를 거두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로마인들에게 해결을 요청했다. 로마인들은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에게 승리를 거둔 다음 잠시 동안 시리아의 왕좌에 안티오코스 13세를 다시 앉혔다(기원전 69~65년). 그러다가 그 지역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고 무법천지가 되자 집정관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4년 시리아를 로마제국에 병합하기로 결정했다(시리아 지역은 기원전 62년에 로마의 속주로 다시 조직되었다). 그래서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폼페이우스의 대리인이며 다마스쿠스에 있던 재무관財務官 스카우루스에게 문의했다. 스카우루스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고 아레타스 3세와 안티파트로스는 자신들이 보호하던 히르카노스 2세와 함께 철수해야만 했다. 로마인들이 모두 떠나자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히르카노스 2세와 아레타스 3세를 추적하여 파피론에서 참패를 안겨 주었다. 파피론의 위치는 고대 모압의 영토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파피론은 민수기 21장 14절과 신명기 1장 1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수프Suf의 그리스어 번역인 듯하다.
39.3 히르카노스 2세가 폼페이우스의 개입을 촉구하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결국 왕국을 포기하다.
예루살렘 포위와 유다 독립의 종말(기원전 63년)
스카우루스의 결정에 승복하지 못한 히르카노스 2세는 폼페이우스에게 직접 호소했다(기원전 64년). 두 경쟁자와 그 둘 모두에게 싫증을 느낀 유다인들의 대리인이 다마스쿠스에서 함께 만났는데,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가 로마의 왕권에 속하면서도 내부 통치는 예루살렘 사제들에게 맡겨지기를 원했다. 폼페이우스는 이 문제를 보류하기를 원했다. 나바태아인들에 대한 원정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폼페이우스를 따라갔다. 원정대가 디움에 도착했을 때,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그를 버리고 알렉산드레이온으로 피신했다. 로마인들은 이를 적대적 행위로 간주했다. 폼페이우스는 펠라를 점령하고 요르단 강을 건너 스키토폴리스(벳 스안)와 더 남쪽으로 코레아이를 점령했는데, 그곳에서 멀지 않은 산 정상에 알렉산드레이온(오늘날의 카른 사르타베Qarn Sartabe)이 건설되어 있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예루살렘으로 도망갔고 폼페이우스는 계속 진격하여 예리코를 점령했다. 결국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항복을 교섭했으나 수도 예루살렘 주민은 항복을 거부하고 석 달간 공격을 버텼다. 그다음 로마인들은 공세를 몰아붙였다. 성스러운 건물들을 존중했던 폼페이우스는 지성소를 살펴보았는데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주장하며 성상에 대한 공경을 거부했던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노스 2세를 대사제와 영주(나라의 지도자)로 인정했지만 왕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뿐 아니라 하스모네아왕조의 영토에서 온전히 유다화되지 않은 지역들을 분리시켰는데, 이집트 국경에서 카르멜까지의 전체 해안 지역(시리아 속주에 편입되었다), 사마리아와 스키토폴리스, 펠라, 요르단 강 건너편 다른 도시의 관할구역들이다. 영주 히르카노스 2세에게 남은 것은 유다, 이두매아의 동편, 갈릴래아, 남쪽으로 펠라에서 마카이루스(마케루스) 요새와 아르논 강에 이르는 띠 모양의 좁은 영토로 한정된 페레아(요르단 강 건너편 지역)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아들들과 함께 로마에 볼모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유다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