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인문학회 권보옥 수필가님이 2023 호미문학대전에서 ‘흑구문학상 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기사원문] 2023 호미문학대전 수상작 발표…황진숙씨 ‘흑구문학상 대상’ 수상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 (kyongbuk.co.kr)
[2023 흑구문학상 동상]
띠 / 권보옥
햇살을 타고 앞산이 베란다에 들어선다. 어깨를 맞댄 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지붕을 닮았다. 하늘과 맞닿은 능선은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눈이 닿지 않는 곳에는 지층의 띠가 산허리를 단단히 묶고 있을 것 같다. 띠는 서로를 흩어지지 않게 다잡아줄 것이다.
철지난 옷가지를 꺼내어 정리한다. 밑바닥에 누워있던 푸른 누비포대기가 손목을 잡는다. 고름이 돌돌 말려있다. 기억의 곳간에서 지난 일들이 성큼 다가온다. 동산만한 배를 안고 처네를 사러갔다. 아들이라는 의사의 암시에 푸른색을 펼쳐보았다. 온기가 보송보송하게 누빈 골을 따라 손끝으로 전해왔다. 손바닥에 감기는 포대기에서 쌔근거리는 숨결이 아늑하게 들리는 듯했다.
솜털이 오종종한 아들을 업고 처네로 감쌌다. 처네 끝자락의 긴 띠를 앞뒤로 돌려 단단히 묶었다. 뛰어도 흘러내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몸처럼 밀착한 아들의 작은 심장이 내 등 위에서 콩닥거렸다. 세상을 향한 생명의 숨결에 내 가슴도 쿵덕거렸다. 두 고동은 어느새 아름다운 화음으로 너울거렸다. 처네의 긴 띠는 엄마와 아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함께 묶어주었다.
띠(帶)는 좁고 얇아서 뭉치면 한 손아귀에 들어온다. 펼쳐서 사용할 때는 접혀 있을 때와는 달리 의외로 강하다. 양 끝자락을 엮어 두어 번 매듭을 지우면 그 때는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무거운 물건을 들 때도 띠로 묶으면 든든하게 버틸 수 있다. 두 물체를 동여맬 때 띠로 둘러싸면 여간해서 잘 떨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붙어있다.
띠의 종류는 다양하다. 물건을 묶을 때뿐만 아니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해주는 머리띠, 운전자를 보호해 주는 자동차 안전띠가 있다. 띠 중 의복과 가장 관련이 있는 것은 아마도 허리띠가 아닌가 싶다.
‘한국의 허리띠, 끈과 띠’특별전을 본 적이 있다. 허리띠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실물과 화보로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허리띠는 아랫도리를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다양한 의미로 다가왔다. 왕의 허리띠와 드리개는 위엄을, 태권도에서의 띠는 기술과 연륜을, 관복의 띠는 품계와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전시장을 돌면서 젊은 날의 허리띠 하나가 내 몸을 휘감는다.
친구의 허리띠가 아주 근사해 보인다. 넓고 화려한 무늬, 바클이 손등만 한 게 멋진 챔피언 벨트 같다. 멋진 허리띠로 삶의 승리자라도 된 듯 그녀의 걸음은 활기차다. 얼굴에 가득한 생기와 자신감이 부러웠다. 비슷한 허리띠를 하나 마련했다. 찰랑거리는 고리의 추임새에 기운이 솟았다. 며칠이 지난 뒤 남의 허리띠를 걸친 듯 부자연스러웠다. 무게감으로 허리가 짓눌리고 멋진 장식들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벗어버린 허리에 나에게 어울리는 좁고 가벼운 띠를 맸다. 모든 허리띠가 누구에게나 다 어울리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몸에 맞는 허리띠는 매무새를 단정하게 할 뿐 아니라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 준다. 체격에 맞지 않거나 부담스러운 띠는 허리를 옥죄고 행동까지 불편하게 만든다. 근무를 할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가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치솟는 물결은 날 선 나의 허리띠를 무참히 당겼다. 기억의 페이지에서 짙은 밑줄 하나가 시선을 당긴다.
신학기가 되면 교내의 공기는 풀 먹인 광목처럼 빳빳하다. 교사나 학생 뿐 아니라 책걸상마저 꼿꼿하게 몸을 세운다. 옷깃을 단정하게 여미고 앉아있는 학생들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어 보인다. 폭풍 전야 같은 고요함에 오히려 더듬이를 곧추세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젊은 혈기들은 인내의 한계치를 넘어선다. 한껏 팽창한 압력솥에서 안전나사가 풀려 김이 쏟아져 나오듯 눌러둔 가슴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시쳇말로 북한도 무서워한다는 중2 남학생들이니 오죽할까. 일 년을 무탈하게 보내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담임만의 바람이었을까. 좁은 책상 사이에서 발걸기 장난으로 한 학생이 발목을 크게 엎질렀다. 신경조직의 파열로 한 학기를 침상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빈 의자를 볼 때마다 나의 허리띠를 조였다. 수십 명의 허리를 조이기에는 내 띠가 너무 약했던가, 아니 풀고 죄는 연마술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 학생의 얼굴이 떠오르면 그때의 통증이 희미하게 되살아난다.
옷 방에 남편의 허리띠가 목을 늘어뜨리고 걸려있다. 침묵으로 느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참이다. 젊었을 때는 반듯하고 윤이 반짝반짝 났다. 가장자리에 너덜거리는 실밥,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표면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말한다. 삶의 고개마다 가장의 허리를 세우기 위하여 죄고 당기기에 안간힘을 썼을 터이다. 헐거워진 근육살이 안쓰럽다.
허리띠에 새겨진 지난날의 무늬를 읽는다. 생명의 등불이 희미하게 가물거리던 어머님의 머리맡에서 암울하게 밤을 지새웠던 시간들, 생사의 상흔이 나무의 옹이처럼 군데군데 박혀있다. 야밤에 불덩이 같은 아들을 안고 병원을 드나들 때마다 타버린 마음 한 조각이 불도장처럼 얼룩져 있다. 허리띠의 무늬는 삶의 여정이 그려낸 수묵화 같다.
전시장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려니 색 바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잡는다.
물을 마시는 남자의 행색이 어수선하다. 웃옷은 헤쳐져 가슴이 드러나고 바지춤은 아래로 흘러내릴 듯 아슬아슬하다. 아낙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얼굴을 모로 돌리거나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김홍도의 화첩 중「우물가」의 풍경이다.
허리띠를 단정하게 매지 않는 모습은 보는 사람도 불편하지만 그 사람의 흐트러진 마음마저 보인다. 헝클어진 모양새에서 감추고 싶은 치부가 드러나면 누구나 창피하지 않을까. ‘창피하다’는 뜻풀이가 머리를 스친다. ‘어지러울’ ‘창猖’, ‘헤칠’ ‘피披’. 옷을 입어도 웃옷을 여미지 않으면 속살이 드러날 것이다. 허리띠를 매지 않으면 아래옷은 흘러내릴 게 분명하다. 결국 띠를 매지 않으면 옷을 헤치고 어지러운 형상이니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삶 속에는 보이지 않는 띠가 무수히 많은 것 같다. 가정, 직장,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테니까. 부드럽고 안락할 때도 있지만, 더러는 애타는 심정으로 바라봐야하는 가족에 대한 애착, 긴장의 줄을 잠시도 놓을 수 없는 직장 생활의 팍팍함, 안개 같은 인간관계에서의 허탈감으로 띠는 시시각각 달라진다. 때로는 아량의 띠로, 때로는 냉철한 띠로 조이고 풀면서 허리를 품는다.
반세기의 가을을 보낸 지도 한참이다. 나의 허리띠를 돌아본다. 걸음걸음마다 많은 허리띠를 매고 살았다. 편안하고 빛나는 띠도 있었지만 옥죄어 숨 막힐 것 같은 띠도 있었다. 아마도 잘못 맨 띠로 얼굴을 붉힌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주변의 눈살을 무시하고 띠를 풀어헤친 적은 없었는지…. 허리띠로 옷을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것처럼 마음의 옷깃을 다잡아야하리라. 성경 말씀 중 ‘허리에 띠를 매어라’ 구절은 항상 마음의 매무새를 단정하게 지니라는 가르침으로 나를 깨우친다.
늘어진 옷자락이 펄럭인다. 손끝에 힘을 주며 다소곳이 옷깃을 모은다. 허리띠로 나의 마지막 매무시를 다듬는다.
첫댓글 권보옥 선생님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김황태 선생님, 축하 말씀 감사합니다~~^^
흑구 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진심어린 축하 감사합니다 ^^
권보옥 선생님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축하 감사합니다 ^^
권보옥 선생님 흑구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김정근선생님, 축하 감사합니다 ^^
권보옥 선생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