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새벽은 이주노동자의 시간이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들에서 유색인종 소수자들이 누구보다 이르게 깨어나 일하는 시간이다. 이들과 함께 경각해야만 이 새벽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시간성을 안다. 그만큼 이들의 실존과 행위는 여러 층위의 비가시성으로 중첩되었다. 이들은 프랑스인들이 식민 지배와 착취로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대량 소비로써 과시하는 장소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에 보이지 않는 주체로서 보이지 않는 노동을 수행한다. 쓰레기 수거와 청소는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일이다. 매일의 세계에서 과거의 잔여를 소제하여 공백을 복구하는 일이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어떤 더러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보이지 않는 손으로, 흔적 없게, 자취 없게, 공백을 완수한 다음 스스로 공백이 된다.
「그림자와 새벽」(2022, 시간의흐름)
이 글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단편영화 <음화의 손>(1979)을 소개하는 글 중 일부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이 영화는 자동차 조수석에 앉은 카메라 소지자의 시선과 속도로, 밤의 끝자락부터 창백한 이른 아침까지, 바스티유 광장에서 출발하여 레퓌블리크 광장, 오페라, 방돔 광장, 리볼리 거리, 튈르리 공원, 샹젤리제, 개선문 등 파리의 명소와 주요 도로를 훑어나간다. 어둠에 잠긴 도시의 사물들은 뒤엉켜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다 점차 동이 트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놀랍게도 노변 곳곳에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 더미고, 그것들을 청소하려 거리의 청소부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과 함께 경각해야만 이 새벽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시간성을 안다.”라고 강조한다. ‘경각’은 눈 깜빡할 사이. 또는 아주 짧은 시간을 의미하는 경각(頃刻)과, 잘못을 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음을 뜻하는 경각(警覺)이 있다. 인용문에서의 경각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짝 긴장한 채 보아야만 한다는 “새벽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시간성”이란 대체 무얼까? 일차적으로는 착취로써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대량 소비함으로써 과시하는 식민 지배의 역사와, “보이지 않는 시간에 보이지 않는 주체로서 보이지 않는 노동을 수행”하는 정치적 소수자들의 고된 삶을 똑똑히 봐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현재를 반성하지 않는 과거란 역사를 복기하는 공소한 행위에 불과하다. 우리가 진정 경각해야만 하는 것은 현실에서 여전히 벌어지는 착취와 대량 소비와 과시, 그리고 이 모두를 위해 노동을 수행하는 공백의 삶이다. 먹방에 열광하고 연예인들을 동원한 선정적 축제에 줄을 서는 젊은이들을 한심해하는 우리는, 이미 이들의 미래 자원까지 끌어다 쓰고 탕진한 시간과 자원의 착취자들이다. 그런 우리의 시공간을 공백의 삶을 살아가는 손길들이 닦고 치워준다. 경각이란 이 모두를 보려는 의지와 태도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