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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김우연(시조시인‧문학평론가)
1. 성숙한 사랑
원정호 시인의 첫 시조집『노을 편지』(2016) 발간 7년 만에 두 번째 시조집『한때는 사랑이었네』를 상재하게 되었다. 첫 시조집에서는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 나선 순례자’의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영혼을 울리는 깊은 서정성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치열한 삶의 현실에서 폭포수가 되어 떨어지기도 하고, 절벽을 오르기도 하며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희망과 긍정의 마음으로 내적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적인 향기가 가득하였다.
화엄경에 ‘생숙위로(生熟爲老)’라는 말이 있다. ‘생이 성숙한 것이 늙음’이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정신은 늙음이란 감이 홍시가 되듯이 덞은 맛이 달콤하게 향기를 내면서 익는 것이다. 두 번째 시조집을 읽으면서 첫 시조집보다 더욱 ‘성숙한 사랑’이 물씬 풍겨왔다. 그것은 ‘화엄’, ‘사랑’, ‘조화’라는 세 단어가 이번 시조집의 지하수로 흐르고 있다. 특히 ‘사랑’이라는 단어는 첫 시조집에 비해서 작품 여러 곳에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시인은 현직에 있을 때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많은 교육 가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었다. 퇴직 후에도 그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인품은 시조 작품에서도 그대로 느껴지고 있다.
존 핸즈(John Hands)는 『코스모사피엔스』(우주․인간)(소미미디어, 2022)에서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 세계화와 그와 관련된 융합의 트렌드가 생겨났고 이는 반성적 사고로 말미암았다.”라며 전자 네트워크를 통해 즉시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인류를 “호모사피엔스 : 반성적 의식을 가진 유일한 종”이라고 정의하였다. 또 “반성적 의식을 소유하면 집단주의(본능적이고, 조건이 지워져 있고, 강제적인 협력)와 구별되는 협동(이성적이고 의지적인 협력)을 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반성적 의식이란 인간이라는 종의 독특한 특징으로, 자신의 의식을 알 뿐 아니라 자신이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는 정신적 진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고 있다.
시조집은 사계절에 따라 구성하고 있어 차례대로 몇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봄
①
미소가 피어나는
사랑스런 봄꽃입니다
돌아보면 아련하게
따라오는 향기입니다
언제나 설렘으로 와
온몸을 깨웁니다
-「당신은」전문
②
사랑하는 사람들은
봄꽃으로 피어난다
긴 시간 잠들었다
형형색색 깨어나는
무언의 푸른 약속이
세상을 설레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전문
③
메마른 가지에 핀
진달래는 묘약이다
오래전 눌러앉은
미움도 풀어지고
뜨겁게 불꽃이 일던
세상일들이 평온하다
-「진달래 단상」전문
①은 시조집 첫머리에 놓은 작품이다. 봄은 꽃으로 대표되는 계절이다. 움츠린 마음들이 봄꽃들을 통하여 밝아지고 세상은 아름답게 변한다. ‘당신은=미소가 피어나는 사랑스런 봄꽃’이라고 한다. ‘봄’이란 출발의 시간이요, 첫 만남의 시간을 뜻한다. ‘피어나는’의 현재형을 통해서 세월이 흘러도 초심이 변함없이 미소가 피어나기 때문에 볼수록 사랑스러운 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장에서 ‘돌아보면’이라며 세월이 흘렀음을 뜻한다. 그러나 여전히 “따라오는 향기”라고 말한다. 맑은 향기는 서로에게 맑은 향기로 젖게 한다. 이러한 꽃이기에 “언제나 설렘으로 와/ 온몸을 깨우”는 존재가 된다. 이 작품은 소박한 표현으로도 큰 울림을 주는 사랑의 찬가이다. 이처럼 원정호 시인은 심안(心眼)이 열린 시인으로 마음으로 꽃을 피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인식이 된다.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단시조 한 편으로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큰 호수나 작은 연못으로 인식될 뿐일 것이다.
②는 ‘당신’을 일반화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봄꽃’처럼 설레게 한다는 것이다. ①과 ②에서 사랑의 공통적인 속성은 ‘설레게’하고 겨울 동안 잠든 대지가 깨어나며 환희의 함성을 지르듯이 ‘깨어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③은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연약한 진달래 가지에 핀 ‘진달래꽃’은 ‘묘약’이라고 한다. 그 묘약은 “오래 눌러앉은/ 미움도 풀어지”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간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삼조(三祖)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 첫머리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라고 하였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살이에서 갈등을 겪고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미움’의 감정은 세월히 흘러도 잘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범인들도 자연에서 자아성찰을 하거나 깨달음을 얻는다. 원정호 시인은 퇴직 후에 주변을 산책하거나 여행하면서 ‘깨달음’을 얻은 작품들이 많다. ‘자아성찰’보다 ‘깨달음’은 한 차원 높은 것이다. 그것은 ‘나’에서 확대된 의식으로 ‘남’이나 ‘사회’와 ‘세상’을 사랑으로 감싸는 마음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종장에서 “뜨겁게 불꽃이 일던/ 세상일들이 평온하다”고 하였다. “뜨겁게 불꽃이 일던”이란 분노나 욕망의 마음인데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미움과 사랑(憎愛)’이라는 어느 쪽의 간택을 넘어서서 중도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수메르의 신화「길가메쉬」에서도 “너는 분노로 얽힌 마음을 갖고 저승에 가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있다. 미움이나 분노의 마음을 내려놓기는 깨달음과 굳은 각오가 아니고는 버리기 어려운 일이다.
스멀스멀 유채꽃이 봄바람에 물이 든다
누군가 매어놓은 그네를 타고 올라
목마른 하늘을 향해 향긋하게 날고 있다
바람에 물든 꽃은 신비한 꿈을 꾼다
형형색색 몸짓으로 햇살 띄워 출렁이면
불면의 마른 가슴도 향기로운 꽃밭이다
낯선 땅 변방 둑길 이름 없는 황무지에
그리움을 삼키면서 몰래 피는 꽃이라도
이 봄날 바람에 물들어 질펀하게 날고 싶다
-「바람에 물드는 날」전문
제주도 유채꽃을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서 유채꽃 축제를 벌이고 있다. ‘쾌활’, ‘명랑’이라는 꽃말처럼 유채꽃밭에 서면 누구나 행복하게 된다. ‘봄바람에 물든 유채꽃은’ 객관적 상관물이다. 유채꽃은 “불면의 마른 가슴도 향기로운 꽃밭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봄날 바람에 물들어 질펀하게 날고 싶다”라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자 희망하고 있다. 이 작품은 첫째 수 중장에서 “누군가 매어놓은 그네를 타고 올라”라는 의인화가 독특한 상상력의 발현으로 독자에게 재미를 주고 있다. 둘째 수에서 “불면의 마른 가슴”과 “그리움을 삼키면서”등의 의인화와 연결되고 있다. 이 작품은 의인화를 통하여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원정호 시인이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전해지는 작품이다.
제1부 <봄>에서는 위의 네 작품 외에도 대부분 밝은 모습과 설레는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3. 여름
①
하얀 새털구름 베고 누운 산사에는
스님도 출타하고 적막감이 감도는데
한 줄기 풍경소리가 내 뜨락을 울린다
지금은 삼라만상이 향기로운 법문이다
신록의 숲을 보며 깨우침을 얻은 말씀
목마른 하루하루를 사랑하며 사는 것
-「법문을 읽다」전문
②
세상에 둥근 것은 부드럽고 편안하다
긴 세월 헤쳐 온 길 둥글둥글 윤이 난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모가 닳아 둥글어질까?
불쑥불쑥 쏟아지는 날카로운 말을 보면
아직도 더 구르고 굴러야 하나 보다
얼마나 세찬 풍파를 더 견뎌야 둥글어질까?
-「몽돌 길을 걸으며」전문
①의 첫째 수는 한 폭의 풍경화처럼 묘사하고 있다. 스님이 출타하고 없는 고요한 산사에는 풍경소리만 들려오고 있다. 하늘에는 하얀 새털구름이 떠 간다. 오직 적막감이 화자를 감싸고 있다. 이 고요한 가운데 둘째 수에서는 “지금은 삼라만상이 향기로운 법문이다”라며 ‘신록의 숲’을 보며 깨우침을 듣는다.
이 작품은 “계곡 물소리는 모두가 부처님 법문이며/ 산색은 그대로 청정법신이다(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靜身)”라는 소동파의 오도송을 연상케 한다. 소동파가 어느 날 말을 타고 폭포를 지나다가 ‘무정설법’을 듣고 깨친 것이다. ‘신록’이란 늦봄이나 초여름에 새로 나온 잎의 푸른 잎이다. 가뭄이 심한 날에도 때가 되면 나날이 변해가는 그 모습은 마치 어린 아기가 나날이 변해가는 모습처럼 싱싱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원정호 시인은 “목마른 하루하루를 사랑하며 사는 것”을 ‘신록의 숲’에서 깨달은 것이다.
②는 인간 세상에서 말로 인하여 상처를 입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몽돌을 보면서 몽돌처럼 닮고자 한다. 일종의 ‘무정설법’을 들은 것이다. 첫째 수에서 “사람도 나이가 들면 모가 닳아 둥글어질까?”라고 질문해 본다. 그러나 둘째 수에서는 “불쑥불쑥 쏟아지는 날카로운 말을 보면”이라며 자신을 성찰하고 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말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를 수없이 바라보면서 나이든다고 저절로 몽돌처럼 변해가는 게 인간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얼마나 세찬 풍파를 더 견뎌야 둥글어질까?”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그러나 끝내는 둥글어지겠다는 각오가 보인다. ‘반성적 사유’야 말로 ‘코스모사피엔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는 것과 실천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같거나 비슷한 내용이 수없이 반복된다.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우리의 습관은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골목 안 백일홍이 붉은 속살 드러내고
뙤약볕 마당 위로 잠자리 떼 시위하면
삽살개 긴 혀를 빼물고 헉헉대는 이 한낮
느티나무 그늘 아래 노인들이 진을 치고
해마다 거듭되는 젊은 날 그 무용담에
싫증 난 수탉 한 마리 긴 울음을 뽑는다
-「여름 한낮에」전문
이번 시조집의 제재는 주로 자연물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생활주변의 인간사의 한 단면을 다루고 있어 의미가 있다. 제목처럼 ‘여름 한낮에’ 느티나무 그늘 아래 노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은 요즘도 시골이나 도시의 노인정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해마다 거듭되는 젊은 날 그 무용담에”처럼 흔히 지난날의 일을 과장하여 말하는 사람들을 풍자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과거를 소설로 쓴다면 책 한두 권은 될 것이라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드물다. 사실 아무리 평범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해도 누구나 소설 한두 권으로 끝나겠는가. 그러나 과장하여 말하는 ‘무용담’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싫증 난 수탉 한 마리 긴 울음을 뽑는다”라고 하고 있다. ‘수탉’이란 ‘무용담’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상징이다. 상징적 표현으로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특히 “긴 울음을 뽑는다”는 것은 무용담이 ‘지겹다’, ‘시끄럽다’ 등을 역동적인 심상으로 표현한 것이 돋보인다.
제2부 <여름>에서는 자연물은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도 시선의 폭을 확대하고 있다.
4. 가을
연이어 몰아치던 무자비한 태풍 앞에
믿었던 큰 나무까지 맥없이 쓰러지니
세상에 기댈 수 있는 것 바람으로 다 누웠다
그 거센 비바람에 수없이 구부리며
볕 한번 받지 못해 기웃대던 구절초가
쓰러진 거목 사이로 하얀 꽃을 피웠네
작은 꽃은 하늘 향해 울부짖지 않는다
두 팔을 높이 들어 가로채지도 않는다
잠잠히 자기 색깔을 물들이고 있을 뿐이다
-「작은 꽃」전문
이 작품의 제목인 ‘작은 꽃’은 ‘구절초’ 인데, 이 꽃은 원정호 시인의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필자가 오랫동안 바라본 원정호 시인은 늘 조용하면서도 청정한 마음의 꽃을 피워서 주변을 향기롭게 젖게 하는 힘이 있는 분이다. 그 향기는 자비로운 미소를 통해서 맡을 수 있었다. 첫째 수에서는 태풍 앞에 쓰러진 큰 나무들을 묘사하였다. 인간 세상에서 흔히 세상을 구할 듯이 목소리 높이며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세상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거나 자신도 구하지 못하며 사라져 간다. ‘구절초’는 진실한 인간들을 상징한다. 둘째 수는 “그 거센 비바람에 수없이 구부리며”, “볕 한번 받지 못해 기웃대던 구절초”라며 무수한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을 상징하는 ‘구절초’는 “쓰러진 거목 사이로 하얀 꽃을 피웠네”라며 그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작은 꽃’은 “하늘 향해 울부짖지 않는다”며 지나친 욕망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삶을 말한다. “두 팔을 높이 들어 가로채지도 않는다”며 남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다만 “잠잠히 자기 색깔을 물들이고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 구절초처럼 은은하게 사방으로 향기를 뿜어내고 있을 뿐이다. 독자에게 쉽게 이해되면서도 울림이 크게 다가오는 것은 진술과 묘사와 상징이 적절하게 사용하여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이 잠긴 달이 아니라 맑은 하늘의 보름달처럼 원정호 시인의 인품이 언어를 넘어서서 풍겨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숨이 차서 깜빡이던 하루하루
구절초 울먹이는 가을의 끝에 서서
소슬한 외씨버선길
대티골을 걷는다
소프라노 산새 소리 숲을 갈라 길을 열고
눈 감고 두 팔 벌려 심호흡을 하고 나면
무겁던 그 침묵들이 한 장의 낙엽인 것을
-「치유의 길을 걸으며」전문
이 작품은 늦가을에 대티골을 걸으며 가을을 대표하는 꽃의 하나인 ‘구절초’를 바라본다. ‘구절초가 울먹이는’이라며 연민의 정을 느낀다. 산새 소리가 숲을 갈라 길을 낸다고 한다. 그리고 “눈 감고 두 팔 벌려 심호흡을 하”면서 자연에 동화된다. 그리고 나면 “무겁던 그 침묵들이 한 장의 낙엽인 것을” 깨닫고 마음을 치유를 하게 된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깨닫고 또 반성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런 자세는 ‘코스모사피인스’ 시대에 누구나 필요한 수행 자세일 것이다. ‘대티골’ 숲길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에 위치한 자연림인데, 치유의 숲길로 유명한 곳이다.
무를 뽑다 날지 못하는 메뚜기를 만나던 날
쑥부쟁이 꽃잎 뒤에 몸을 숨긴 무당벌레까지
마지막 안간힘으로도
날아오르지 못한다
지금쯤 홀가분하게 떠나야 할 시간인데
그 무슨 할 말 있어 애처로운 몸짓인가?
늦가을 길목에 서면 현기증이 깊어진다
「무를 뽑다가」전문
이 작품은 생태시조이다. 원정호 시인의 사랑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명체에 대해서도 인식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첫 시조집보다 더 넓고 깊어진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지구에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으며 인류보다 더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늦가을 길목에서 만난 ‘메뚜기’와 ‘무당벌레’가 “마지막 안간힘으로도 날아오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면서 ‘애처로움’을 느낀다. 그래서‘현기증이 깊어진다’라고 하며 모든 생명체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 외에도 생태시조는 <봄>에서「암호 해독」,「복주머니에 대한 기억」,「높새 바람이 기다릴 때」<가을>에서「응시」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원정호 시인의 시조 세계가 생태시조로 인식이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 DNA는 약 6% 정도 차이밖에 없다고 한다. 모든 존재가 함께 살기 위한 생태 의식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반성적 사유이기도 하다.
제3부 <가을>에는 한층 깊어진 사유로서 치유와 생태의식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5. 겨울
뜰 앞의 나무들이 옷을 벗는 겨울 아침
화려했던 여름날이 문신처럼 박혀 올 때는
푸르른 그 시간 들이 온통 사랑이었네
길고도 지루하게 어둠이 된 순간들
길 잃은 짐승처럼 고독감이 엄습해와도
천천히 텅 빈 가슴을 떨림으로 채운다
몰아치는 바람 앞에 당당하던 풀잎처럼
무수히 일어서다 주저앉은 벌판에는
아직도 그 메아리가 종소리로 울리네
-「한때는 사랑이었네」전문
원정호 시인은 지난날을 돌아보니 모두가 사랑이었다고 한다. 그 사랑은 현재 충만한 것이다. 그게 바로 화엄세계가 아닌가. 무비 큰스님은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것을”이라고 노래한 경지와도 통하는 것이다.
겨울은 만물이 태어나서 성숙하고 열매를 맺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새봄을 맞이하기 위한 계절이다. 범인들도 세상을 관조(觀照)하며 새로운 정신세계로 도약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를 내세울 필요가 없는 생활의 조건 속에서 어떤 일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양변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세상이지만 인식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이런 인식에 도달한 원정호 시인은 첫째 수에서 “뜰 앞의 나무들이 옷을 벗는 겨울 아침”을 보면서 “화려했던 여름날”을 떠올리며 “푸르른 그 시간 들이 온통 사랑이었네”라며 사랑으로 출렁이는 세상을 말하고 있다. ‘뜰 앞의 나무들’은 바로 ‘자신’을 상징한다. 저 나무가 뜨거운 여름 속에서도 더욱 푸른 잎으로 무성했듯이, 지난날 치열했던 현실의 삶도 돌아보니 다 사랑이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삶이란 소중한 것이며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꽃처럼 아름다운 것이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긍정의 마음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둘째 수에서 “길고도 지루하게 어둠이 된 순간들”, “길 잃은 짐승처럼 고독감”과, 셋째 수에서 “주저앉은 벌판” 등은 무수한 고통과 시련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몰아치는 바람 앞에 당당하던 풀잎처럼” 현실을 극복했기에 과거가 ‘온통 사랑’이었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셋째 수에서 “아직도 그 메아리가 종소리로 울리네”라며 ‘아직도’는 현재이며 ‘종소리’로 울린다는 것은 그 사랑이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서 세상 밖으로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결국 조용하면서도 그윽한 종소리처럼 세상을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조용한 목소리로 진솔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절창이다.
우리의 현실 사회는 남남갈등 못지않게 남남 내부 갈등을 본다. 이런 사회에서 이런 노래는 사회를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양변을 떠난 순수한 인간의 참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아성찰을 하는 작품으로는 “산 아래서 바라보면 선계의 이야기더니/ 산 위에 올라 보면 지상의 먼 이야기/ 그렇게 화엄 설법을 바람으로 전하네”(「선일대를 오르며」넷째 수)에서 ‘산 아래’와 ‘산 위’에서 바라 본 세상이 다르다고 했다. 소동파의 오도송을 듣는 것 같다. ‘코스모사피엔스’ 시대에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협력하는 마음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 확증편향의 정신병적 현상이 너무나 심하다. 이것은 탐욕에서 일어난 마음들 때문이다. 이럴 때 원정호 시인의 노래들은 찌든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감로수이다.
또 ‘오백 가람’이나 있었다는 ‘법광사지’에서 석탑만 남아 있음을 본다. 그러면서 “그 많은 소원들은 종소리로 퍼져가고/ 마주친 사람들이 강물처럼 흘러가도/ 가만히 이 언덕에 서면 봄날처럼 설렌다 ”(「법광사지를 찾아서」셋째 수 )라고 하는데, 초장과 중장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다 변해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가만히”는 삶을 관조하는 것이요, “봄날처럼 설렌다”는 것은 현재 이 순간이 영원한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원정호 시인은 청정한 마음을 맘껏 누리는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제4부 <겨울>에는 자연과 세상을 관조하여 세상 모두가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고 있음을 노래하였다.
6. 기다림
소설가 문순태 님은 그의 장편소설에서 “기다림은 기도이고 생명이며 희망이고 삶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소쇄원에서 꿈을 꾸다』라고 말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없이 기다리는
뒷모습은 처연하지만
눈빛으로 주고받는
이슥한 푸른 적멸
안으로 스며든 그 사랑
붉게 번져 아리다
-「아버지」전문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사부곡이다. “말없이 기다리”시며 “안으로 스며든 그 사랑”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주고받는”다.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다. 은은한 사랑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사랑한다’고 말로 표현하는 사랑은 언젠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누천년 기다리며 엎드려 살았는데
그렇게 바닷길이 뚫릴 줄 몰랐었다
아무도 칠흑 하늘이 열릴 줄을 몰랐다
천년 전설 유금리는 꿈을 낳는 경전이다
막다른 길목에서도 승천을 꿈 꾸며는
상처 난 얼룩들까지 꽃잎처럼 환하다
인습에 사로잡혀 아픔을 눈감지 말고
순수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묵시적 불꽃을 밝혀
신앙이 된 유금리
-「유금리 이야기」전문
안강에서 포항으로 가는 길목에 유금리가 있다. 어른들은 모두 ‘뱀이다’라고 했지만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할머니 등에 엎혀서 “용이다”라고 외치니, 큰 뱀이 용이 되어 승천하면서 꼬리로 형제산 쳐서 갈라놓아 형산강 물줄기가 포항으로 흘러가게 한 전설을 소재로 했다. “인습에 사로잡혀 아픔을 눈감지 말고” “순수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욕망과 목적을 바탕을 두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진실을 알기 어려운 것이다.
벼르고 벼르다가 도전한 파크골프
열정이 솟아나면 꿈은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휘두른 하늘에
깃발 하나 걸었다
정해진 선을 맞추고 방향을 잡아야 하며
적절한 거리 따라 힘 조절이 관건이다
그렇다,
강약의 조화는 인생사의 나이스 샷
-「조화」전문
이 우주와 세상은 조화 속에 있다. 원정호 시인은 퇴직 후에 ‘파크골프’를 통하여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 파크골프에서 공을 목표점에 보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거리 따라 힘 조절이 관건”인데 인생도 마찬가지로 “강약의 조화는 인생사의 나이스 샷”이라며 ‘강약의 조화’가 중요함을 깨닫고 있다. 이 작품 외에도 코로나 시대에 자연만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소통」「고향 친구」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시인의 일상생활이 자연과 인간 세상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제5부 <그리고 기다림>에서는 ‘조화’야 말로 인생의 꽃이요 아름다움임을 노래하고 있다.
7. 나오며
이상으로 원정호 시조시인의 두 번째 시조집『한때는 사랑이었네』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시인의 호수처럼 맑고 고요한 성품을 빼닮은 90편의 꽃송이가 은은히 향기를 뿜고 있었다.
시조는 문학진흥법의 일부 개정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6개월 후, 2021년 11월 19일부터 문학의 독립 장르가 되었다. 원정호 시인은 1996년 등단한 이래 40년 가까이 오직 정형시인 시조를 사랑하며 자신의 독특한 시조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것은 깨닫고 보니 우리는 모두 꽃이며,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사상을 시조의 압축과 절제, 비유와 상징을 묘사와 진술로써 적절히 표현하여 시적 성취를 이룩하였다. 그래서 이번 시조집을 읽으면 반성적 의식을 자각하게 하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잔잔한 감동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결이 삭은 조용한 목소리를 통하여 노래함으로써 독자에게 ‘구절초’와 같은 인품의 향기에 서서히 젖게 만든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화가 된 지금엔 이성적 협동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럴 때 이번 시조집에서 보인 바와 같이 사랑과 조화가 치유의 바탕이 되고 있다. 이것은 원정호 시인이 자연과 세상을 관조하여 얻은 깨달음을 노래한 성과일 것이다. 마치 소동파의 오도송과 같이 느껴지는 시조집이었다.
<시인의 말>에서 “나의 꽃의 향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시조집 발간 이전부터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인품이 꽃송이로 피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시조집의 상재를 축하하면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꽃송이를 피울 것이라 기대한다.
첫댓글 평설 즐겁게 감상합니다.
고맙습니다. 한상철 선생님 시조들도 틈틈이 감상하고 있습니다.
잘 읽고 모셔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