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은 불타고 외 4편 / 최희 / 물의 잠을 위한 아르페지오 외 4편 / 임은호 / 2014.제4회 시와표현 신인상
달력공장이 불타고 외 4편
최 희
어딘가에서 달력공장이 불탔다는 뉴스를 들었다
순식간에 월세 납부일이 불타버리고 온갖 기념일들이 사라졌다
달이 순식간에 쪼그라들거나
밤하늘 저편으로 펑하고 터져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잔불처럼 모락모락 했다
해안의 물때들이 소조기와 대조기 사이에 갇혀 버리고 예비신부와 신랑들은 결혼식 날짜를 찾아 허둥대고 생일 없는 아이들이 속출하고 귀신들은 죽은 날짜를 찾아 헤맬 것이다 귀신같이 알아차린다는 말에 조금의 희망을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 감자를 캘 시기를 놓치거나 깨 모종 옮겨 심는 시기를 놓쳐버린 빈 밭들은 그야말로 텅텅 비어 날아다닐지도 모른다 기상청의 등고선들이 주저앉아버리면 해와 달만 더욱 싱싱하게 웃겠지
목련꽃 멍울이 지기 시작하면 첫아이 생일상을 차리고 아카시아 향기가 짙어지면 친정집 모내기가 한창이겠지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삼계탕을 끓여 먹고 들판이 노릇노릇 익어 가면 달이 가장 살찐 날에 통통한 토란국과 송편을 먹어야지 두 번째 눈이 내릴 즈음 동지팥죽을 먹고 그러면 월급날은, 월급날은 나침반수첩에 동그라미로 깜박거리겠지
달력공장이 불타버린 날
소방대원들은 물 젖은 날짜들은 챙겨 갔을까
지구는 기우뚱거리는 운행을 바로잡을 것이고 타다만 날짜들이 콜록거리겠지
화들짝, 벽에 매달린 뻐꾸기가 출근시간을 알린다
달콤한 지름길을 찾아 빨갛게 입술에 그린다
입술에서 불냄새가 난다
크로키
목욕탕엔 안개가 가득하고
안개 사이로 보는 것들은 소묘다
그 때가 안개의 뼈들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식어가는 뼈들이 뿜어내는 비릿한 냄새들
나는 당신의 몸에서 이렇게
뜨거운 김이 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휘어져 가는 골조에 얹힌 구부정한 목책은
몇 만평 노을을 가두고 있나
윤곽은 바깥보다 그 안을 그리는 일이겠지만
어느 名畵集에서 본 듯한 몸
어느 곳은 죄스럽고 민망한 곳이다
언젠가 간지럽게 밀었던
당신의 등은 너무 저물었을까
더듬거릴 곳조차 없는데
하얀 김이 모락모락 빠져 나오는 몸
뼈를 감당해야 할 시절에 서있는 지금
당신은 뼈가 무겁고 나는 살이 무겁다
모락모락 섞이는 살들
내가 당신의 때를 벗기는 이때는
어느 지치고 저린 포즈의 시간
어느 녹슨 축에 얹혀 삐걱거리는 중인가
자잘하게 겹치는 선들만 가득한 표정
뿌옇게 가려지는 시야는
당신과 나의 온도차라는 것을 안다
마지막 한 획을 그어야 하는 흑심은 어디에 있나
여전히 부끄러운 흑심 한 뭉치가
당신의 몸속으로 지워지고 있는 것을 본다
고래
알라스카 귀신고래는 삼만 킬로미터를 이동한다
새끼를 낳기 위해서 라고도 하고 먹이를 찾아서 라고도 한다
혹등고래 암컷 한 마리는 짝을 찾기 위해
브라질을 떠나 마다가스카르까지
구천팔백 킬로미터를 이동한다고도 한다
멀다, 라는 거리는 어떤 거리일까
출발한 곳을 망각하고
도착한 곳도 몰라야 하는 거리는 아닐까
술에 취한 남자는 3만여 킬로미터를 가는 중이다
흥얼거리는 음파가 취해있어 본능으로만 찾아가는 집
부유물만 희끗희끗 떠다니는 검은 바다,
해류는 번쩍거리는 상향등과 경적을 울리며 빠르게 흘러간다
저 해류에 휩쓸리면 여정은 싱겁게 끝나고 만다
고래가 무의식으로 찾아가는 여정엔
꼼장어 연기 속에서 아롱거리는 무릉도원도 있고
한 번 목에 걸면 지갑이 텅 비어야만 멈추는 탬버린이 있다
남자는 습관처럼 그 거리를 지나 멀고 먼 집을 찾아간다
사람들은 그를 술고래라 부른다
흥얼거리는 음파는 골목을 돌아
어느 집 대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로 차고 들어간다
이불 속으로 잠수하는 어린 날의 자정
온 집안을 출렁거리는
술 냄새의 파고는 높았다
집은 멀고먼 남극에 있다
남자는 매일 그 먼 거리를 왕복한다
자신이 이미 그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매일 잊은 채
사내는 다시 고래의 복장으로
먼 바다를 향해 헤엄쳐 간다
최 희 :
1996년 경기도 주부백일장 우수상 수상. 1997년〈국민일보〉좋은시 특별상 수상. 현재〈중앙 뉴스〉문화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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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잠을 위한 아르페지오 외 4편
—세월호 100일 후, 백건우의 추모 독주회가 있었다
임은호
이것은 구명조끼의 아랫단을 묶고 나란히 피아노 속으로 걸어 간 메아리들에 대한 이야기
제1의 조명탄이 반복적인 아르페지오로 이름을 부른다 제2의 조명탄이 트릴로 따라간다 제3의 조명탄이 물 위에 손을 얹고 밤바다를 어루만진다 제4의 조명탄이 찾지 못한 이름에게 도 와 시 사이 솔과 파 사이의 검은 눈물을 닦아낸다……. 제10의 조명탄이 누구도 함부로 잊혀서는 안 된다고 물의 지문을 센다 아가야 내 아가 ……. 제 50의 조명탄이 물비늘 빛나는 보름사리의 먼 바다에까지 이름을 찾는다 ……. 제100의 조명탄이 흰 갈기로 일렁인다……. 제200의 조명탄이 닿을 수 없는 잠으로 곤두박인다……. 제300번째 조명탄 아래 깊게 눌린 검은 건반이 마지막 이름을 부른다 어둠속에서 뒤척이며 한껏 멀어진 양손을 건반 한가운데로 모은다……. 제304번째의 조명탄이 오른손으로 사랑의 죽음*을 연주하고 왼손으로는 풍랑을 쓰다듬는다
영혼들의 격랑이 창백해진 물보라로 일어선다 수평선 너머 선율이 날개를 펼치고 몰려온다 물의 건반과 한 몸을 이룬다 건반 위로 오른 울음들이 물의 울타리를 무너뜨린다 제주 제7항구로 내달리는 유속이 빨라진다 산맥처럼 몰려든 터지지 않는 울음, 물의 흰 건반이 일제히 물 위로 치솟았다가 내려앉는다 해저 수만 마일 아래 갇힌 발목들을 인양중이다 다 못 읽힌 악보가 다치지 않도록 겉봉투를 뜯는 세심한 파문, 파문들 심해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빛의 날갯짓, 회오리치던 조류와 수평을 맞춘 피아노선율의 밀물이 긴 잠의 귓전에 가 닿는다
상현달이 양의 뿔처럼 밤하늘에 걸린다
* 바그너 곡을 리스트가 편곡.
기상도
가만가만 팔을 뻗어 목을 감으면 사랑이 치밀듯 오동꽃 피겠다
꽃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빗줄기는 봄의 중심을 파헤친다
여름으로 내달리던 백야행,
버짐나무 가지 위에서 빗방울이 자지러진다
월터 드 마리아*가 장치한 외딴 들판의 400개 금속막대,
어깨를 내어준 피뢰침으로 너는 서 있었지
번개, 푸른빛이 얼굴을 지나갔다
운명이 결정될 줄 알면서 두렵지 않았다
마주보면 눈이 먼 듯 놀라운 밤이었어
너 라는 버튼을 언제 또 누를지는 알 수 없어
오늘밤, 오늘밤이 지나면
서로의 몸 안에서 흐르던 대전(帶電)
빛과 소리의 속도차가 없는 저문 오후,
거부할 수 없는 충격파가 지나갔다
*월터 드 마리아, 「번개 치는 들판」, 1971~1977.
접시 위의 잠수
물을 차고 올라 배를 뒤집었을 거야 은백양나무 잎사귀 뒤집히듯 밤바다 수면 위가 눈부셨을 거야
비늘 다 털리고 꽃잎처럼 썰린 붉은 건반, 앙상한 가시에 숨기운만 붙어 있어도 너는 바다의 리듬
길이 멀어 다시 오지 않는 네가 나는 좋아 숭어가 겨울바다를 끌고 올라올 때 망원렌즈를 오므려 숫눈 먹이던 서쪽들, 침묵의 그물에 갇혔어도 나는 네가 좋아
날카로운 발톱과 커다란 날개를 동경했지만 꼬리지느러미는 날 때부터 달랐지 흔들리는 부표와 짓누르는 수압에도 시리게 눈을 닦고 있었어
잘려진 단면의 저 난해한 무늬, 눈꺼풀을 열었다가 닫네, 접시 위 숨비가 아주 잠잠해지네
나들목 횟집 흐린 창문 너머로 땅거미가 지네 척추뼈에 다시 살이 돋지 않아도 너는 바다의 리듬, 나의 막막한 백지 위에 힘살과 실핏줄 튕겨 오르는 바다를 들려주렴
임은호 :
1969년 경기 김포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2009년 부천 신인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