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전태일문학상 / 장성혜
높은 바닥 / 장성혜
그래, 올라와
징그러운 몸뚱어리로
여긴 이 아파트 꼭대기 층 화장실이니
더는 치고 올라갈 바닥도 없는 끝이니
오라고
탈주극 주인공같이 하수관을 타고
기어오르라고
불을 켜는 순간
배수구를 빠져나오는 너와 마주친 나도
바닥에서 바닥으로 올라가는 중이지
한집도 빠짐없이 소독하란 방송이 두 번이나 있었으니
목숨 걸고 올라올 만도 하지
약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전속력으로 달아나보라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구멍을 찾아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다
지금처럼 슬리퍼에 배가 터져 죽더라도
올라오라고
희망이라는 바퀴벌레여
어둠 속에 알을 남기고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다
마주쳐 내가 밟아 죽이더라고
또, 오라고
금 캐는 시간 / 장성혜
김순남 씨 하루는 마나도* 샬디보다 2시간 일찍 해가 뜬다
해가 뜨기도 전에 리어카를 끌고 좁은 골목을 내려온다
빛바랜 해병대 모자를 눌러쓰고 고물을 줍기 시작한다
2시간 후 마나도 광부 샬디가 야자수 숲길을 걸어
혼자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굴속으로 내려간다
김순남 씨 리어카에 빈 박스가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맨몸으로 돌을 깨는 샬디의 몸에 땀이 흐른다
헐렁한 야전 잠바를 걸치고 계단에 앉아 밥을 먹는
김순남 씨 굽은 등을 비추던 태양은 2시간 뒤
허리를 펼 수 없게 비좁은 마나도 작은 금광 위를 비춘다
자루처럼 늘어지는 흙투성이 샬디의 몸이
뒷걸음으로 돌 자루를 끌고 흙벽을 올라온다
열세 번을 오르내려야 하루 일이 끝난다
먹고 사는 것이 전쟁보다 치열하다는 걸 두 사람은 안다
천막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굴속으로 내려가는 샬디의 꿈은
금이 든 돌 깨서 집 사고 장가를 가는 것
샬디 앞에는 금맥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김순남 씨는 샬디가 꿈꾸는 시간을 다 지나왔다
마나도 야자수 숲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갈 무렵에도
김순남 씨는 전쟁통 뒷골목을 다니면 고물을 줍는다
혼자 먹는 시어 꼬부라진 김치뿐인 늦은 한 끼의 밥에
금 덩어리보다 귀한 시간의 파편이 박혀 있다
내일도 김순남 씨 쪽방은 마나도보다 2시간 일찍 해가 뜰 것이다
*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점에 있는 도시. 작은 금광이 많아 황금의 땅이라고도 함
공범 / 장성혜
연탄 한 장 사라진 밤이 지나면
아침부터 수돗가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연탄 한 장에 벌벌 떠는 사람들은
불문을 막아놓고 서로 의심했다
모두 결백하다고 울대를 부풀리며 달려들었지만
아무도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십구 공탄 구멍처럼 방들이 많은 집
허술하게 달린 간이부엌은 틈도 많았다
연탄 한 장을 든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는 곳을
그 틈으로 보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건넛방에는 목소리가 제일 큰 여자가 살았다
누군가 연탄불이 꺼졌다고 하면 선뜻
불을 빼주겠다고 나서는 것도 그 방 여자였다
불이 붙은 연탄을 마당에 눕혀놓고 식칼로 잘랐다
검은 그림자가 그녀라는 것이 내 입을 틀어막게 했다
도둑년들이 사는 집, 연탄을 세어놓고 잠드는 엄마는
세상에 믿을 구멍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날도 연탄 한 장이 사라졌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방은 조용했다, 소리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무거워진 연탄가스가 몰래 스며들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만리장성 / 장성혜
만리장성은 어디에나 있죠. 너덜거리는 생활정보지 뒷면에서 찾았다면, 지금처럼 뭘 먹기는 먹어야 하는데, 별로 먹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는 토요일 오후일 수도 있고, 신발장 구석에서 발견했다면, 열두 번쯤 이삿짐을 쌌다 푸는 중인지도 모르죠. 삼박 사일 코스 여행을 떠올린다면, 구식 냉장고 옆구리에 붙은 만리장성 하고는 거리가 멀 수도 있죠.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배달해 준다면, 여기처럼 원룸이나 고시원이 많은 동네일지도 모르죠. 만리장성이 있는 골목 깊숙이 들어가면, 자장면이 30원일 때쯤 태어난 남자가, 와서 먹으면 천 원을 할인해 주는, 옛날짜장을 먹으러 가는 뒷모습이 보일지도 모르죠. 기름때 낀 주방 안에서 볶음밥을 만드는 여자는, 오래전 자장면은 배달하는 남자와 만리장성을 쌓았을 수도 있죠. 채널을 돌리다 다시 다큐멘터리로 돌아오는 토요일, 아프리카 아이의 검은 눈과 마주치죠. 자장면을 기다리는 나를 보고 말하죠. 옥수수죽이라도 실컷 먹고 싶다고, 옥수수죽과 자장면 사이에 만리장성이 보이죠. 물을 길으러 점점 멀리 간다는 아이의 나뭇젓가락 같은 다리에서도, 내가 쓰다가 만 이력서의 숫자에서도 보이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자장면이었던 아이가, 그냥 자장면이나 시켜먹을까 하는 어른으로 불어 터져 있는 저녁, 만리장성 위에는 한입 베어먹은 단무지 같은 달이 떠 있죠.
귀향 / 장성혜
온다.
화염병 날아다니는 산동네로
끊긴 전선들 뛰어내린 골목으로
철거민대책위원회 팻말 지나
붉은 스프레이로 해골 그려놓은 벽 넘어
눈알 빠지고 다리 잘린 곰 인형 밟고
온다.
도둑고양이 울음소리로
뼈 드러난 만화 대여점 기웃거리며
허리 부러진 구멍가게 지나
결사반대 현수막 너덜거리는 길로
머리카락과 욕설 엉켜 있는 현장으로
온다.
쩍 갈라진 시멘트 바닥 사이로
깨진 유리조각 틈을 비집고
말라죽은 뿌리 안고 뒹구는 깨진 화분으로
돌덩어리 된 가슴을 뚫고
비명처럼 풀들이 올라온다.
봄이 온다.
[심사평]
리얼리즘적 경향은 작가들에게 시대의 평균적 사회의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민중문학, 노동문학 작품들은 사회학에 주눅이 들거나 그에 충실하려고 하는 경향도 보입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은 오히려 사회 의식적 관계에서 패착된 현실적 난관을 감각적으로 뛰어넘는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사회적 역할을 한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시대적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신인에게 우선적으로 신선한 감각을 요구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선을 거친 아홉 분의 시를 읽고 우선 세 분의 시를 추려보기로 했으나, (가)(18-2-다-075, 표제시 ‘째깍째깍.....’), (나)(18-1-다-181, 표제시 ‘금 캐는 시간’), 두 분의 시에서 일치를 봤습니다. (가)의 시는 상상의 자유로움과 표현의 기교면에서뿐 아니라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이면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우면서 독특한 시각도 돋보였습니다.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오랜 시간 습작으로 단련했음직한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중적 삶을 미화하거나 과장하거나 엄살을 떨지도 않고, 한발 물러선 관찰자의 입장도 거부하면서, 있는 그대로 진실 되게 껴안으려는 자세와 이를 깊이 천착해가려는 노력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소양과 저력을 키워온 것 같습니다.
두 분 가운데 삶의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전태일 정신을 살려내는 쪽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나)의 경우 투고작 모두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다소 가산점이 주어졌습니다.
(가)도 이미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그를 다른 지면에서 곧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신인다운 패기로 기성 시에 주눅 들지 말고 맘껏 펼쳐 보이시기 바랍니다. 신인은 초보시인이 아니라 전위시인이기 때문입니다.
- 심사위원 백무산, 김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