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5일 수요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신심 미사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과거 대축일이었던 7월 5일에 성대하게 신심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시어 이루어 주십니다.
교리실화와 순교실화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포졸들이나 포도군관이 천주교인을 잡아와서 관장 앞에 결박을 지워놓고 마지막으로 회유한답니다. 성화나 성물을 땅위에 놓고 신자로 하여금 그 성화나 성물을 걸어서 넘어가라고 한답니다. 그러면서 “네가 그 물건을 가로질러 건너가기만 하면 너를 집에 보내 줄 것이다. 너는 아무런 죄도 묻지 않겠다. 잘 생각해 봐라. 저건 그냥 물건이잖니? 위로 지나가기만 하면 아무런 죄도 묻지 않겠다.” 그러면 천주교 신자는 그 성화나 성물을 건너가고 집에게서 주님께 용서를 빌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건너 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순교자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네가 저 물건이나 그림을 밟지 않고 돌가 가면 그 즉시 네 목을 칠 것이다.”라는 관장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 성화나 성물 앞에 서면 주님의 성령께서 “돌아가서 죽어라.”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의 영광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인가를 할 때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하고 속상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서 완전히 멀어진 것과 같은 생각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단절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단절을 선언하면서 내가 사정을 봐서 교회에도 다니고 기도도 하고, 하느님께 예배도 드리고 예물도 바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연애도 쌍방이 같이 눈이 맞고 마음이 맞고 기호가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하며 성격이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과의 사랑도 서로 맞장구가 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일방적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은사가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성령의 아주 독특한 은사가 있어야 그 은사에 힘입어 말도 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던 시기 많은 순교 선열들이 그 모진 고문과 박해를 견디면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은사 덕분이었습니다. 정말 그들에게 끌려갔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고발하여 관장에게 넘겼을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령께서 모든 것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순교가 생겼고, 모든 위주치명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순간에 말씀해 주셨고, 주님께 기도하는 순교자들에게 용기를 부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선교할 때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식이 없거나 말을 잘 하지 못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오직 올바르게 간직하고 생활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성령께서는 모두 합당한 은사를 내려주시기 때문에 적당한 언변도, 열정도, 증거의 능력도 내려주실 것입니다. 오직 기도만으로 은총을 간구하십시오. 은총으로 성령께서 축복해 주실 것을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부족한 것은 모두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5,1-5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축일7월 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金大建 Andrew)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 지역 : 한국(Korea)
활동 연도 : 1821-1846년
같은 이름 :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w) 신부님은 유네스코에서 정한 2021년의 인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