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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우리 모습을 돌아보네
7월과 8월은 교회의 여름성경학교와 중고등부 수련회, 청년부 수련회 그리고 교회나 교단 사경회 등으로 많이 바쁜 때이다. 평소에도 성경 말씀을 배우지만 이런 특별한 기회를 통하여 집중적으로 성경의 한 부분이나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공부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친밀하게 교제를 나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제자’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을 볼 때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지키는 자가 ‘제자’라고 불리니 사도행전 1장 10절에서부터 시작하여 1:12; 2:6; 6:1, 2, 7; 9:1, 10, 19, 25, 26, 28, 36, 38; 11:26, 29; 13:52; 14:20, 21, 22; 14:28; 15:10; 16:1; 18:23, 27; 19:1, 9, 30; 20:1, 2, 30; 21:4, 16에서 ‘신자’나 ‘성도’라는 말 대신에 ‘제자’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본다.
작년부터 시니어 클럽의 일을 하면서 계룡도서관에서 근무하는데 함께 운동하는 분들이 가끔 도서관에 왔다가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눈다. 운동을 열심히 하지만 책도 좋아하는 분들이라서 그럭저럭 살려고 하지 않고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은 한 분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최근에 아내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일요일과 수요일에 미사가 있을 때 나갈 뿐만 아니라 목요일에 있는 교리공부에도 나간다고 한다. 이전에도 성당에 나가는 몇 사람이 교리공부에 나가기 위해서 운동 시간도 줄이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열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관계하는 개신교, 그동안 경험했던 교회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다.
어떤 교회는 주일에 두 번의 예배를 드리는 것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비롯하여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공부를 한다(아침에배 전이나 점심식사 후 오후예배 전에, 혹은 수요기도회 시간에). 요리문답을 열심히 공부하는 교회는 매주에 한 문답을 암기한다. 어른들이 암송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교회는 주일학생들만이라도 암송하도록 한다. 주일설교에 대한 문제를 만들어 주중에 풀어오도록 숙제를 내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주중에 한 번 더 모여서 『기독교 강요』나 다른 기독교 서적을 공부하기도 한다. 주기적으로 교회의 직분자들을 위한 교육을 하기도 하고, 부부생활에 대한 공부, 자녀교육에 대한 공부, 직장생활에 대한 공부를 비롯하여 건강관리나 경제생활, 취미생활, 환경보존 등 교회생활을 하면서 혹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분야에 대하여 성경적인 접근을 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쓴다. 어떤 교회는 한 달에 한 권씩 추천도서를 선정하여 읽도록 하고, 적절한 시간에 총정리를 해 주기도 한다. 다양한 강사들이나 다른 교회의 목회자들을 초빙하여 교인들에게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듣도록 하고, 자기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폭넓은 성경공부를 접하도록 한다,
이런 교회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모이는 주일의 두 번의 예배와 수요기도회, 그리고 사경회 등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모든 교인이 참여한다. 젊은 교인도 어린 자녀도 모두 참여하는 것이 기본이다. 슬프게도 요즘은 나이드신 분들만 모이는 수요기도회와 새벽기도회가 되어가고 있고, 심지어 주일오후예배에도 불참하는 분들이 많아서 주일오전예배 참여 수보다 훨씬 적은 것이 현실이다. 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에 여호와의 증인이던 학생들은 전국적인 집회가 있을 때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지만, 과감하게 결석을 하면서 그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을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교회에 출석하는 학생들은 주일에도 학원에 나가고자 교회 예배에는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주일학교가 사라지며, 교인수가 줄어든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으니 전 세계 인구의 1/4이나 된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얼마 전에 독서모임에서 마크 A. 가브리엘이 쓴 『이슬람과 유대인, 그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읽었다. 마크 A. 가브리엘은 이집트의 명문 무슬림 가문에서 태어나 6세에 하루 2 page씩 꾸란 암송을 시작, 12세에 꾸란 전체를 암기하였고, 후에 하디스까지 그 내용을 파악하게 되었다. 알 아즈하르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만큼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무슬림 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천년의 전통을 지닌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이집트 알-아즈하르 대학에서 이슬람 역사와 이슬람 문화를 공부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고 최연소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때는 이슬람 모스크에서 이맘으로 활동할 만큼 헌신된 무슬림이었던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남아공에서 평신도(의사)인 한국인 선교사를 통해 DTS훈련을 받고, 미 플로리다 기독교 대학에서 기독교 교육학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그런 만큼 그는 누구보다도 이슬람과 기독교를 비교해 설명할 수 있고, 예수와 무함마드에 대한 정확한 안목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영국 옥스퍼드학회 정회원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2009년 11월 글마당출판사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한 달 동안 이슬람에 관한 특강을 하였다. 현재 가브리엘 박사는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특히 유럽의 이슬람화를 막기 위해 강연을 하고 있으며, 한 인권단체에서 억압받는 이슬람권 무슬림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마크 A. 가브리엘은 기독교인이 되었고, 무슬림들이 기독교인이 되도록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통해 소개되는 내용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려서 시작한 꾸란 암송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가 글을 깨우치기 전에 나는 삼촌의 도움을 받으며 꾸란의 짤막한 장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삼촌이 먼저 꾸란의 한 구절을 읽으면 나는 나 혼자서 그 구절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복창했다. 얼마후에 나는 알 아즈하르(Al Azhar) 초등교육기관에 다니게 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 모두 꾸란을 암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 꾸란의 길이는 얼추 신약성경의 길이만큼 되었다. 우리 학급의 인원은 45명 정도였다. 여섯살 때부터 열두살 때까지 나는 하루
에 두 페이지쯤 되는 분량을 매일 암기해야 했다. 매일 학교에서 그전날 암기한 내용을 선생님 앞에서 암송했다. 새로운 절을 외워오지 못한 학생은 매를 맞았다. 매를 맞을 때에는 의자에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어야 했다. 그러면 보조 교사들 중 한 명이 학생의 발목에 벨트를 감아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동여맨 다음 학생의 몸과 다리가 수직이 될 때까지 발목을 들어올렸다. 그러면 교사가 갓 꺾어온 싱싱하고 튼실한 야자수 잎줄기로 학생의 발바닥을 때렸다. 이 매는 정말 아팠다. 그래서 우리는 매를 맞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도 열심히 꾸란을 암송했지만 나에게는 긍정적인 동기도 있었다. 나는 가족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더욱 열심히 꾸란을 외웠다. 우리 가족들은 내가 꾸란을 암송하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새벽 공부
새벽에 아버지와 삼촌이 새벽기도를 드리러 모스크에 갈 때에는 나도 함께 따라나섰다. 새벽기도는 3:30-4:30까지 이어졌다. 기도가 끝나면 아버지와 삼촌은 일터로 나가기 전에 두 시간 가량 더 잠을 자기 위해 보통 집으로 갔지만 나는 모스크에 남아 꾸란을 암기하곤 했다. 이틀 동안 외운 내용을 스스로 테스트한 다음 새로운 절을 외우기 시작했다. 암기가 제대로 되었다는 확신이 들어야만 다음 절로 넘어갔다. 나는 절의 첫째 행을 읽은 다음 꾸란을 덮고는 모스크의 한쪽 구석에서 다른 쪽 구석까지 걸으며 그 행을 반복하여 읊었다. 첫째 행의 암기가 끝나면 다시 꾸란을 펴고 둘째 행을 읽었다. 이런 책으로 해서 절을 모두 외울 때까지 계속했다. 나는 전에 암기한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한 달에 2~3일은 복습을 했다. 몇 달 전에 암기했던 내용에 대해서도 척척 대답할 수 있었다. 연말에는 그 해에 암기한 모든 내용을 테스트하는 구두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선생님 두 분이 번갈아 질문을 하는 형식으로 치러졌는데 몇 장을 암기해보라거나 어느 구절을 제시한 다음 그 구절이 포함된 수라(장)의 명칭을 묻고는 그 구절에 이어지는 부분을 암송하게 했다.
내 초등학교 시절은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나보다 먼저 꾸란을 암기한 사촌형이 자극제가 되었다. 사촌형은 치과 의술을 공부하러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꾸란 암송을 그만두지 않았다. 나는 열두 살에 꾸란 암기를 끝낸 후 내가 암기한 내용을 이해하려고 꾸란에 대한 해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꾸란에 의거한 삶
나의 꾸란 공부와 세상사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진전되었다. 꾸란은 유대인들의 위험에 대한 교리와 유대인들이 이슬람의 메신저 무함마드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를 나타내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무슬림으로서 무함마드를 본보기로 삼아 우리의 영토와 우리의 신앙을 지켜야 할 때라고 느꼈다.
마크 A. 가브리엘 지음, 『이슬람과 유대인, 그 끝나지 않은 전쟁』, 중근동연구소 옮김, 39-41
그리고 신재혁(반석중앙교회 담임목사)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들의 교육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선교현장에서 경험한 이슬람식 어린이 교육
20년간 중국의 서북지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위구르족, 회족, 카작족 등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무슬림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들은 중국에 거주하고 있어서 아랍문화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아랍어로 쓰인 꾸란을 암송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철저하게 이슬람식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중국의 무슬림이 얼마나 철저히 어린이 교육하고 있는지 발견하게 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어느 날 중국 서북지역의 관문도시인 서안에 있는 오래된 회족 모스크를 찾아갔다. 회족은 1400년 전 아랍에서 건너온 무슬림이 중국에 정착해 형성된 소수민족으로서, 언어나 외모는 중국 한족에 완전히 동화되었지만, 신앙은 철저히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민족이다. 모스크 안에 많은 초등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꾸란을 공부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해 모국어도 아닌 아랍어 꾸란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가 여름방학을 이용해 ‘여름성경학교’를 열듯이 그들도 ‘여름꾸란학교’를 여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학교가 무려 한 달 동안 운영된다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가 불과 2~3일 동안만 하는 여름 행사를 그들은 한 달 내내 지속했다. 그것은 그들이 꾸란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다음 세대를 철저히 교육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과연 한국 교회에서 한 달 내내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 자녀를 교회를 보낼 부모가 몇 명이나 될까? 학업보다도 신앙을 더 소중히 여기며 기꺼이 자녀를 한 달 내내 이슬람 교육을 받도록 격려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회족 부모들은 자녀가 대학교에 진학하면 세상에 물들 염려가 크기 때문에 오히려 대학 진학을 꺼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먹고살 정도만 배우면 되지, 굳이 대학까지 가서 세속화될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 다니지 않고 식당에서 일하거나 노점상을 하는 회족 청소년들을 적잖게 볼 수 있었다. 이슬람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 대학을 포기하고 일찍이 직업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학업보다도 신앙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 기독교 가정의 부모들과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 사례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한 위구르족 청년의 집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 청년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잠시 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알고 보니 무슬림의 다섯 가지 종교 의무 중 하나인 살라(salah)를 하러 간 것이었다. 살라(salah)란 하루에 다섯 번 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에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정오에는 모스크에 모여 집단 예배를 드리고, 그 외 시간에는 집이나 길바닥에서 개인적으로 행하기도 한다. 그날은 손님 때문이었는지 모스크에 가지는 않고 자신의 방에서 15분이 넘도록 살라를 했다. 그 청년은 중국어나 위구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뭔가를 암송했다.
“무슨 언어로 기도를 했습니까?”
“아랍어로 기도를 했습니다”
“아랍어도 할 줄 압니까? 중국에 사는데 어떻게 아랍어로 기도할 수 있지요?”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하는 기도 소리를 듣고 배웠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랍어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날 위구르 청년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두 가지 큰 충격을 받았다.
첫째, 손님이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의무를 철저히 수행했다.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이슬람 교육을 철저히 받았는지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었다. 무슬림 가정은 자식을 철저히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계승해 나가고 있었다. 손님 접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앙이며, 신앙을 위해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둘째, 그들은 모국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랍어를 어릴 때부터 듣고 배우게 함으로써 꾸란을 유창하게 암송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 가정에서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성경을 유창하게 암송하는 것과 같다. 사실상 그런 기독교인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랍과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국의 한 소수민족이 꾸란을 아랍어로 능숙하게 암송하는 모습에 적잖은 도전과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 본 기독교와 이슬람의 비교를 해 주시는 신재혁 목사님의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회의 교육과 이슬람교의 교육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정확히 알려주신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역사 2000년을 돌이켜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쉬지 않고 이방 땅으로 전파되어 수많은 지역에서 부흥의 흔적을 남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 교회는 쇠퇴했다. 초대 교회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과 터키, 그리고 터툴리안, 사이프리안, 아노비우스, 어거스틴 등 초대 교회의 거인을 탄생시킨 북아프리카를 보면 교회는 흔적만 남아 있고 무슬림이 지배하는 땅으로 바뀌어 버렸다. 종교개혁의 발원지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국가도 웅장한 위엄을 자랑하던 교회는 모스크로 팔리거나 박물관으로 바뀌고 있다. 왜 과거에 기독교가 흥왕했던 기독교 왕국들은 지금 사라졌거나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선교역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이방인 선교에는 성공했지만, 후손에게 신앙을 교육하는 데는 실패했다. 수많은 선교사의 사역을 통해 복음이 다른 민족으로 확장되기는 했지만 몇 세대가 지나면서 다시 복음이 필요한 선교대상 지역으로 전락한 것이다. 선교적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여 년간 전 세계 기독교 인구비율이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것은 바로 다음 세대를 길러내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반면 이슬람교는 지난 100년 동안 거의 두 배가 성장했다. 한국에서도 이슬람교는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아시아미래학회 최윤식 회장은 2050년대에 이르면 한국에서 이슬람 인구가 300~400만 명에 달해 기독교를 넘어 제3대 종교로 급부상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실로 충격적인 전망이 아닐 수 없다.
독서모임을 준비하면서 읽은 책 『유럽의 죽음』에서도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1942~2011)는 “신(神)께서 유럽을 이슬람에 주셨다”고 말했다. 유럽이 종국에는 ‘유라비아(유럽+아라비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유럽의 죽음』에 따르면 지금 살아있는 유럽인들은 생전에 생소한 유럽에서 살게 될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그런 미래를 논증한다. 2017년 영국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신생아 이름은 ‘무함마드’였다. 영국 수도 런던의 33개 자치구에서 23개 자치구는 백인이 소수다. 2050년에는 스웨덴에서 무슬림 비중이 20.5%가 된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에서는 15세 이하 인구의 50% 이상을 무슬림이 차지하게 된다. 게다가 많은 백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주지 못하는 소속감이나 확신 같은 것을 이슬람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글판 기준으로 19장 506페이지에 걸쳐, 유럽 다문화주의의 실패를 증언하는 책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 유럽은 자살하는 중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 지도자들은 자살을 선택했다. 유럽인들이 이 결정을 따르기로 선택할지는 당연히 또 다른 문제다.” 저자 더글러스 머리에 따르면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다. 자살은 상당 부분 다문화주의 정책 때문이다.
오늘은 주로 기독교회와 이슬람의 교육과 관련하여 간단히 살펴보았다. 기독교회의 쇠퇴와 이슬람의 부흥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은 많이 있다. 그러나 자녀를 어떻게 기르고 교육시키는지가 모든 것의 뿌리가 될 것이고, 거기에서 많은 열매들이 나타날 것이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일원화가 되어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도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들과 학부모들과 학교의 교사들이 수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문제를 발견하고, 대안을 찾으며, 가정과 교회와 학교에 적용하기를 힘써야 할 필요를 느낀다. 안일한 자세로 바라만 보다가는 우리의 자녀들은 점점 세상으로, 이슬람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목사님들과 선생님들, 뒷바라지하는 부모님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참여한 자녀들에게 선한 열매가 많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