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촌사필>
역사 속의 공자
공자(BC 551-BC 479)는 주지하듯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이다. 노나라는 중국 동쪽 끝자락에 위치하여 한반도를 마주보는 곳으로 출생지는 산동성 서남부의 곡부였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왕조로 역사상 그 존재가 분명한 것은 '상(商)'인데 그들의 후기 서울이 은이었기 때문에 흔히 은왕조라고도 불린다. 서방에서 발원한 주나라는 이 상나라의 중원 지배권을 꺽고 새로운 통치주체로 등장하면서 자기 혈족들을 각지의 세습제후로 임명하여 신 국토질서를 구축하는 이른바 봉건제도를 실시했다. 그 개척자는 역성 혁명의 주역 무왕과 더불어 동생 주공의 활약이 컸는데 그가 스스로 동쪽 변방을 분봉받은 것도 상의 잔여세력들의 반란 근거지가 동방쪽이었기 때문에 그 통어 필요성 때문으로 알려진다. 공자는 이같은 주공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노나라의 충성된 신민이었고 꿈에라도 주공을 보고자할 정도로 흠모했으나 기실 자기 조상은 그 주에 의해 멸망한 상 혈통의 제후국 '송'의 지배층 후손이었다 한다. 이 사실을 죽음에 접어든 노년에서야 알았다고 하니 어떻게보면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공씨는 노나라에서는 드문 성씨이지만 송나라에서는 흔한 혈족이었다.
증조부의 이름은 공방숙, 아버지는 숙량흘이라고 알려진다.
다만 증조부는 공씨라는 사실이 명기되고 있는데 비해 조부나 아버지의 이름에는 성씨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어쩌면 공자의 집안은 통상적 인식보다 더욱 열악한 근본없는 집안일지도 모른다는 시각인데 이 경우 공씨라는 것 자체가 윤색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 어머니가 현저히 어린 나이에 후처로 공자를 낳았던 점, 그녀가 사거했을 때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 위치조차 몰라 거리에서 초상을 치루었고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아버지 집안 묘소에 매장할 수 있었던 듯한 점도 그의 출신 배경을 살피는데 유의할 점들이다.
당시 노나라에는 계손씨, 맹손씨, 숙손씨가 유력한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어 이를 3가, 3환, 또는 3분공실이라 불렀다. 이들은 전시대 노나라를 통치했던 노 환공(桓公)의 후손들로 각기 1군씩을 장악, 국가를 사실상 분할 지배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특히 계씨의 권력이 강했는데 공자는 이들의 사적 지배를 축소시키고 군주에 해당하는 노나라 공실 권한을 복원시키려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공자는 계씨가의 종주 계환자와 불편한 관계가 되고 결국 노나라를 떠나 망명에 가까운 타국 유랑도 이루어졌다. 그후 계씨가의 권력이 계강자(季康子)로 변화되면서 귀국하고 양자의 관계도 견제와 균형 속에 적절히 타협된 듯하다.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나이 34세때 노나라 대부 맹희자가 아들 의자에게 공부 가르쳐주길 바랐고 의자는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과 더불어 공자에게 예를 배웠다 한다. 후일 남궁경숙의 주청으로 노나라 군주의 허락을 받아 주나라에 가서 예를 배워올 기회를 얻었다고도 하는데 이때 노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그러나 노자는 그 실존성이 모호한 인물로 공자와 동시대인이라는 점은 더욱 안개 속의 이야기다. 후대에 이르러 춘추시대 가장 저명한 두 사상가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어왔으며 상기 기록은 이런 조류의 반영인 듯하다.
위의 책에 공자의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젊은 안씨 여성과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전한다. 이때 야합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설이 구구하나 정상적 결혼은 아니었다고 이해된다. 아버지가 노인이었기 때문에 일찍 사거하였고 공자는 서자로서 가문의 지원 없이 어렵게 자라고 공부한 듯하다. 젊은 시절 비천한 일을 하였던 듯하며 창고지기의 회계업무, 혹은 목장의 짐승 키우기 등 노동에도 종사하였다는 전언도 있다.
그러나 꾸준히 공부하여 말단의 직책이나마 관료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으며 특유의 성실 명석함으로 학문적 역량이 조금씩 알려졌던 듯하다. 고위 직책에 올랐다는 기록들은 그 사실성이 의문스러운 점이 있으며 현실에서 그다지 책임있는 직책을 맡았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학문적 명성이 커져 일군의 제자들이 생겼으며 유력인사들이 자녀교육을 맡기기도 하였던 듯하다.
그중 유력 제자들로 자공, 안회, 자로가 있고 후기 제자들로는 증삼, 자유, 자하, 자장 등을 꼽을 수 있다. 대부분 노나라 사람들이었으나 일부 외지인도 없지 않았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승진을 거듭하자 이를 경계한 제나라에 의해 미인계로서 노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한다. 즉 미인을 노나라에 보내 도성 인근에 배치하였는데 노나라 실권자 계환자가 공자와 사이는 좋았으나 미녀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공자는 실망하여 노나라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자를 미화하기 위한 부회적 성격이 강하며 기실은 계환자와 정적에 가까운 거북스런 위치에 처했던 듯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자는 노나라 군주권을 옹호하고 호족세력을 억압하려는 입장이었는데 호족 중에 가장 강력한 호족이 바로 계씨가였고 그 수장이 계환자였던 것이다. 한때 해당 가문에 반란이 일어나 계환자가 일시 구금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사태 흐름에 공자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자취가 산견된다. 그후 계환자가 권력을 되찾으면서 공자는 회유의 대상이 된 듯하며 한직의 자리에 임명된 듯하나 장년의 웅지를 품은 대사상가로서 그같은 무의미한 위치는 견디기 어려웠던 듯하다. 결국 그는 제대로 된 기회를 찾기 위해 노나라를 떠나 유랑길에 접어드는 것이다.
제자들 중에는 출세한 이들이 여럿 나왔다.
자공은 언변이 좋았고 외교에 능하여 계씨와 노나라에 중용되었으며 후일 공자가 사거하자 상례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한다. 그만큼 판단력이 신망을 받고 있었던 듯하다.
제자 중 년장자로 알려진 자로는 그의 직선적 성격과 함께 노나라에 이어 위나라 공씨의 가신이 되기도 했다. 그후 공씨에 충절을 지키며 난중에 분전하다 피살되었는데 공자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로서 문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만했다.
꽃피지 못하고 사거한 중요 제자로 또한 안회가 있다. 공자가 안회를 칭찬한 글귀는 논어에 허다한데 가난하고 박복하여 젊은 나이에 조사하고 말았다. 공자는 하늘을 우럴어 애도했지만 막상 안회의 아버지가 공자의 수레를 처분하여 장례 비용으로 쓰고자 청을 넣었을 때는 예에 어긋난다고 거절하였다 한다. 어찌보면 매정한 조처일 수 있으나 예를 목숨처럼 중시했던 공자의 소신이 묻어나는 처신이기도 하다.
다만 이 안회는 동양적 관점에서 스승 공자를 절대 숭배한 학도로 그 신중한 성품이 존경되는 바 있으나 자공이나 자로처럼 자기 견해를 가지고 공자와 논란하는 기록이 거의 없어 너무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었나 보는 시각도 가능하다.
반대로 염구(유)란 제자는 계씨가에 벼슬하였으나 자공처럼 공자에 대한 충성보다는 오히려 계씨가의 입장을 존중하는 위치에 섰던 듯하다. 공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천하하다 지쳐있을 때 그를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도록 주선한 것도 염구를 중심한 노나라 거주 공자제자들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백성에 대해 과도한 세금을 부여하는 계씨가의 정책을 앞장 서 추진하는 그를 공자는 사제의 연을 끊는 극단적 방법으로 질타하여 꾸짖었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절연이 언제까지 계속되었던지는 의문이며 그는 여전히 공자 학파 내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던 듯하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주유한 곳은 우선 이웃 위나라였고 거기서 군주격인 위영공의 대접이 신통치 않자 진(陳)으로 가다 광(匡) 땅에서 봉변을 당하게 된다. 우여곡절을 거쳐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위영공의 아내 남자(南子)를 만나게 되는데 이 여성은 근친간 등 품행이 문란한 요사스런 인물이었다. 결국 공자는 위나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曹)나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이 해에 조나라 군주인 노정공이 죽어 다시 송(宋)나라를 향하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환퇴라는 인물이 공자를 살해하려 하였기 때문에 다시 떠나 정(鄭)나라를 향하게 되는데 행로에 상갓집 개와 같다는 조롱을 받기도 한다. 공자 스스로 그 말이 맞다고 자조하며 웃었다는 유모어로 유명한 고사이다.
다시 진(陳)으로 갔으나 마침 오나라왕 부차가 처들어와 3개 읍을 빼앗는가 하면 주변 국들 간에 전란이 있어 혼란스러웠다. 3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 이곳에 머물렀으나 침략이 잦아 마침내 이곳 또한 떠나게 된다.
포라는 지역을 지날 때 다시 한번 봉변을 치루게 되는데 제자들의 격렬한 무장 저항으로 간신히 위기를 피하고 위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위 영공이 포지역을 공격하려는데 공자의 자문을 구했으나 공자는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으면 1년동안 자리를 바로잡고 3년이면 구체적인 성과를 나타낼 수 있을터인데" 한탄하는 말을 남겼다 한다.
결국 위나라에서 거듭 실망하고 서쪽 진(晉)나라로 가려하였으나 뜻이 맞는 진의 유력자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포기하고 또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이란 사람의 집에서 지내다가 진(陳)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러다 혼란한 정치 정세 속에 채(蔡)나라로 옮겨 3년을 보내고 초나라에 갔다가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니 나이는 늙어 63세였다. 이즈음 계환자가 죽고 계강자가 후계자가 되었고 제자들의 중간 역할을 매개로 결국 얼마 후 고국이었던 노나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때는 노의 애공시대로서 계강자의 주도로 공자 제자 염구를 매개로 14년만에 귀국한 것이었다. 그는 돌아온 후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아들과 딸이 존재했음은 논어에 그 편린이 보이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려우니 가까이 두면 교만하고 멀리 두면 원망한다"는 애매한 글귀로 미루어 아내에 대해 다소 실망하고 있었던 것으로 유추하는 시각도 있으나 당시 봉건사회의 풍조나 권력자들을 싸고 도는 여성들의 치마폭에 대한 우려, 또는 그 시대 남성들의 통념의 반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부 기록에는 아내와 갈라선 흔적도 있다.
아들 리(鯉)는 공자보다 먼저 죽었으며 외관(外棺)이 없이 장사지내야 했을 정도로 공자 가문의 경제 사정은 넉넉하지 못했던 듯하다.
손자 원헌은 호를 자사라 하며 사서 중의 하나인 '중용'을 지었다고 전한다. 논어 내 헌문편은 원헌이 공자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걸로 시작하며 해당 편명도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자사 문하의 후학으로 맹자가 나온 것으로 알려지며 공자학이 생명력을 이어가는데 중요 역할을 한 인물로 보인다.
중국사상사 최대의 거인은 73세에 사망하였다.
노 애공 16년(BC 479)이었다.
도성 북쪽 사수 부근에 매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