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TV 리모컨의 음량 조절 버튼이 고장이 났다. 리모컨의 다른 버튼들은 잘 작동이 되는데 유독 그 버튼만 안 되는 것으로 봐서는 건전지가 다 닳은 탓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TV를 시청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으니 그냥 그 상태대로 리모컨을 쓰고 있다. 하지만 며칠 전 음량 조절 버튼이 작동이 안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우리는 보통 뉴스를 시청할 때는 소리를 크게 했다가(이는 아직 영어듣기가 완벽하지 않으니 소리를 크게 해서라도 알아듣기 위함이다) 중간 광고 시간에는 소리를 줄이곤 하는데(같은 음량 크기인데도 광고 방송의 소리는 일반 방송의 소리보다 더 크다는 점에도 그 이유가 있다), 그날 역시 중간 광고가 나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리모컨의 음량 조절 버튼 '▼'을 눌렀다.
중간 광고가 끝나고 다시 뉴스가 TV 화면에 나오자 나는 소리를 키우기 위하여 리모컨의 '▲'을 눌렀다. 그런데 소리가 커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을 다시 눌렀더니 그건 작동이 되어 음량이 10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다시 ▲을 눌러 소리를 키우려고 했지만 여전히 음량 증가는 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을 눌러 보았더니 잘 작동이 되어 마침내 음량이 '0'이 되었다.
음량이 0이 된 TV 화면 속의 앵커는 어항 속의 붕어처럼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을 눌러도 화면 속의 앵커는 어항을 벗어나지 못했다. 앵커의 입을 떠났지만 TV 화면이라는 어항 속에 갇혀 내 귀에까지는 닿지 못하고 있는 그 벙어리 뉴스가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은 잠시였고 나는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리모컨의 고장으로 TV의 음량이 0에서 멈추었으니 이제부터는 눈으로만 TV를 봐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찾아든 고요함에 딸아이가 자기 방에서 나와 리모컨의 음량 조절 버튼을 눌러보고 건전지를 갈아 끼워보는 등 요모조모 리모컨을 주물러댔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간 광고 시간을 이용하여 잠깐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다가 다시 거실로 돌아온 아내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뉴스 화면을 그저 막막하게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TV 옆에 세워놓은 오디오 세트의 스피커에 내 눈이 머물렀다. 나는 무릎을 치면서 일어섰다. 그래, 저 오디오 세트랑 TV를 잭으로 연결해서 음량 조절은 오디오 세트의 리모컨으로 하면 되겠구나! 보다 생동감 있는 TV 음향을 듣기 위하여 한때 그렇게 오디오 세트와 TV를 연결한 적이 있었음을 나는 기억해낸 것이다.
그래서 받침대 위에 놓인 TV를 끌어내어 뒷면을 살피고 창고 속 어딘가에 있을 잭을 가져가려고 일어서려는데, 딸아이가 말했다.
"아빠, 뭐 그럴 필요까지 있어요? 여기 누르면 되잖아요."
딸아이는 TV 수상기의 밑에 달려 있는 음량 조절 버튼을 눌렀다. 앵커가 토해낸 말이 비로소 어항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앵커의 말은 내 귀에 닿았지만 내 머리 속에서는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아,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나는 왜 그걸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왜 나는, TV는 반드시 리모컨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조절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손으로 직접 채널을 돌리고 음량을 조절하는 구식 흑백 TV를 보면서 자라났던 세대인데도 지금은 리모컨이 고장나면 TV를 못 본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나는 얼마나 변한 것인가.
이 변화는 분명 진화도 아니고 진보도 아닐 터이다. 오히려 중독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리모컨 중독! 그저 손끝만 까닥하고 움직여서 모든 것을 제 맘대로 부리려고 하는 현대 문명의 편의추구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 있는 기구인 리모컨에 어느새 나도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TV 리모컨의 그깟 잔 고장에도 손쉬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던 것이다.
첫댓글 오마이 뉴스에서.....
맞어요. 지기님...우리집 상자도 어느날 리모컨으로 전원을 껐더니 쌔까맣게 되어야 할 화면이 퍼렇게 되더군요. 옆지기는 고장이라고 코오드를 빼보고 바꾸어야 겠느니 어쩌더니 하였지만 제가 손가락으로 버턴을 눌렀더니 제대로 되더군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