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한 미생지신(尾生之信) (김창회)
김창회(본지주필)
옛날에 미생(尾生)이라는 사람이 아름다운 여인과 사귀었다. 그들은 헤어지기가 싫었으나 어찌 할 수가 없는 사정에 의해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우리는 저 다리 밑에서 어느 날 만납시다" 하고 약속하였다. 두 남녀는 그 약속을 서로 믿고 헤어졌다. 미생은 그 여인을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만날 날이 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소낙비가 쏟아진다. 미생은 쏟아지는 비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약속한 다리 밑으로 갔다. 장마철이어서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고 빗발은 더욱 굵어졌다. 미생은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다리 밑에서 그 여인을 기다렸다. 여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은 점점 불어났다. 다릿발에 매달렸던 미생은 드디어 물에 휩쓸려 빠져 죽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바보스럽기도 하고 충직스럽기도 하다. 이러한 신의(信義)를 미생의 신의라고 한다. 이러한 미생의 신의는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비웃음을 사는 경우가 더 많다. 하찮은 약속이라도 목숨을 내놓고 지켜야한다는 뜻으로 가상하지만 헛된 명분 때문에 귀중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을 뿐이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의 소진(蘇秦)열전에도 나오고 장자(莊者)의 도척(盜跖)편에서도 나온다.
참고삼아 말한다면 도척이란 큰 도적을 일컫는다. 장자는 도척편에서 말하기를 명분에 얽매여 죽음을 가벼이 하고 근본으로 돌아가 목숨을 보존하지 않는 자들의 예를 네 가지로 들었다.
첫째로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의 임금 자리를 사퇴하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죽었다. 아무도 그의 시체를 장사지내주지 않았다.
둘째로 포초(鮑焦)라는 사람은 행동을 꾸미고 세상을 비난하다가 나무를 끌어안고 죽었다.
셋째로 신도적(申徒狄)은 임금에게 직언으로 간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돌을 지고 황하(黃河)에 몸을 던져 고기의 밥이 되었다.
넷째로 개자추(介子推)는 진(晋)나라 문공(文公)이 아직 임금이 되기 전에 다른 나라로 전전하며 망명하고 있을 때 그를 도와주며 많은 고생을 했다. 한번은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개자추는 자신이 넓적다리 살을 베어 문공(文公)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뒷날 문공이 임금이 되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 그를 예외로 돌렸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개자추는 그것이 그를 모욕하는 처사라 여기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불에 타서 죽었다. 그날을 한식(寒食)이라한다.
후일에 아름다운 설화를 남기기는 하였으나 모두들 명분에 얽매여 근본을 잃은 자들이다.
어리석고 모자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로 바보, 천치, 머저리, 밥통, 숙맥 등 여러 가지 말로 쓰여 지고 표현된다. 그리고 약간은 누그러진 말로 숙맥 같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바보보다는 바보 같다 하는 말이 좀 더 듣기가 부드러운 표현이다.
숙맥 같다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원래 숙(菽)은 콩을 의미하는 글자이고 맥(麥)은 보리를 뜻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숙맥(菽麥)이라면 글자 그대로 콩과 보리라는 의미이니 단순히 숙맥이라고 해서는 말이 안 되고 숙맥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해야 말이 된다.
숙맥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본래의 말은 숙맥(菽麥) 불변(不辨)이다.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오줌, 똥을 구별하지 못한다. 동과 서를 분간하지 못한다. 이런 따위의 말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별로 해를 입히지 않는다. 이들은 순진무구하여 타인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겠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다. 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렇다면 진짜 바보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 딴은 약은 체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아무 이득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다. 길거리에 나가보라. 이런 바보가 어디에나 지천으로 널려있다.
약은 체 하지만 실제로는 바보 같은 행동을 대표하는 사례로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고사도 있다.
초(楚)나라 사람이 배를 저어 양자강(楊子江)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 도중에 실수로 칼을 물속에 빠뜨렸다. 칼을 건져야 하는데 건질 시간이 없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서 뱃전에 표시를 해두었다. 이곳에서 칼을 잃어버렸으니 표시해두었다가 나중에 찾으리라 이것이 이른바 각주구검이다. 뱃전에 각인을 했다가 잃어버린 칼을 찾는 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이 잔머리를 굴린다면 의외로 자신에게나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이 세상에는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해독을 끼친다. 그가 만약 해물지심이 없는 바보라면 잃어버린 칼을 찾겠다고 배전에 각인을 해두는 따위의 잔재주를 생각해 내지는 않았으리라.
삶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욕심을 적게 하고 몸을 보전하려는 사람은 이름을 피하나니 욕심을 피하기는 쉬우나 이름을 없애기는 정말 어려우니까 하였다.
(保生者 寡慾 保身者 避名 無慾易 無名難)
끝없는 명예욕 때문에 노경(老境)을 망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인들 범부로서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야 마음대로 되지 않을 일일 것이다.
의성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