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섬/정재석- 인력시장. 별빛이 총총한 때부터 간절한 기다림으로 서성이는 사내들을 보면 남해 다도해의 섬들을 보는 것 같다. 아무런 생각 없이 떠있는 것 같아도 속 깊은 곳 세상과 동행하지 못한 서러움을 간직한 곳. 가만히 떠밀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밤이면 대륙으로 다가섰다 새벽이면 다시금 밀려나는 섬. 저 혼자 부대끼고 저 혼자 울고 하는 모습이 어제도 지친 하루였다는 것을 알 것 같다. 날이 뜨면 새들도 난다. 비가 오면 숨어야 하는 새를 닮았다. 노동해야 살 수 있는 육지 옆에서 인력시장은 금방 비워지고, 늦은 몇몇은 노동의 밥그릇을 받아들지 못하고 헛웃음 같은 발걸음을 돌린다. 밤새 내일의 노동을 꿈꾸는 아픔이 다가섰다 밀려나가는 섬을 닮았다. 인력시장 여기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떠도는 섬이다.
비트겐슈타인*을 생각하는 저녁 저녁 예불 시간에 다가오던 범종의 울림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오래도록 생각이 빗물처럼 고인 다음 가랑잎 하나 떨어지는 날 비로소 자유롭게 비상하는 꿈을 상상했다. 언어가 어지럽고 생각이 혼란스러울 때 말 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고 우리가 매듭지어놓은 것을 해체하고 싶었다. 가난이 지겨울 때 당신처럼 우아하게 가난해지고 싶기도 했다. 당신처럼 산골로도 바닷가 오두막으로도 스며들고 싶었다. 극단의 끝에 서 보니 당신처럼 자발적이라는 것은 빗물에 흠뻑 젖은 우리에게는 케인즈의 말처럼 신이 도착한 것이다. 힘겨운 삶에 찾은 늦은 저녁 구례 천은사. 어둠 속 퍼져오는 종의 떨림을 들으면 오래전 당신이 가꾸던 정원과 당신이 바라보던 오두막 옆 바다가 간절해진다.
*영국의 언어논리철학자, 극단적인 삶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
청문회
추궁하고 답변하는 게 아주 익숙하다. 세상사는 방법이 그들끼리는 다른 듯 너무 닮았다. 각론은 달라도 총론의 부패만큼 은 동등의 질량이다. 비난하는 자나 비난 받은 자나 그들만의 세상 이치에 아주 익숙하게 젖어 있다. 그들이 위장 전입한 농 지에서는 풀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한다던 조국의 산하는 3.3제곱미터의 투기 시장에서만 있지 민초의 반도(半 島)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도움 되는 배부른 극소수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한 그들의 기준은 아주 오래 전부터 믿음 없는 얼굴이다. 조국은 없고 가족만 있는 가슴이다. 이런 기준은 청문회에 참석하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필수 자격 요 건이다. 그들이 해석하는 세상에서는 해석을 위한 사전을 펼쳐보면 활자 대신 오만 원 권 지폐가 보인다.
골굴사와 대화하다
당신은 자꾸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꾸 당신은 덤불 숲 속 영역에 더 이상 머물지 말라 하십니다. 동해(東海)가는 한적한 길목 기슭에 석회암 동굴을 세우고 바다 빛 울렁거림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은 남의 속도 모르고 자꾸 세상 빗물 고이듯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바다까지 이어진 젖은 산 빛 유혹에도 겨울잠 같은 어두운 동굴만 고집하는 당신처럼 그렇게 세상에 머물라. 무심無心하라 하십니다. 마애여래좌상을 머리에 이고 무던한 미소로 견디는 당신의 열두 동굴처럼.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은 오랜 친구처럼 말씀하십니다. 천 년 전에 날 알았다는 듯 천년 후 아무도 날 기억 못 할 것을 이미 아는 듯 당신은 날더러 자꾸 당신같이 벙어리가 되라고 하십니다.
중앙아시아 억센 풀의 생명이다. 단호한 대륙의 일어섬이다. 이따금 소소히 불어오는 바람에도 건조하고 유목민은 오늘도 슬프다. 여 기서는 침묵보다 더 고요한 밤이 오고 고원 위로 산맥이 고단하듯 길게 누웠다. 모래 바람에 하루가 금방 저물고 서산은 밤 새 바람 소리를 하늘로 향해 외친다. 걷지 않으면 죽는다. 양을 앞세우고 개울을 건너고 산맥을 넘어 거친 황무지 끝까지. 한 발 한 발 질긴 걸음을 멈추는 밤은 까만 어둠만큼 별이 사방에 내려앉는다. 온갖 희망이 난무하고, 밤새 빛 고운 날개가 날아 다니고, 새벽이 차갑게 열릴 때까지. 지평선 끝 너머까지 거친 황무지의 여기는 바람이 이리 저리 불고, 산그늘이 길게 드리 워진 거친 생, 반쯤은 신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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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괴리 외 하용기 담벼락에 세든 쪽창은 뒷집의 영역이라 여겼다. 가끔, 달그락 대며 창틈을 흔들 때마다 나체의 바람만 들락거렸다. 고장 난 시간이 바람을 따라 서성대던 뒷집, 연탄에 질식한 창백한 벽돌담에 검은 주름이 파도를 타고 각질이 벗겨진 얽은 표정의 보일러 기름통엔 마른 눈물이 굳어있다. 검은 비닐봉지에 유기된 연탄재들이 백골을 드러낸 채 허연 유골가루를 흩뿌리고 부식된 둥근 손잡이가 달린 문이 가난을 탄식하듯 굳어있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절뚝거리는 독거가 기침을 쿨럭대며 나타날 것 같은 스산한 집, 담쟁이 넝쿨마저 도망치듯 지붕위에 쓰러져 울고 있던. 한 뼘, 허공을 사이에 두고 새로 돋아난 도시의 원룸이 눈을 휘둥그레 치켜뜬 채, 주근깨투성이의 슬레이트 지붕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다.
두레박
새벽바다에서 아버지의 두레박을 건져내었다. 염분에 하얗게 부식된 유골처럼 숭숭해진 빛바랜 두레박, 근육이 굳어버린 시침 내 소년의 시간은 안개처럼 아슴푸레하다. 내가 세상 소문을 듣기 전 아버지는 두레박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늘, 바다는 넉넉함을 주었지만 아버지의 두레박은 작았다. 새벽을 깨워 시린 손으로 비린 바다를 퍼 올렸을 아버지, 모자란 물은 항상 슬픔이었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그 두레박으로 별빛을 길어 소년에게 주었다. 별빛은 소년의 꿈으로 자라나 해송처럼 푸르렀다. 알 수 없던 어느 날 별빛을 마시던 소년은 눈부시게 빛나던 별빛들을 아버지를 따라 하늘에게 주어버렸다. 바람에 밀려 도시로 떠난 소년 아버지의 나이만큼 아버지가 되어버린 소년은 새벽바다에서 소년의 두레박을 던진다. 별빛을 수심으로 익사시키던 어둠속의 바다, 깊은 심해의 골목 어딘가 내 소년의 별빛은 잠들어 있을까. 누군가 깊은 수심을 몰래 퍼내던 긴장된 채질들이 은파로 부서지던 새벽의 바다. 알알이 부서지는 은파들이 손사래를 치며 허공으로 사라진다. 창백하게 부식된 시간들의 행간 속에 별빛은 심해의 앙금으로 남아있는 것인가. 얼마를 더 깊이 내려야 내 소년의 별을 퍼 올릴 수 있을까.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텀벙텀벙 시린 손끝으로 새벽바다를 퍼 올린다.
연의 비상
바람의 패륜이라 해도 그것은 나의 운명이다, 오직, 외줄에 목숨을 내 건다는 것 또한 운명이므로 날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걸만하다. 얼레의 줄이 형장의 사슬처럼 서슬 푸르게 늘어지고, 거센 바람이 목을 죄어온다, 목이 타 들어가고 가슴을 옥죄는 두려움이 밀려올지라도 다짐을 꽉 깨문 입술 팽팽하게 죄어오는 긴장된 날줄, 휙, 몸이 던져지고 허공이 쩍 갈라진다. 비상의 울렁증도 역겨움도 느낄 수 없는 찰나, 가물가물 현기증이 났지만 더 높이 날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굴레일 뿐, 팽창되지 않음은 추락을 의미하므로 긴장의 끈을 늦출 순 없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음은 곧 수치다. 날기 위해 발버둥 치던 대지를 내가 품고 있는 순간 그 끝은 아찔하다, 너무 높이 오른 불안감 떨쳐버릴 수 없는 공포 하지만, 나의 꿈은 하늘에 있어 이 또한 숙명이라 해도 바람을 거슬러야 비상 할 수 있는 법. 바람에 휩쓸리는 것은 곧 추락이다.
입춘
산등성이가 겨울을 변제하던 시간. 각질 벗는 굽은 등골마다 땀이 흠뻑 젖어든다. 예외 없이 생명을 잉태시킨 햇살의 체온과 예상을 예상한다던 달력의 날짜들이 혼돈에 뒤척이던 고뇌의 언덕, 손을 뻗어 잡기엔 물컹한 아직은 설익은 2월. 길섶에 외로이 핀 진달래 망울 하나 눈을 본다. 철없이 영근 연분홍 네 눈망울에 엄숙히 감격하다 햇살 꺾어 내리는 길, 꿈결같이 네 넉넉한 품으로 활짝 미소 지을 3월이라던가. 소문 없이 온 산을 독식하여 화르르 불 태웠을 그날을, 무딘 내 귀를 세워 나는 듣고 있다. 휙 돌아설 수 없는 짧지만 긴 여운, 네 소망처럼 훨훨 불타오를 그날을 위한 작은 몸짓 겨울을 밀고 있는 네 팔들의 숭고한 뒤척임이 그리 길지만은 않다.
엄마의 숲
엄마가 가기 전 꿩이 먼저 걸어 나왔다. 둘레둘레 주위를 찢는 경계의 눈빛 꿕, 꿕 솔밭으로 향하던 두 짝 볼이 유독 붉다. 햇살 걸어오다 멈춰선 곳 구름 빠끔히 방문하고 지나간 보리이삭 덤불 헤치면 개똥참외 서너 개 흙을 베고 누워있었다. 엄마, 무릎에 쓱쓱 껍질 문질러 먹던 맛, 눈가에 햇살이 지나가고 입가에 단물이 고였다. 한나절 해가 그렇게도 뜨거웠나. 저녁놀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엄마와 나, 원두막에 무릎 베고 누워 새 쫓고 왔다던가 깡통 종소리 아직도 댕댕한 그 시절. 엄마의 숲, 황금보리밭 철없던 내 뒤춤에 개똥참외 서너 개 꼭 숨어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