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질 신봉자 외
김민우
오랜만에 만난 은사님은 젓가락질 신봉자였다 젓가락질을 사랑한 나머지 젓가락질에 관한 고찰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던 그는 한 20년 세월에 걸쳐 젓가락질을 전도했다는데, 가난하다 못해 젓가락질조차 못 배워서는, 힘들게 주먹 쥐고 젓가락질을 하던 사람들이 젓가락질이라도 잘해서 밥반찬을 잘 먹었으면, 자꾸 안타까워서, 그들에게 오늘도 나는 한민족 유구한 전통의 젓가락질을 선보인다는 게 은사님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20년 간 주먹을 쥐고 젓가락질을 하던 나에게 있어 은사님의 젓가락질은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스터디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도 내내 젓가락질을 찬미하던 은사님에게 참다 참다 나는 불만을 토로했다 “음…… 저는 물리를 공부해서 말이죠, 힘의 평형 법칙으로 보아 제가 주먹 쥐고 하는 젓가 락질로도 충분히 안주를 집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치원 다니던 이래로 20년 간 임상실험까지 마쳤거든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은사님은 비웃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젓가락질하지 말라고 가르쳤잖아? 젓가락질조차 과학적으로 가르치려 드는 거야? “아뇨, 저는 이런 식으로도” 됐고,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하는 너는 포크나 쓰렴, 젓가락질을 모욕하지 마, 젓가락을 모욕하지 말라고, 내가 시범을 보이마, 은사님은 나에게 한 수 가르치려는 듯이 열렬히 젓가락질을 해서 안주를 잡수셨다 “젓가락질을 못해도 젓가락을 쓰다 보면 젓가락질을 나름 연구할 수도 있는 거죠” 뒤이어 나는 은사님이 너무 젓가락질 그 자체에만 손을 쓴다고 지적했는데, 당연히 젓가락질 신봉자라면 젓가락질 하는 데에만 손을 써야지, 어디다 손을 쓸래? “나는 주먹 쥐고 젓가락질을 참 잘한다” 시 쓰는 데에 쓸래? 은사님은 정말 쓸데없이 젓가락질에 자부심을 느꼈다 너, 그런 식으로 주먹 쥐고 젓가락질을 계속하다간 손이 피로해지고…… 병들어서 썩어 들어가고, 젓가락질은커녕 밥주걱도 한 사발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딴 식으로 주먹 쥐려면 젓가락 대신 윷가락이나 던지란 말야, 그럼 윷이야, 윷! 카타르시스라도 느낄 수 있겠지, 가락에 가락으로 침 튀기며 지적질하다, 은사님은 안주를 너무 많이 잡수셨는지 꾸르륵 소리를 내며 자리를 비웠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되지만 좀 화가 나서 같이 있던 선배에게 은사님 뒷담화를 했다 “은사님이 불쌍해요, 젓가락질에 완전 갇혀 있는 건 아닌지” 그러면 네가 젓가락질을 제대로 배워서 은사님보다 젓가락질을 더 잘하면 되지, 선배 역시 은사님처럼 한민족 유구한 전통의 젓가락질을 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보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나는 흥분해서, 주먹 쥐고 젓가락질해서 선생보다 선배보다 더 많이 안주를 먹으려는데, 덩달아 흥분한 손은 주먹을 쥐고 젓가락도 제대로 못 잡아서, 울화통이라도 식히려고 그냥, 입 안에 소주만 막 들이 부어댔다 속은 뒤집어지고, 젓가락도 제대로 못 잡아서 가운데 손가락으로 안주를 찍어먹고 싶은 밤이었다
나의 만년필
나의 만년필은 하얬죠. 보통 만년필은 진한 빛깔인데, 잉크가 얼룩지는 걸 감추기 위해서래요. 그것도 모르고 하얀 게 예뻤어요.
처음 접한 야동에서 순백을 보고 순결한 건 전부 하얗구나, 단단히 착각이 들었던 적에처럼.
만년필은 주인을 닮는다는데
지금은 조금은 누렇게 얼룩지죠. 조금은 촉이 구부러지고 조금은 구부러진 말들을 배설해요.
나의 만년필은 치질에 걸렸나 봐요. 힘줄들이 줄줄이 탈장하는 주먹을 불끈 쥐다 뿌직 끊어진 괄약근처럼 뿌직뿌직 물똥처럼 말을 지려요. 감추지 않고
내가 하얀 만년필과 씨름할 적에 검은 만년필만 쓰던 선배는 못마땅해 했죠. 누런 얼룩도 그렇고, 뭣보다도 힘 주지마라, 만년필도 너도 너덜너덜해진다.
줄줄 지리는 말들이 뭉개졌어요. 중학생 때 싸구려 마스카라 칠하고 어딘가 드나들고 끌려간 같은 반 친구처럼 그게, 아니라,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데…… 낱말들 짠하게 맺혔어요. 채 문장도 되지 못하고 어정어정 마스카라만 번져나갔죠.
가면 갈수록 만년필은 고개를 숙여요. 당당해지려 애쓰는 주먹은 만년필만 두어 번 바닥에 떨어뜨리고
우린 그렇게 낡아가요. 조금은 구부러진 채
……괜찮아요.
너덜너덜한 대로 지껄일 거니깐, 조금은 구부러지는 채
김민우 1989년 서울 출생.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재 서강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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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둠을 들었다 외 김호성
절벽은 몸을 가만히 내밀고서 기다린다 물속으로 뛰어든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우리는 나무의 호흡에 속해 있다 메아리 뒤에 어둠은 한층 깊어지고 절벽은 가슴을 펼친다 덮개가 벗겨져버린 듯이, 두 척의 배가 떠올라 망을 본다 바다는 숨소리로 가득 차 있다 어린 영혼들은 비밀스럽게 파도에 밀려온다 이곳에는 투명한 피부가 스며들어 있고 죽은 고래들은 용해되어 가라앉는다 무서워서 서로 끌어안고 노래를 부르고 몸속에 노래를 숨긴다 여름의 밤보다 더 분명해지는 때가 있다 첨벙거리는 노가 절벽을 두드린다 잠에서 깬 나무는 공중을 향해서 뻗어간다 자신의 팔로 젖은 오솔길을 들어 올리는 것이다 길들은 얇고 모퉁이를 돌면 갑자기 희미해진다 마치 가출한 신에게 피를 공급하는 촉수들 같다 새들만이 아직 길 위를 걷고 있다 그리고 그 뒤를 너와 나만이 따른다 절벽은 달빛에 눌려 납작해진다 조금 밀치기만 해도 물의 갈라진 틈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나의 걸음걸이는 느려서, 한곳을 도는 어미새가 우리와 함께 유영하고 달의 목적지와 우리의 목적지가 서로 포개진다 하늘의 은하수에 가득한 바늘들이 우리의 머리 위를 겨냥한다 한 마디 말이 물속으로 떨어진다 노래가 멈추지 않는다 기침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기침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우리는 다시 걷는다 복면을 쓴 천사들이 마중을 나온다 검은 숲이 떠오르고 있다 나무들의 흐트러지는 모습 속에 어떤 불감이 흐른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야만 한다
붉은 달
나는 창가에 앉아 있다. 죽은 시계를 보면서 밤의 날씨를 예감한다.
치마 속에 숨겨놓은 지도를 꺼내 보여준다. 하얀 앞니가 조금 자란 날에는 붉은 숲에 비가 내릴 것이다. 한쪽 잔화를 잃어 버린 아버지들이 장작을 패고 있다. 빗물의 무게를 견디며 키가 작아지는
늪에 빠진 장화에는 돌멩이들이 가득하다. 눈꺼풀을 닫을 때마다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눈알들. 그것을 찾아오면 너는 창 문을 조금 더 열 것인가.
유리에 비친 얼굴을 문지르면 비가 잠시 멈춘다. 커튼 속에서 너는 젖은 옷을 벗는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 팽창한 달이 해 를 삼킨다. 귓속으로 들어간 달을 꺼내는 데에만 다 쓴 우리의 유년.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있다. 유난히 긴 엄지로 두 눈을 꾹 누르며. 뒤통수를 뚫고 나온 손톱이 가리키는 곳으로 길 잃은 늑대들이 걸어간다.
대문을 긁는 소리에 너는 문을 연다.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늑대의 등에 엄지만한 종기들이 열려 있다. 너희는 끌어안 고 몇 바퀴를 구른다. 살갗과 갈비뼈 사이에서 떨어져 나가는 진흙은 머리카락처럼 단번에 굳는다.
벗겨진 천장에서 다시 비가 내린다. 굴뚝으로 올라가는 너의 뒤태에. 화롯불에. 아버지들이 기어오른다.
김호성 1988년 서울 출생. 상명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