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과거에 교회의 사명과 관련하여 배운 것들을 기억해 본다
대학 시절에 선교단체에서 생활하면서 늘 듣던 말이 “전도, 육성, 파송”이라는 말이었다. 주님의 지상명령이 같이 이야기되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이와 함께 자주 듣던 성경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2절이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여 성경 공부 모임에 초청하고, 제자 양육 교재로 함께 공부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지도자로 세워서 전도하고 육성하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 너무나 빠른 시간에 지도자가 된 학생 중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신앙생활도 정리하는 경우가 있어서 안타깝기도 했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성실하게 예배하고 봉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회에서도 전도하는 시간에 그런 생각이 많이 났다. 전도하는 일과 더불어 양육하는 일이 중요하고, 양육한 사람들이 지도자로 일할 수 있다면 교회는 훨씬 든든한 모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항상 수동적으로 예배에만 참석하고 귀가하는 정도로 생활한다면 그런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양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들은 교육에 힘쓴다. 직분자 교육, 장로 교육, 집사 교육, 임원 교육, 전교회 수양회, 정기 사경회 등 여러 이름과 성격의 교육 활동을 갖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공부한다. 『기독교 강요』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책을 공부하기도 한다.
천주교인들도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을 본다. 이슬람들은 신앙은 곧 생활이니 유명한 육신오행의 의무를 철저히 지키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이나 이단들의 공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공부만 아니라 전 생활이 그 공부에 얽혀 있고, 그것을 무시하는 벌은 무시무시하다.
참고로 이슬람의 육신(六信, إِيمَان 이만)에 해당하는 의무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الله)은 유일신이며 낳아지지도 낳은 적도 낳은 자도 없다.
2. 천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내는 전령이다.
3. 경전: 하나님은 인간에게 많은 성서를 내렸고 그 중에서 완전한 경전은 쿠란이다.
4. 사도: 하나님은 경전과 함께 예언자들(ٱلْأَنۢبِيَاء,나비,prophet)과 사도들(رَسُول,라술,messenger)을 보냈는데 마지막 예언자이자 사도는무함마드다.
5. 최후의 심판: 모든 인간은 하느님이 정한 날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
6. 정명(正命):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뤄진다.
오행은 신앙의 다섯 기둥(五柱)이라고도 부르며, 그 의무는 다음과 같다.
1. 신앙 고백의 의무 (شَهادة, 샤하다) 2. 하루 5번 예배의 의무 (صلاة, 살라트)
3. 자선의 의무 (زكاة, 자카트) 4. 라마단 금식의 의무 (صوم, 사움)
5. 메카 성지 순례의 의무 (حج, 하쯔)
에드먼드 클리우니(Edmund Prosper Clowney, 1917년 7월 30일 - 2005년 3월 20일)는 미국의 신학자, 교육자, 목회자이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총장을 역임하였다. 그가 교회에 대하여 가르친 것에 관하여 쓴 책을 읽다가 공감이 되고, 대학 시절이 생각나서 여기에 그 일부를 옮겨보려고 한다.
클라우니는 교회의 사명과 봉사를 세 가지로 요약해서 제시하기를 좋아한다: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고, 양육으로 서로를 섬기고, 선교로 세계를 섬기는 것이다”; “진정한 거룩에서의 성장은 항상 함께하는 성장이다. 이는 교회의 양육, 사역,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성취된다”.
교회의 양육에 대한 클라우니의 이해는 매우 성경적이고 개혁파적이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교회의 양육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양육이며, 그 양육의 장은 교회, 가정, 학교이고, 그 양육의 목표는 주님을 아는 것이며, 주님의 뜻을 행하게 하는 것이며, 주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양육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장은 공동의 것이다: “그들은 함께 자라간다”(growth together). 또한 양육은 선교를 낳고, 선교 가운데서 진행된다는 것도 클라우니는 강조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을 구주께로 모으려는 우리의 노력에 자녀들을 참여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자녀들을 주님의 양육으로 키우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클라우니는 선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사역도 매우 강조한다. 클라우니는 서문에서부터 “2000년대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구도자들의 편의를 추구하는’(seeker-friendly) 데서 더 나아가서 구도자들에게 보내진(Seeker-sent) 교회, 즉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때로는 구도자 중심의 노력이 그들의 이의 제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지적한다. “보편 교회로서의 교회는,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종족들과 민족들을 사랑의 교제로 묶는 새 인류를 온 세상 앞에 제시하라는 부르심을” 받기 때문이다. 개혁파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클라우니적 Missio Dei 개념 제시로 Clowney, The Church, 158f.=179, 177=199, 186=209를 보라.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온 세계를 지향한다. 교회의 정체는 선교를 통하여 보편성으로 귀결된다”. “선교를 등한히 하는 회중은 쇠약해지고 곧 내적인 불화로 붕괴된다. 그런 교회는 필연적으로 결코 진군하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매일 아침 복음의 나팔 소리를 듣고 환멸을 느끼는 청년들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고, 선교 가운데 있는 교회이다. 그런데 효과적인 선교의 방법은 사랑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 주장에 함축된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라: “십자군은 1,000년에 걸쳐 이루어진 이슬람 땅에 대한 선교를 뿌리부터 잘라 버렸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지하드’(jihad) 곧 그리스도 깃발 아래 싸우는 성전(holy war)으로 바꿔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거를 망쳐 버렸다”.
이전에 출석하던 교회에서 성경을 잘 배우고, 개혁 신앙을 잘 배운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아쉬워하던 것이 전도를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교회 안에 문제가 생기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나 자신도 교회를 옮기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선교를 등한히 하는 회중은 쇠약해지고 곧 내적인 불화로 붕괴된다. 그런 교회는 필연적으로 결코 진군하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매일 아침 복음의 나팔 소리를 듣고 환멸을 느끼는 청년들을 잃어버릴 것이다”. 라는 오늘 글을 읽으면서 좋은 선생님들은 이런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위하여 성자까지 보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고난받게 하셨고, 부활시키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어서 구속 사역을 위한 복음 전도의 사명을 주셨는데 그것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교회를 그저 보고만 계실 수가 없으실 것이다. 오직 지역교회만 강조하고, 예배만 강조하는 교회라면 얼른 보기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자세히 보면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도는 열심히 하는데 양육에는 별로 힘을 기울이지 않는 교회도 정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늘 고만고만한 어린아이 신자들로만 이루어진 교회는 주님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무려 3년간을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며 양육하셨다. 그럼에도 그들의 부족을 잘 아시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셔서 제자들의 삶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신 예수님에게서도 이렇게 철저한 양육을 받고 사명을 감당하는데, 우리 주변의 교회에서는 너무나 쉽게 직분자가 되는 일이 많다. 물론 어떤 교회에서는 직분자를 최소한의 인원으로 제한하고, 그들도 거의 목회자에 비슷할 만큼 엄격하게 교육하고, 교인들의 검증과 동의를 얻어서 직분자로 세운다. 직분자가 하는 일 중에 여러 가지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예배와 관련된 것이기에, 결코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잘 안다면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직분을 맡기를 신중하게 할 것이고, 교회의 목회자도 교인을 확실히 살펴보고 직분을 맡도록 할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책임 있게 할 것이다.
양육을 잘 하는 교회는 교인들을 지도자로 세우는 일도 잘 한다. 교인들이 많으면 목회자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진다. 그래서 최소한 장로들이나, 기관장들은 목회자가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을 분담한다. 그래서 교인들의 모임이 활발해진다. 이런 일은 위험이 존재하는 일이기에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위험이 있다고 모든 일을 목회자가 짊어지고 몸부림치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까? 그것은 30명 전후의 소규모 교회에서는 가능하지만 300명이 넘는 교회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의 삶이나, 가정의 삶을 살아갈 때에도 항상 마음에 “전도, 육성, 파송”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이 사명을 잘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물질과 은사를 드려서 열매 맺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힘써야 할 것이다. 비록 지극히 작은 일에라도 구체적으로 드리고, 일하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