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했 던 설 분위기가 좀처럼 가시질 않아 상원인 대보름까지는 유난히 날짜가 더디게 간다. 이 동안에는 여러 가지 토속 신앙적 행사도 많다. 동네 어구의 서낭당의 서낭나무나 돌담불에는 종이쪼가리가 주렁주렁 매달린 왼산내끼가 둘러쳐지고, 울긋불긋한 헝겊 나부랭이가 갑자기 많이 걸리며, 쌀밥 조밥 보리밥 덩이와 푸성귀 나물에 밤 대추 같은 실과도 한두 개 때로는 엽전도 한두 푼 그리고 짚신짝 같은 것들이 놓여 있다. 누군가가 입던 옷 겉껍데기도 걸려 있고 짚을 깨끗이 추려서 팔 다리를 벌리고 있는 사람 모양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정중하게 버려진 게 많이 눈에 띈다. 서낭당의 돌무더기에는 크고 작은 낯선 돌멩이가 눈에 띄게 쌓인다. 이런 것들은 한해의 액막이(액땜)를 겸해서 그해 소원을 비는 소박한 마음에서, 무엇인가 알 수는 없지만 그 무슨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서낭신한테 빌어 보는 신앙심에서 나오는 행동인 게다. 아침 일찍 여기를 지나가던 나그네가 엽전 한 잎 주어들고 횡재수가 뻗쳤다고 좋아하는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서낭신께 밭인 물건에다 불손하게 손을 댈 수는 없는 법이라고 고고한 체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다. 형편없는 비렁뱅이가 서낭님께 바쳐진 밥이나 과일 같은 걸 대신 먹어주는 수고를 스스로 맡아서 하겠노라고 일부러 때맞추어 찾아오는 얌체도 없지 않다. 그런가 하면 동네 고샅길의 네거리에도, 동네 앞 행길(한길)의 한복판에도 이런 식으로 액막이 한 흔적을 수시로 볼 수가 있다. 장소만 다를 뿐 정신과 의미는 같은 게다. 뒷말랭이(뒷산)나 동네 어귀에 있는 둥구나무에도 왼산내끼가 둘러쳐져 있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나이가 많은 오래된 고목나무는 정초가 될라치면 대개가 이런 행사의 대상이 된다. 그밖에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특정한 바위라든가, 특정한 장소 같은 데에는 으레 이런 행사를 치른 흔적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정월 대보름이 가까운 열사흗날 께는 으레 동네 아낙네가 모여 공동작업으로 샘물을 품는다. 자기네가 일년내 먹고사는 물을 제공해주는 샘이라는 현실감도 있지만, 대보름을 기해서 용왕신께 치성을 드린다는 신앙심도 작용해서 추위도 마다 않고 바가지 두레박 짚수세미 같은 걸 가지고 나와 맘과 힘을 합쳐서 부지런히 샘물을 퍼낸다. 물구멍에서 솟아나는 물이 어찌나 양이 많고 힘차게 솟는지 여럿이서 부지런히 퍼내는데도 당할 수가 없다. 한참 동안 부지런히 품어내다가 샘물이 어지간히 줄면 그중 용감한 젊은 부인 두 사람이 신발도 버선도 벗어 던지고, 치마자락 걷어올려 괴춤에 둘둘 말아 동여매고, 속옷 가랑이를 걷어부치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샘 안으로 텀부덩 뛰어들어간다. 「아이구 차거워라, 아이구 발시려.」하고 소리를 지르며 들어가서는 우선 짚수세미로 물구멍부터 틀어막는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계속해서 물을 퍼내고, 우물 안 사람은 짚수세미로 샘 둘레를 돌며 두 손으로 싹싹 문질러 샘 벽이나 돌 틈에 낀 이끼도 닦아내고 샘 바닥에 지저분하게 쌓인 쓰레기도 쓸어내고 한다. 여름과는 달라서 개구리나 무당벌레 같은 것은 안 보인다. 추운 날씨에 차가운 물을 다루느라 수다를 떨 여유도 없으니 더욱 단결하고 서둘러서 샘 안팎을 깨끗이 하는데 힘을 다한다. 더구나 이번은 샘을 품는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더욱 잘 한다. 샘 안이 깨끗하게 닦아졌으면 물을 쫙쫙 찌얹혀서 싹 부셔내고서는 막았던 짚수세미를 뽑아 물구멍을 따놓고 나온다. 샘독짝도 하나 하나 말끔히 닦아서 샘 안팎이 깨끗해진 다음에, 각기 가지고 나온 물건을 챙겨 들고 정갈한 기분이 돼서 종종걸음으로 돌아간다. 모두 튼 손이 빨갛게 부풀었다. 코끝도 불그스레한 게 몹시 추워 보인다.
대보름날의 전 날인 열나흗날은 나무(땔감) 아홉 망(갈퀴나무 같은걸 담는 새끼로 드문드문 그물처럼 얽어 만든 큰 망태기) 해 들이고 밥 아홉 사발 먹는 날이다. 그리고 오곡밥으로 진 저녁을 일찍 먹는 날이다. 오곡이란 쌀과 보리 콩 기장과 조의 다섯 가지 곡식을 말하는 것이지만, 오곡밥이란 반드시 그 다섯 가지 곡식으로 밥을 지어야만 오곡밥이라는 게 아니고, 여러 가지 곡식을 섞어서 지은 잡곡밥이란 뜻이다. 게다가 여러 가지 나물을 많이 먹는 날이다. 가난한사람은 늘 꽁보리밥도 넉넉히 못 먹고 아니면 죽만 먹고사는 터에 오곡밥이니 잡곡밥이니 하는 건 아무런 뜻도 없는 사치스러운 말잔치다. 더군다나 노상 푸성귀만 먹고사는 사람들한테 나물을 많이 먹는 날이라는 말도 은근히 약오르는 심정이다. 지난해 여름 가을에 뜯어다 말려두고 데쳐두고 한 여러 가지 나물을 내다 삶아서 물에 담가놓고, 건져다 무쳐먹기도 하고 지져먹기도 하든 것을 이날은 한꺼번에 많이 해먹는 게 좀 다를 뿐이다. 나무 아홉 망 한다는 건 농사철이 다가오는지라 겨우내 해이해진 심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어 일을 좀 나우 하라는 뜻일 것이고, 밥 아홉 사발도 역시 밥을 많이 먹는다는 뜻이지 꼭 열에 하나 모자라는 아홉을 말하는 건 아니다.
아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낫을 뒤꽁무니에 꽂고 갈퀴자루에다 망을 꿰어서 둘러메고 뒷말랭이로 올라간다. 마른 잔디 몇 주먹 뜯어서 긁어모아서는 한아름만 되면 망에 담아서 둘러메고 터덜터덜 내려와 한 망이라고 부엌에다 쏟아 놓고, 또 올라가서 똑같은 식으로 또 한 망 해다가 쏟는다. 비탈진 언덕배기 뒷말랑이를 그냥 오르내리기만 해도 힘들텐데 조금씩이라도 나무를 해 나르니 일을 많이 하는 시늉만 하면서도 겨우내 풀어질대로 풀어진 삭신이라 꽤나 힘이 들게다. 점심때가 좀 지났다 싶으면 밥을 먹으라는데 이날은 그게 점심이 아니라 저녁이다. 오곡밥에 오사리 나무새(나물) 푸짐하게 차린 저녁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노상 나물죽 만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들한테 오곡밥이니 잡곡밥이니 푸성귀니 나무새니 하는 말은 귀전에도 안 오는 심술궂은 익살이다. 노다지 먹고사는 게 그것 뿐이라서 지겨워 죽겠는데 무슨 놈의 말질이냐 고 오히려 밉살맞은 넋두리다. 다만 저녁이 일러서 좋을 뿐이다. 대보름날에는 되도록 불을 다루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내일 먹을 밥까지 한꺼번에 지어 놓는 게 일반이다.
대보름에는 이런 것 말고도 여러 가지 풍습이 많다. 아이들이 쥐불놀이를 비롯해 밥서리(밥을 훔쳐다 먹는 장난)를 하기도 하고 밥을 얻어다 먹기도 하며, 더위를 팔기도 하고 귀밝이술을 마시고 부럼도 깨물고 그해 농사를 미리 점쳐보기도 한다. 게다가 여러 가지로 소원을 비는 행사도 가지가지 있다.
일찍 저녁을 먹고 난 아이들은 숟갈 놓기가 무섭게 들로 달려나가 마뚝(제방)에다 쥐불을 놓는다. 겨우내 보리밭에 똥 퍼다 얹힐 제 장군마개 했던 짚북데기가 밭에 널려 있다. 아이들은 그 마른 북데기를 긁어다가 불을 붙여 들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불을 옮겨 지르고 돌아다니며 한껏 신명이 난다. 어떤 아이는 미리 짚을 둬 우큼쯤 1m 남짓한 길이로 꽁꽁 묶어 홰를 만들어 가지고 불을 붙여 들고는 휘휘 내두르면서 뛰어 돌아다닌다. 승벽스러운 놈이 홰를 맨들 제 어머니 몰래 소금을 훔쳐다가 슬슬 뿌리고 싸잡아 묶어서 만든 횃불을 내두를라치면 소금이 후둑후둑 튀며 불똥이 뚝뚝 떨어지는 게 아주 재미가 진진하다. 그놈이 자기가 왕이라고 으시대는 건 당연하다. 아래윗 동네 아이들이 어우러져 놀다가, 지나치게 으시대는 바람에 시비가 붙어서 패싸움이 벌어지는 수도 있지만 대개는 금방 가라앉고 만다. 쥐불이란 논밭 둑에 살고 있는 들쥐를 잡기 위해서 지르는 불인데 아울러 풀숲에 붙어서 월동하는 농작물의 병해충을 박멸하는 목적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뜻은 모르고 그냥 신바람이 나서 불놀이를 하는 것이다.
쥐불놀이로 한참 동안 법석을 대든 아이들이 상의라도 한 듯이 일제히 쥐불놀이를 그만두고 삼삼오오 동네로 들어간다. 이녀석들 속마음으로 밥 얻어다 먹을 궁리를 하며 걸어가는 게다. 자연스럽게 두서넛씩 패를 지어서 밥을 얻으러 나서는데, 반드시 얼게미(성근 체)를 옆구리에 끼고 가서「밥 한술만 주슈」하고 소리를 해야 된다. 아홉 집을 얻어오는 게 불문율인데 남녀 혼합이고, 있는집 아이나 웁넌집 아이나 차별 없이 서로 어우러져 한패다. 뉘집이고 아이들이 밥을 얻으러 오면 줄려고 미리 밥을 마련해 놓고 있다가 한술씩 떠준다. 나물도 반드시 몇 가지씩 준다. 목표한대로 아홉 집을 다 얻으면 적거나 많거나 끌어안고 달음박질쳐서 먹으러 간다. 뉘집 안방으로 가기도 하고 뉘집 사랑으로 가기도 하는데, 얻어온 밥은 으레 양푼이나 큼직한 바가지에다 나물 채 쏟아 넣어 썩썩 비벼가지고 게걸스럽게 퍼먹는다. 개구쟁이 녀석들은 짚동갈이(짚단을 100단씩 묶어 세운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가 먹는 놈도 있다. 모두 즐거운 추억거리다. 특히 웁넌집 아이는 밥을 먹어서 좋고 있는집 아이와 함께 어우러져 먹는 게 더욱 좋다. 이 녀석들이 밥을 다 먹고 나면 이번에는 밥서리를 하러 나선다. 이것도 풍습이요 아이들의 재미다. 몰래살짝 부엌에 들어가 소두방(소댕=솟뚜껑)을 열고 밥을 훔쳐다 먹는 게다. 밥을 훔치러 갈 때에는 지가 바로 진짜 도둑인 것처럼 오금을 꼬부리고 발꿈치를 살짝 들고 발끝에다 힘을 주어 몸뚱이를 앞으로 살금살금 내밀며 사뿐사뿐 걸어서 몰래몰래 부엌으로 들어선다. 방에서「으흠」하고 큰기침 소리가 나면 깜짝 놀래서 섬뜩하고 움츠린다. 어른들이 부러 헛기침을 하는 게다. 웃음 헤픈 녀석이 참질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대면 방안에서 「이놈덜-」하고 겁을 주는 이도 있다. 방에 계신 어른들도 어렸을 때 추억이 되살아나 재미가 나서 그라는 게다. 못들은 척 하고 살금살금 부엌에 들어가 보면 소두방이 반쯤 열려있다. 역시 진짜 도둑놈처럼 오금을 꼬부리고 소리가 안 나게 소두방을 여느라고 손이 바르르 떨린다. 솥 안에는 밥이 치릅쯤 담긴 밥사발이 얌전하게 놓여 있다(아이들이 가져가도록 미리 준비 해 논 게다). 밥을 훔쳐내는데 성공을 한 다음에는 제법 용감하게 소두방 소리가 나거나말거나 쫙 밀어 덮고, 이제는 맘놓고 킥킥거리며 부엌에서 뛰어나와 줄행랑을 놓는다. 이렇게 몇 집 훔쳐가지고는 아무 데나 문문한 집 안방으로 들어가면「이놈덜 많이두 거두어 왔네. 어허! 별쭝맞인 놈덜. 이 밥을 다 먹을 게냐.」하는 이도 있고, 어느 분은 「이녀석덜 밥 으더다 배가 터지게 먹은 지가 월마나 돼서 그새 또 밥을 이렇기 많이 걷어왔어. 밥도둑놈을 붙잡아서 볼기를 좀 치쟎구 왜 그냥 보냈어. 극성맞은 놈들 같으니라구. 그래 이걸 누가 다 먹을겨. 하나도 안 냉기구 다 멀을까?」 끝도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일어나 나가서 집에 있는 건건이(반찬)하고 숟가락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이놈들은 깔깔대고 시시덕거리며 눈 깜짝할 새에 시딱 먹어 치운다. 며칠씩 굶은 사람맹이루 한 숟갈이 주먹만큼 하게 떠서 금방 게눈 감추듯이 해버린다. 하기야 돌멩이도 먹으면 삭힐 만큼 소화력이 왕성할 때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어려운 집 아이들이 퍼먹는 걸 옆에서 보고 있자면 체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게걸스럽게 퍼 다윈다(퍼먹어서 끝내버린다). 아주 포식을 한다. 옆에서 보고 있는 어른도 침이 넘어갈 정도다. 아이들이 먹고 있는 동안에 어머니는 부엌으로 나가 양푼에 숭늉을 들고 들어와서「목 마칠라 물 마시며 먹어라. 아이구 이놈들아 좀 천천히 먹어라. 누가 쫓아오는 이두 없는디 왜 그리 다그쳐 먹너라구 그랴. 자, 물 마셔라 물 마셔.」 빈 그릇에 숭늉을 따라주면서 마시라고 하신다. 하도 게걸스럽게 퍼 넣으니까 은근히 걱정이 돼서 그랬다. 「이놈들이 즈이 집에서는 굶었넝가, 웬 밥을 그렇기 허발을 하고 먹느냐.」이렇게 말을 하려다가 “아차” 하고 나올 뻔한 말을 꼴깍 삼켜서 참는다. 이런게 모두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되겠지만, 특히 가난한 아이들은 너나 내나 함께 어우러져서 밥동냥 하고 밥서리 한 게 재미도 진진하고, 기록적으로 배부르게 먹은 것도 오래오래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추억거리다.
대보름 전날은 밤에 잠을 자면 눈섭이 하얗게 신단다. 언제부터 무슨 유래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은 이걸 곧이곧대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밤이면 잠을 안 자려고 무척 애를 쓴다. 기껏 버티다 못해 잠이 든 동생놈이 자는 동안에 누나가 장난을 쳤다. 밀가루를 물에 개서 몰래 자는 놈 눈섭에다 발라 줬더니, 이 녀석이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섭게 눈섭부터 더듬어 보는 게 아닌가. 필경 이 녀석은 잠을 자면서도 눈섭 시는 꿈을 꾸며 선잠을 잤던 모양이다. 왠지 눈썹이 뻣뻣한 게 꺼끌꺼끌한데 누나도 어머니도 입을 막고 킬킬댄다. 그제서 이놈은 눈섭이 신줄 알고 목을 놓아 통곡을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눈물이 흐르는 바람에 말라붙은 밀가루가 풀어져서 떨어져 내리니까, 그제서 장난친 줄을 알고 누나한테 주먹질을 하며 쫓아다니던 일도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잠을 안 지려고 애쓰는 동안에 할아버지와 함께 보리와 목화 농사를 지어 본다. 껍질 벗긴 하얀 수수깡이 속을 5㎝ 쯤 되게 자른다. 수수깡이 껍질을 2㎜정도의 넓이에 3㎝ 안팎 되는 길이로 잘라 앞서 준비한 하얀 수수깡이 속에다 1cm 좀 못되는 간격으로 댓(5)개씩 넉(4)줄을 돌아가며 비스듬하게 꽂아서 보리 이삭처럼 만든다. 그 이삭에 수수깡 한 마디 길이(15cm 정도)에 넓이 3㎜가량의 껍질을 꽂아서 보리 모감지를 만든다. 이런 수수깡이 보리를 여러 개 만들어 잿더미나 마당 한복판에다 꽂아 세운다. 또 대추나무 가지를 적당하게 꺾어다가 목화송이를 피워서 대추나무 가시에 걸쳐, 마치 목화가 환하게 핀 모양으로 보이게 해서 앞서 만든 보리와 함께 여기저기 세워 놓는다. 이튿날 아침에 보리이삭이 많이 수그러졌으면 올에는 보리가 풍년이 들겠다고 기쁜 표정이 되고, 세워놓은 대로 빳빳한 채 그냥 서 있으면 흉년이겠다고 우울해 한다. 잿간에 세워논 것과 마당에 세워논 것은 으레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도 그런것 따위는 상관이 없다. 보리를 거둬다가 마당 한가운데다 모아놓고 부지깽이로 탁탁 때려 털어서 짚신짝으로 한말 두말 돼다가 광에다 쏟는 시늉을 한다. 이게 보리타작이다. 목화는 밤서리를 맞아서 축축해진 것 말고는 별로 변한 게 없는데도 올 목화농사가 풍년일 게라느니 흉년일 게라느니 하며 멋대로 표정이 밝아졌다 흐려졌다 한다. 이렇게 한해 농사를 미리 점쳐보는 것도 농사하는 사람의 소박한 정서인가.
달불이라는 걸 한다. 적당한 수수깡 한 토막을 잘라다 반으로 딱 쪼개서 재켜놓고 한짝에다 알이 실팍하고 똑 고른 콩 열두 개를 간격이 고르게 꼭꼭 박은 다음, 다른 짝을 전과 같이 덮고 실로 묶어서 마당 한가운데다 놓고 치(키)를 덮어놓는다. 아침에 보리 목화 거둘 때에 함께 거둬다가 열어 보면, 콩이 제법 불은 것도 있고 쇠통(통) 안 붓고 맨송맨송하니 그대로 있는 것도 있다. 위서부터 세어서 여섯 번째 콩이 불었으면 유월은 비가 많이 오겠다고 짐작하고, 일곱 번째 콩이 아주 많이 불었으면 7월에는 비가 많이 내려 장마가 질 모양이란다. 열한 번째 것이 불었으면 동짓달에 눈이 많겠다고 생각하고 세네 번째 콩이 좀 불은듯 하면 삼사월에 봄비가 자주 와서 못자리 모내기는 걱정 없을 것 같다고 스스로 위안이 되지만, 그와 반대로 그것이 붓질 안 했으면 봄비가 안 와서 농사 짓기 힘들겠다고 미리 걱정이 된다. 만약에 콩이 아주 안 불었으면 올에는 대체로 가물어서 농사철에 물 걱정이 많겠다고 근심스러운 표정이 된다. 이처럼 모든 것이 농사와 관계가 깊은 풍습일 뿐만 아니라, 큰 강에 접해 있는 동네라서 강물의 범람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이런 예찰 비슷한 풍습이 전해 내려오는 모양이다. 이런걸 믿고 안 믿는다는 차원을 떠나서, 커나는 아이들한테 이런 것이 정서적이고 정감 어린 풍속으로 받아드려졌으면 좋겠다.
열나흗날 해가 지기 전에 뉘 집에서 나와 엊그제 품은 샘을 또 품는다. 용왕제 지내는 이가 목욕 재계 하는 것과 같은 정갈한 정성으로 우물을 깨끗이 품어내는 게다. 사람들은 집집마다 부엌에 조왕신이 있는 것처럼 샘에는 용왕신이 있는 걸로 믿고 있다. 일년에 한번 용왕신을 위하는 요왕치기(용왕제를 지내는 일)를 하는데, 샘을 말끔히 품어내고 깨끗이 청소한 다음 초저녁에 샘물에다 불을 밝히고 치성을 드린다. 무 뿌리를 짧게 잘라 종발(종지) 모양으로 확을 파가지고, 게다가 들기름을 반쯤 붓고, 창호지로 만든 세발 심지를 세워 불을 당겨(붙여. 켜) 종고리에 담아서 샘물에 띄워 놓는다. 세발심지는 넓이 1㎝에 길이 30㎝쯤 되는 창호지로 심지를 꽈서 1~2cm 되는 발(脚) 세 개를 내가지고 3각대처럼 곧게 세워지게 만든 심지다. 있는 집에서는 놋그릇에 쌀을 수북히 고봉으로 담고 황초(쇠기름을 녹여서 만든 초)에 불을 당겨 쌀 식기에 꽂아 바가지에 담아서 띄운다. 우물 바깥 샘 바닥에는 짚을 깨끗이 추려다 펴고 밥과 나물과 삼색실과(대추, 밤, 감)를 차려놓고 두 손 모아 싹싹 비비며 빌다가는 두 팔을 옆으로 가득 벌려 머리 위로 크게 올려서 앞으로 모아 합장해서 구불구불 절을 올린다. 마음속에 있는 소원을 중얼중얼 외우면서 수도 없이 빌고 절하며 치성을 드리는 게다. 치성 드리기가 끝나면 차려놨든 음식은「구경 왔던 잡귀 잡신들아. 너두 먹구 가거라, 너두 먹구 가거라」하며 숟갈로 조금씩 떠서 사방으로 흩어버리고, 우물 안의 기름불은 그대로 놔둔 채 돌아온다. 아침에 일찍 나와 샘에 바가지나 쌀그릇에 기름이나 황초가 말끔히 타서 얌전하게 사그라졌으면 용왕치기 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가볍고, 기름은 남았는데 불이 꺼졌다던가 쌀그릇에 세워논 황초가 쓸어져서 불이 꺼졌다던가 했으면 용왕께서 흡족하시지 못했나보다고 마음이 무겁다. 샘에서 치르는 용왕치기를 강에 가서 하는 이가 있다. 모든 절차가 샘에서와 똑같이 한다. 다만 강에서 할 제는 기름불을 담은 종고리를 강물에 둥실둥실 떠내려보내는 것만 다르다. 샘에서든 강에서든 용왕치기 할 때에 켜서 받친 심지불이나 초불이 밝고 힘차게 활활 타야 느낌이 좋고 마음이 가볍다.
올에 열살 되는 성권이가 아침에 일어나더니 쪼르르 행남이네로 달려가서 느닷없이「행남아. 행남아」하고 숨이 넘어갈듯이 행남이를 불러댄다. 행남이는 저보다도 한살 위인 친구인데 그때 겨우 이불속에서 기어 나오며 속으로「얘가 아침 일찍 웬 일인가」하고 아무 생각 없이「머-」하고 대답을 하니까 성권이가「내 더-위」하고 더위를 팔고는 깔깔대면서 줄행랑을 놓는다. 행남이는 그제서「낼이 대보름날 더위 파는 날이니께 아침에 더위 사지 말라」고 간밤에 어머니가 일러주시던 말이 생각나서 은근히 뿔다귀가 난다. 행남이는「올치 응석이한티 가서 더위럴 팔어야겄다」고 맘먹고는 그길로 응석이한테로 달려가「응석아. 응석아」하고 두번이나 연거푸 다그쳐 불렀다. 그랬더니, 얼래!(어럽쇼. 어어) 응석이놈이 나오더니「먼젓더-위」하고 더위를 되팔아버리고는「애롱. 약올르-지」하며 셉바닥(혓바닥)을 날름 내민다. 행남이는 더위를 팔길랑서리 도리어 더위를 사버린 게다. 결국 행남이는 이날 아침에 더위를 두 자루나 사고 말았다. 미련한 행남이놈은 집으로 돌아와 어린 동생 말례를 불러서 더위를 팔았다. 어린 말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어리둥절 하는데 어머니가「이녀석아 누구한티 더위럴 못팔어서 제 동생한티 더위 파넌 놈이 워디 있어」하시며 혀를 낄낄 찬다. 행남이가 더위는 더위대로 두 자루나 사먹어 울화가 치미는 데다가 어머니가 하는 말에는 무안해서 죽겠다. “더위 먹는다”는 건 여름에 더위가 심할 때에 생기는 병인데,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하며 기운이 빠지고 때로는 두통이 따르는 경우도 있어 고통스러우나, 별다른 특효약이 없고 흔히 익모초 생즙을 내서 먹거나 약쑥을 삶아 먹고서 낫는다. 여름에 더위는 미상불 무서운 병으로서 어른도 걸리지만 아이들이 많이 걸려서 곤욕을 치르게 한다. 그래서 정월 대보름날 더위를 팔면 제게 걸릴 더위가 그 사람한테로 옮겨가는 것이고, 반대로 더위를 사면 그 사람이 걸려서 앓을 더위를 자기가 덤으로 더 앓는 걸로 믿었다. 그러므로 보름날 더위를 팔고 사는 것은 아이들한테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보름날 아침 해뜨기 전에는 동네 골목에 더위 팔러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더위는 반드시 해가 떠오르기 전 이른 아침에 팔아야 효험이 있단다. 더위는 상대를 불러서 대답을 듣는 즉시로「내더-위」하면 더위를 파는 게고「내더-위」를 부르기 전에 저쪽에서 먼저「먼젓더-위」을 부르면 소위 역습을 당해서 상대방의 더위를 내가 사게 되는 게다. 「내더-위」란「내 더위를 니가 갖어가거라」는 뜻일 게고「먼젓더-위」는「니가 나한테 더위를 팔기 전에 니가 먼저 내 더위를 갖어가거라」는 의미일 게다. 대보름날 아침에는 더위를 팔러 댕기는 아이들이 골목골목에서 내더위, 네더위, 먼젓더위를 서로 연발하는 장면이 귀엽고 볼만하다. 대담한 건지 철모르는 건지 그게 아니라 귀염을 떤다는 게 옳겠지만, 어린 녀석이 어른한테 더위를 팔겠다고 도전하는 놈이 있다. 어린놈 하는 짓이 귀여워서 농으로「이놈아 먼젓더위다」하고 응수할라치면 어린녀석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다라나는 꼴이 귀엽고 재미있다. 어떤 이는 부러「응. 오냐」하고 대답을 할라치면 그놈이 큰 소리로 「내더-위」하며, 슬슬 꽁무니를 빼면서도 마치 큰 호랑이나 한 마리 때려잡은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는 걸 보면 순진무구한 진인(眞人)을 보는 것 같아 귀엽기 만 하다. 더위를 사 준 아저씨가「아 뿔싸, 이거 큰일 났구나 네 녀석한티 더위럴 샀으니 나넌 올 여름에 더위럴 단단이 먹을게구, 넌 올 여름언 더위 안 먹구 잘 너머갈 게다. 잘했다. 됐다.」이렇게 희망을 갖게 해주는 장면이 더욱 정겹다.
보름날 아침에는 아침밥을 먹기 전에 “귀밝이술”이라고 어른이나 아이나 남녀 불문하고 술을 먹는다. 물론 한잔 가득히 마시는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저 상징적으로 조금씩 마신다. 이건 단순히 물리적으로 소리를 잘 알아듣게 한다는 게 아니라 좋은 일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좋은 말 칭찬 말을 많이 듣게 하자는 것일 게다. 한해 동안 기쁜 소리 칭찬하는 말 많이 들으면, 그런 개개인은 물론이지만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가 얼마나 좋은 세상이겠는가. 참으로 훌륭한 풍속이 아닐 수 없다. 가난한사람을 만나면「아침에 귀밝이술이나 읃어 마셨나.」「오늘이 대보름인데 귀밝이술 먹었니, 못 먹었거던 이리 와 지금이래두 한 모금 마셔라」하며 끌고 들어가 술 한 모금 주는 광경은 더욱 아름답고 그윽한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시방 우리가 말하는 위생이니 예방이니 하는 말은 물론 알지도 못했고 그런 관념이 박약했던 때라, 자연 생활환경이 위생적이질 못하고 따라서 오만가지 질병이 끊일 새가 없다. 그중에서도 피부병인 부스럼(여러 가지 종기)은 어른도 아이도 많이 걸리는 지저분하고 귀찮은 병이다. 딱 정해진 병명이나 일정한 증상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특효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약 저 약 보고 듣는대로 좋다는 약을 수 없이 쓰다 보면 어느 약의 효험이었는지도 모르게 낫기도 하고 오래오래 안 낫아서 무진장 고생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부실먹(부스럼)은 참 무섭고 성가스러운(성가신) 병이다. 워낙에 성가신 병이라 미리 안 앓게 하는 방법 즉 예방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한 게 기껏 대보름날 부럼을 깨무는 게다. 아무 것이나 부스럼에 딱지가 앉은 것처럼 보이는 무엇, 즉 겉보기나 모양새가 부스럼과 유사한 것을 힘껏 빠드득 깨물어 뱉으므로 써 부스럼을 퇴치한다는 유감(類感)을 발산시키는 게 그 목적이다. 그렇다보니까 그중 가깝게 있는 게 밤이고 아니면 호도 같은 껍질이 단단한 과일이 좋고, 깨무는 소리라도 근사하게 나는 게 땅콩이나 잣 같은 것이니 그런 것들을 되도록 소리가 크게 나도록 빠드득 깨물어서 퉤- 하고 뱉어버리는 게다. 첫 번째 것은 “웬수놈의 부스럼”을 다시는 꼼짝달싹도 못하게 꽉 깨물어 부셔서 멀리 내쫓아버리자고 저주하는 감정으로 뱉어버렸고, 그 다음부터는 아예 깨물어서 먹어버린다. 이게“부럼 깨문다”는 게다. 귀밝이술과 더불어 무엇이 됐든지 간에 부럼을 깨물어야 하는 것은 정월보름날 아침 먹기 전의 필수 행사다.
아침식사는 어제저녁에 먹다 남은 오곡밥과 나무새를 눅여서 대충 때우는 게 보통인데, 이날은 한 식구와 같은 짐승(가축)한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식사을 대접한다. 소를 먹이는 집에서는 아침 일찍 해가 떠오르기 전에 동쪽을 향해서 뻗은 복송나무(복숭아나무) 회초리를 꺾어다가 둥글게 휘어서 소 목에 목사리를 둘러준다. 복숭아나무는 귀신이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나무다. 소한테 나뿐 악귀가 범접하지 못하게 하자는 방법으로 이와 같은 귀신이 무서워하는 복숭아나무 회초리를 목에 둘러주는 게다. 개를 먹이면 개에게도 똑같은 의미에서 복숭아나무 목사리를 둘러준다. 소에게는 사람의 아침식사와 똑같은 차림을 치(키)에다 무더기무더기 놔서 오양간 앞에 갖다 놔준다. 된장 간장 고추장까지 빼지 않고 차려다 바칠나치면 소는 그걸 다 먹어버린다. 밥도 잘 먹는다. 남는 건 된장이랑 간장 고추장뿐이다. 어떤 소는 마치 잘 먹었다는 듯이 한참 동안 치를 셉바닥으로 싹싹 핥고 있는 놈도 있다. 소가 이렇게 잘 먹어주면 주인도 마음이 대견스럽다. 그리고 나서 아침 쇠죽 퍼다 주면 후지럭 후지럭 한 구수를 시딱 비워버린다. 개도 대보름날 아침만은 사람 먹는 밥 한 덩어리 덜어서 밥숙늉에다 걸쭉하게 말아다 준다. 목에 복숭아나무 목사리 두른 개는 그 푸짐한 특별식사가 제 밥그릇에 부어지는 동안 꼬리를 치고 네발을 동동 구르며 셉바닥을 내밀어 코빼기를 핥으며 퍽도 초조하다. 개가 덥썩덥썩 한아가리씩 물다시피 먹어대는 걸 보고 있자면 평소에 너무 못 먹여주었구나 싶어 가엾은 생각이 든다. 소도 개도 이 순간만은 사람과 더불어 진짜로 한 식구가 된 감정이다.
해가 지고 달이 뜰라치면 달구경(달맞이)을 한다지만, 그렇게 법썩을 떨만큼 요란한 행사는 아니다. 관심 있는 이가 마루나 마당으로 나와 서서 떠오르는 달을 쳐다보면서「보름달이 유난스럽게도 밝은 걸 보니 올에는 나라가 태평할라나보다」느니 「보롬달이 휘영청 밝질 못한 걸 보닝께 풍년은 못 될라나부다」너니 「달이 남쪽으로 지울었으니 가물겄다」너니 「올 보롬달은 동쪽이 좀 두꺼운 걸 보니께 우리 금철이가 짝얼 찾어 장가를 가게 될라넝가부다」너니 등등 멀쩡한 달을 보고 자기 좋을 대로 평하고 바라고 한다.
2월 초하룻날은 콩 볶아먹는 날이다. 검은 방콩 노란 종콩과 함께 보리와 밀 메밀 같은것도 같이 볶는 데다 메나씨와 볏짚을 잘게 썰어서 함께 볶는다. 볶은 콩을 바가지에 담아들고 집안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콩을 뿌린다. 방안에도 앞뜰에도, 뒤뜰에도 마당에도, 많은 양은 아니지만 동서남북을 돌며 훌훌 뿌린다. 이건 침범해 들어오는 잡귀를 쫓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역시 한해의 무사태평을 비는 취지에서 하는 행사다. 주전부리할 게 없는 아이들이 모처럼 볶은 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콩 한 개 보리 한 알 밀 한 톨씩 아끼고 아끼며 주전거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콩을 까먹어서는 안된단다. 왜냐하면「콩을 까먹으면 의복 못 얻어 입는다」는 속설을 믿기 때문이다. 애들이 콩을 가지고 나갈 때는 어머니가 반드시 이 말을 들려줘서 내보낸다. 어른도 이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가난한사람이 옷을 얻어 입기가 얼마나 어려우면 이렇게 경계를 했을까 싶어 슬프기까지 하다. 있는사람이 볶은콩을 조청으로 뭉쳐서 주먹만한 "콩버무리"로 만들어 애들에게 들려서 삼킨다. 내보내면 웁넌집 아이들이 그걸 보고 부럽기도 하고 먹고싶기도 해서 도리깨침을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