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11일 금요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오늘은 십자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십자가는 '十'자 모양의 표로 고대에는 형벌 도구 혹은 종교적 상징이었으나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 이후에는 그리스도교를 나타내는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리스도교가 출현하기 훨씬 전에 고대민족 사이에서 종교적인 상징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전파된 이래, 십자가를 사형도구로 삼는 일은 폐지되었고, 도리어 그것은 신자에게는 인류구원을 위한 희생의 제단, 또는 죽음과 지옥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이 지고 살아가는 것도 지옥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 되었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구원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십자가의 가장 흔한 모양은 두 나뭇조각이 종목(縱木)의 한 중간에서 교차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횡목(橫木)과 종목이 같은 길이인 경우(그리스식 십자가)와 횡목이 짧고 종목의 아래쪽이 긴 것(라틴식 십자가)이 있습니다. 또 변형으로는 종목이 횡목 위로 돌출하지 않은 성안토니우스 십자가(cruxcommissa)나, 두 나무가 비스듬히 교차하고 있는 성안드레아 십자가(cruxdecussata), 죄표(罪標)와 발판을 나타내는 이중십자가(cruxgemina) 등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이며,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 2, 19-20)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지금은 내가 자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고, 그 십자가는 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고통의 십자가이고, 구원의 십자가이고, 기쁨과 평화와 행복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을 수 있으며,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죽었다가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십자가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정말 자랑스러운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이 고통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또한 화합과 일치를 위한 노력입니다. 기쁘게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4,32-4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2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33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4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35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36 그분께서는 너희를 깨우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당신의 소리를 너희에게 들려주셨다.
또 땅 위에서는 당신의 큰 불을 너희에게 보여 주시고,
너희가 불 가운데에서 울려 나오는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해 주셨다.
37 그분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
그분께서는 몸소 당신의 큰 힘으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38 그리하여 너희보다 크고 강한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내쫓으시고, 너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오늘 이처럼 이 땅을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신 것이다.
39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40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축일8월 11일 성녀 클라라 (Clare)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 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 연도 : 1194-1253년
같은 이름 :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성녀 클라라(Clara)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인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톨라나(Ortolana)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기도 중에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고 아기 이름을 ‘빛’이란 뜻을 지닌 클라라로 지었다. 귀족 집안의 장녀이자 용모가 뛰어났던 성녀 클라라는 일찍부터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수도자로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려고 결심한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성녀 클라라는 1212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고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되었다.
당시 성 프란치스코는 아직 여성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기에 일단 바스티아(Bastia) 근방 베네딕토 수녀원에 머물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고 친척과 친구들을 동원해 수녀원을 찾았지만, 성별의 표시로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는 성녀 클라라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산 안젤로 디 판초(San Angelo di Panzo)로 옮겼는데, 얼마 후 그녀의 여동생인 아녜스(Agnes)마저 언니에게 와서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녜스만이라도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을 보냈으나, 성녀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끝내 아무도 데려갈 수 없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렵게 모인 성녀 클라라와 몇 명의 자매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모원으로 정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생활양식과 규칙을 작성해 줌으로써 복음적 가난과 기도의 삶으로써 교회의 복음 선포를 지원할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가 시작되었다. 이 수도회는 영국에서 작은 수녀회(Minoresses)로 불리기도 했지만, 현재는 클라라 수도회로 불린다. 성녀 클라라는 121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로부터 ‘가난의 특전’을 얻었는데, 이것은 어떠한 소유권이나 재산도 가지지 않고 전적으로 하느님과 애긍에 의존해 살아도 좋다는 허락이다. 그 후 성녀 클라라는 이 특전을 유지하고자 늘 고심했는데, 오히려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해서 많은 곤경을 겪기도 했다. 이렇게 클라라 수도회의 수녀들은 당시 그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한 생활을 실천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 수도회의 회칙은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성녀 클라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으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특히 성녀 클라라는 40여 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늘 자매들의 뜻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봉사했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던 그녀의 삶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기도와 자문을 얻으려고 그녀를 찾아왔다. 그중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왕과 귀족들도 많이 있었다.
성녀 클라라는 또한 많은 기적으로도 유명하다. 1240년과 41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와 동맹을 맺은 사라센의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성녀 클라라는 부축이 없이는 일어설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한 병중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과 수도 가족을 구하기 위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의지하며 성광을 들고 봉쇄구역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을 향해 나섰다. 성녀 클라라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나가며 눈이 부신 사라센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함으로써 수녀원과 도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작은 빵 하나로 50여 명의 수녀가 먹기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했고, 기도와 강복으로 무수한 중환자를 치유했다. 1252년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에 중병으로 누워있던 성녀 클라라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은 1958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가 성녀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클라라 수도회는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로 퍼져나갔다. 성녀 클라라는 42년의 수도 생활 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어냈다. 1253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는 마지막으로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 받으옵소서”라는 찬가를 부르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선종 2년 만인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곧바로 성인품에 올랐다. 1255년 성녀 클라라를 시성한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라고 말했다. 성녀의 삶이 묻어 있는 산다미아노 성당과 유해가 안치된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대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순례자를 불러모으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클라라 자매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