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의 발명에 비견되는 ‘학습 진단’
수를 기록하는 방법을 잠깐 살피겠습니다.
이집트에서는 1, 10, 100을 나타내는 기호를 사용했습니다. 1을 나타내는 기호가 넷이면 4를 의미합니다. 나열된 기호의 합이 곧 수입니다. 마치 우리가 가지고 쓰는 화폐와 같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것이 어떻게 나열되든 화폐의 크기는 일정합니다. 나열된 기호를 더하면 수가 되기 때문에 이를 가법적(덧셈) 기수법이라 합니다.
중국에서는 10,100,1,000,10,000 등을 나타내는 글자를 이용했습니다(十, 百, 千, 萬). 글자 앞에 기수인 一,二,三,四,五,六,七,八,九를 놓으면 숫자가 됩니다. 萬자 앞에 二를 놓으면 20,000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수라도 모두 나타낼 수 있었지요. 二와 萬을 곱하여 20,000이 되기 때문에 이를 승법적(곱셈) 기수법이라고 합니다.
인도인들도 그리스나 로마인, 또는 그에 앞선 고대의 이집트 사람들처럼 10, 100, 1000, 10000 등에 각각 다른 부호를 쓰는 10진법을 사용했습니다만,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과학적인 기수법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는 인도에서 발명된 것입니다. 6세기경에 그들은 1, 2, 3, 4, 5, 6, 7, 8, 9의 아홉 개의 숫자 외에 ‘0’이라는 숫자를 발명하였습니다. 1∼9까지의 숫자와 0이란 기호를 쓰면 어떤 큰 숫자도 아주 간단하게 또 쉽게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0은 10개의 아라비아 숫자 가운데 ‘없음’을 표시하는 기호입니다. 0을 발명함으로써 아라비아 숫자를 고대의 다른 여러 숫자들 가운데 가장 편리한 숫자로 만들게 됩니다.
0은 아라비아 숫자를 ‘자릿값의 원리’에 따라 쓸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예를 들어 305라는 숫자를 보면 5는 1자리 수이고 0은 10자리 수이며 3은 100자리 수임을 나타냅니다. 수가 아무리 커지더라도 각각의 자릿값이 10진법에 따라 매겨지게 되니까 간단히 숫자로 나타낼 수가 있지요. 아라비아 숫자를 활용하면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이 자유자제로 이루어집니다.
무역업이 활발했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이 수를 사용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이 아라비아 숫자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이 숫자를 악마의 마술이라고 할 만큼 그 사용의 편리함과 간단함에 놀랐답니다. 0은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의 하나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0이라는 숫자 하나가 과학이 발전하는 데 밑바탕이 된 것을 보면 인류의 독창성에 경외감을 갖게 됩니다.
가르치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왜 기수법이야기가 나왔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하찮은 0의 발명이 수학의 혁명을 일으켰다면 가르치는 과정에서 학습자의 현재 학습된 상태를 ‘진단’하는 과정을 발명하여 수업을 진행하는 일이야말로 수업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레이서(R. Glaser)를 소개합니다.
글레이서는 미국의 교육심리학자로서 수업의 일반모형을 제시하였습니다. 수업모형에, 학습 진단 단계를 두어 학습결함을 발견하고, 이를 보충 또는 교정하여 선수학습을 갖추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원시시대부터 교육은 행해져 왔습니다.
아비는 아들이 7세가 넘으면 ①사냥터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②사냥기술을 가르칩니다. ③사냥기술이 습득되었는지 확인하면 가르침은 끝납니다. ①의 과정은 목표를 세우는 과정입니다. ②의 과정은 지도하는 과정입니다. ③의 과정은 평가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목표-지도-평가’로 이루어지는 수업모형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대체로 수업은 이런 과정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글레이서는 좀 다릅니다.
‘목표-지도-평가’라는 3단계모형 속에 ‘진단’을 추가합니다. ‘목표-진단-지도-평가’로 이루어지는 수업의 4단계모형을 개발한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만, ‘진단’단계를 추가한 것은 위에 말한 ‘0’의 발명‘과 같은 깊은 뜻이 숨겨져 있기에 나는 이를 가리켜 ’진단단계의 발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단계 모형의 맹점은 교사의 지도목표와 지도과정 및 평가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까지 가르치겠다는 목표는 또렷하지만 학생의 능력을 판단하지 않고 바로 가르치기에만 전념한 뒤 평가를 해 보면 우수아는 성취도가 높게 나타나겠지만 학습부진아는 항상 뒤처지게 됩니다. 소위 학습결손이 누적되고 맙니다. 학습부진의 책임이 교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에게 벌이 주어집니다.
글레이서는 과감하게도 다음과 같은 수업모형을 제시하기에 이릅니다.
①수업목표의 설정-수업목표는 한 시간의 또는 한 단원의 수업이 끝났을 때 학생들에게 기대되는 성취에 대한 진술입니다.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이 수업목표의 달성 정도를 본인 또는 교사가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인 용어로 표현합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수업목표이지만 학생의 편에서 보면 학습목표입니다.
②출발점 행동의 진단-특정한 행동과제의 학습을 위하여 필요한 선수학습을 알아보는 단계입니다. 선수학습이란 학생이 새로운 목표행동을 획득할 수 있기 전에 이미 획득되어져야 할 행동을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선수학습을 진단하여 그 결함을 발견하고, 이를 보충 또는 교정합니다. 보충이란 약간 미숙한 학생들은 위한 단기처방이지만 교정이란 부진아에 대한 장기처방입니다.
이렇게 하여 학습의 출발점을 다른 학생과 동일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요새 자주 실시하는 진단평가의 목적은 학교 또는 학생의 서열을 매기는 것이 아니고 수업의 출발점을 찾아내어 수업의 초점을 거기에 맞게 하려는 데 활용되어야 합니다.
③수업절차-수업목표 달성을 위한 중심적인 단계로서 교사가 수립한 수업계획안에 따라 수업을 전개해 나갑니다. 효과적인 교사는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매시간 또는 소단원 수업목표의 도달과정을 계속적으로 평가하고 평가결과를 교사와 학생이 확인해 나갑니다. 이는 보충지도의 필요성울 결정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④성취도 평가-총괄평가라고 합니다. 그 결과는 설정된 수업목표의 도달정도를 판단하는 데 이용되고 성적에 반영하며 다음 단위의 교수과정 설계의 기초 자료로 활용합니다.
글레이서의 수업모형에 진단단계를 설정하여 학생들의 출발점을 고르게 한 뒤 본 수업에 임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중요한 발명인지를 설명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국교육개발원은 글레이서보다 한 단계 더 나은 수업모형을 발명하였으니, ‘목표-진단-지도-평가’의 기본 과정에 발전단계를 더 두어 ‘목표-진단-지도-발전-평가’의 5단계 모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발전단계에서는 형성평가를 실시하여 학습 완성자, 부분적 미완성자, 전반적 미완성자로 분류하고, 학습 완성자에게는 심화학습을 시키고, 부분적 미완성자에게는 단기보충학습을, 전반적 미완성자(부진아)에게는 장기교정학습(방과 후 개별지도 등)을 실시하여 학습 결손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교사는 끊임없이 학생들의 학습 진행상황을 살피고 그에 맞는 처방을 하여야 하니 잠시도 휴식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일선 현장에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냅니다.
(2009. 8. 3 남양주시 조카의 풀나무 농장에 머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