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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히는 이빨 도정에 대하여
할머니의 입술 속은 늘상 텅 비어 있었다. 아-, 시켜놓고 몸속을 들여다보면 붉은 구덩이 저만치에서 목젖만 가느다랗게 떨렸다. 자연 교과서에서 만난, ‘나는 튼튼해요 하면서 활짝 웃는 이빨’은커녕 ‘아파요 하면서 엥엥 우는 이빨’조차 단 한 개도 없었다. 밥은 잇몸으로 씹었고 동치미 무나 밤, 옥수수 따위는 절대로 소화시킬 수가 없었다. 썩기 직전의 물렁이 복숭아나 풀섶에 떨어진 홍시만 찾았다. 사과는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서 삼키셨고 가래떡은 조청의 단맛만 빨아야 했다. 도토리묵은 훌훌 넘길 수 있었으나 돼지비계는 씹을 수가 없어서 혓바닥과 잇몸 사이로 한참을 뭉개다가 자근자근 녹여서 목에 넘겼다. 그냥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 붉은 언덕으로 그렇게 생존을 이어가셨다. 그 입술에 뽀뽀를 하는 아홉 살 소년도 썩은 이빨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하던 흑백사진 시절이었고.
그즈음 아버지는 팔뚝 굵은 청년이었고 어머니는 앙가슴 팡팡한 새댁이었다. 어느 늦가을 치통으로 낑낑 싸매는 아들의 팔뚝을 잡더니.
“이리 와라. 썩은 놈을 도려내자.”
재래식 이빨 뽑기에 돌입했다. 아버지가 묶어 맨 문고리 노끈이 팽팽해지면서 모든 물상들이 일제히 숨을 멈췄다. 이제 조선낫 들어 시퍼런 노끈 슥슥 문지르던 문짝을 발라당 열어젖힐 판이다. 단풍나무 이파리들이 일제히 빨갛게 소스라쳤다.
‘살살 해주세요. 아플 것 같아요.’
엄살을 삼키기 위해 참을성 있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나 허당이었다. 첫 번째 썩은 놈 도려내기는 실만 쌩 날아가면서 실패로 끝이 났다. 아버지는 실이 빠지지 않게 이빨 밑동을 다시 한 번 단단하게 묶었다.
‘아프지는 않았어. 증말이야.’
울지 않는 소년이 되기 위해 주먹을 쥐며 자기 최면에 빠졌다. 생각보다 빨리 고통이 사라졌으므로 견딜만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참아내기 연습’에 돌입했다. 정기검진을 하는 동네 의사가 펜치로 이빨을 뽑아내더니, 왈.
“왜 울지 않니? 어린놈답게 그냥 울어 임마.”
그는 ‘장하다. 참을성이 강하구나’라는 칭찬을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건네주는 립써비스로.
“너는 이빨이 칼날 같은 게 완죠니 늑대 이빨이구나. 어렵쇼. 송곳니는 더 자라면 줄톱으로 갈아내야겠는데. 뿌리까지 육식동물 이빨이네.
툭 던지는 바람에 자존감이 생겼다. 사금파리 송곳니로 생고기를 물어뜯을 수 있는 육식동물의 이빨이란다. 영구치가 등장하면서 골격이 조금씩 굳는 중이었으므로 조금씩 완력에의 자신감도 성장하던 즈음이다.
그러나 집안 형제들은 틈만 나면 내 이빨을 ‘옥수수’라고 놀려대었다. 강원도 찰옥수수처럼 촘촘한 결실이 아니라 속이 듬성듬성 비어있는 충청도 메옥수수 중 무녀리 열매로 비유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빨 틈새로 자꾸 음식물 찌꺼기가 끼어드는 것이다. ‘우는 이빨’이 되지 않기 위해 틈새의 음식물을 끄집어내야 했다. 주로 컴퍼스나 못 끄트머리 아니면 대나무 끝을 아주 뾰족하게 잘라서 쑤셨는데 더러는 흉몰의 음식물이 벌레처럼 꾸불텅거리며 꼬챙이 못에 끌려나오기도 했다. (성냥개피에 찍혀 나와 꿈틀거리던 게 진짜 벌레였는지 아니면 김치조각이 흔들리던 거였는지는 지금도 가물가물하다.) 찌꺼기를 끄집어내면 이빨 사이가 뻥 뚫리면서 시원한 느낌이 싸-하게 퍼졌다.
어느 날부터 연필심으로 이빨 틈새를 헤집기 시작한 것이다. 수업 시간에 이빨이 간지러우면 연필심이 가장 가까워서 쉽게 손에 잡혀서 그렇게 시도했는데 하필 연필심이 이빨 틈새에서 툭 부러졌다.
“어렵쇼, 재밌다.”
머리를 흔들자 부러진 연필심 소리가 사금파리 사이에서 달그락달그락 들렸으므로 ‘우히히히’ 과장스레 고개도 돌려보았다. 그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두어 시간 남짓 후 잇몸이 시큰시큰 쑤시기 시작했다. 먼저 왼쪽 볼이 호두알처럼 볼록 튀어나오더니 금세 얼굴 면적이 배구공처럼 퉁퉁 부어오르는 것이다. 그 학교 교감님이던 아버지가 깜짝 놀라 혼비백산으로 손목을 끌었다. 면소재지 병원은 처방 방법을 찾지 못했으므로 완행버스로 서산 시내 호서치과로 치달렸다.
치과의사가 갸웃갸웃 하다가 이빨을 뽑아냈는데.
하필 입술 사이로 연필심 조각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의사와 아버지가 ‘아’ 하는 탄성과 동시에 궁금증을 해소시켰고 소년은 야단맞을 두려움으로 절망에 빠졌다.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는 연필심을 보물단지처럼 종이에 꽁꽁 싸매서 집에까지 가지고 와 어머니에게 보여주며 혀를 차셨다. 어머니는 한 술 더 뜨셨다. 연필심을 다락 위에 넣었다가 마실 오는 손님마다 연필심을 보여주며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는 것이다. 대밭집 부엉이 울음이 파고드는 저물녘 쯤 부은 얼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고.
청년 시절 이후로는 ‘불안한 이빨’에 대한 기억이 솔직히 전혀 없다.
불법 단체 전교조 신문을 돌리면서 ‘학교를 쫓겨나면 학원 강사로 살아갈 수 있어’ 요모조모 두들겨보다가 ‘이가 아니면 잇몸이다’라는 문장을 가끔 삽입시켰을 뿐이다. 강팍한 시국만큼 애국심과 오기도 발동했다. 틈틈이 스크럼에 합류하면서 실체를 확인했다.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자리매김되면서 전교조는 ‘5공청산 회피하고 전교조를 탄압하는 노태우 정권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의무발령제가 깨진 공주사대 졸업생들이 ‘깻잎 팔아 키운 자식 실업자가 웬 말이냐 군부독재 타도하고 2학기에 공부하자’며 삼거리까지 스크럼을 전진시키던 대치시국이다.
이빨로 트럭을 당기는 차력사가 되고 싶었을까.
치킨집에서 최루탄 흔적 털어내다가 이빨로 맥주병을 땄고 객기가 발동하면 콜라병까지 가볍게 해결했다. 콜라병 뚜껑에 사금파리 이빨을 걸어놓으면 마주앉은 벗들까지 똑같이 이빨을 옹물며 힘을 주며 우정을 증명시켰다. 쓰레기장 청소를 하다가 불구덩이를 메우던 중에도 그랬다. 묶은 장작을 해체하기 위해 철사에 이빨을 대자 3학년 1반 아이들 역시 ‘우와’ 하며 똑같이 입술을 옹물며 힘을 주었다. 유리조각도 잘근잘근 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육체의 마지막 전성기였으므로 웬만한 사춘기 수컷들은 완력으로 제압했다. 덩치 큰 애들은 암바나 관절꺾기로 굴복시켰고 중태기는 헤드록으로 혼절시켰고 쬐끄만 아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숑방숑방 집어던졌다.
주먹 한 방에 선풍기 열 대 값 비용을 지불하기도 했다. (이차구차 설명하긴 거시기하지만) 결정적 이유는 폭풍음주 뒤끝이다. 열다섯 연하의 근육질 청년은 부러진 이빨을 퇫 뱉더니 상대방을 가격하는 대신 변기통 배수관을 박살냄으로써 선배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술상 동숙인들이 각다귀 떼처럼 달려들어 몸을 분리 시켰고, 술떡의 교사는.
“너는 스쳐 맞으면 한 방이야. 제대로 맞으면 뻗고.
기고만장 소리치다가 헤룽헤룽 눈을 감았다. 그 후 만날 때마다 서로가 더 낮게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정작 내 이빨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은 거의 전무하다. 그저 포획된 초식동물이 아무리 요동쳐도 끈덕지게 먹잇감을 놓치지 않던 수사자의 튼튼한 이빨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얼룩말 허벅지에 달랑달랑 매달린 채 잇몸을 떼지 않는 늑대의 송곳니 근성도 갖추고 싶었다. 벗들은 문단의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교단의 후배들도 하나씩 승진 준비를 두들기던 즈음이다.
어느 날 신림동 찻집에서 마주앉았던 이공계 천재 허정교수가. “성님, 이빨 틈새가 비었네요.”
하는 바람에, 화장실에 다녀오는 척 거울을 보며 어, 했으나 금세 잊었다. 틈새가 벌어지긴 했지만 아주 흉측하지는 않았다. 찻집의 비스킷을 끼워넣자 감쪽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 가래떡이나 동치미 조각으로 틈새를 메운 다음 거울 앞에서 ‘우히히 구멍을 감췄네’하며 이빨 로망을 즐기기도 했다. 밭두렁 들깨 모종처럼 흔들리던 이빨도 세월만 흐르면 뿌리내리며 굳어지는 줄 알았다. 그때까지는.
그런데 시나브로 ‘벌어진 이빨’의 신경이 거슬리는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사람들 앞에서 커다랗게 웃는 습관이 사라졌다. 수업 시간에 깜박 파안대소로 웃다 보면 앞자리 조무래기들이.
“엣, 선생님 영구 이빨이다.”
그 말이 연달아 접수되면서 세상살이 눈길의 만만찮음이 체득되기 시작했다. 사진빨을 잘 받기 위해 화들짝 웃으면 천상병 시인처럼 듬성듬성한 치아로 둔갑하는 과정을 지우고 싶었다.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자 사람들이 수줍음 타는 아저씨라며 순수하게 봐주는 바람에 어이없기도 했고.
실제적 위기는 2001년도, 대천임해수련원에서 충청도 청소년들과 함께 1박2일 문예캠프를 추진할 때이니, 나이 사십 중반이다. 200여 명의 청소년들과 함께 ‘문학의 밤’ 책임자를 치르면서 몸이 아예 팥죽이 되어버렸다. 가장 무서운 건 뭐니뭐니 해도 돌발사고다. 일단 야밤의 바닷가 외출을 금지시키는 보수적 규칙을 만들고 현관문을 지켰다. 그리고 캠프 운영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빠진 인원 체크와 프로그램 점검으로 녹초가 되었는데 밤 두 시쯤 온몸이 쑤시더니 이튿날 당장 이빨이 동시다발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심히 핥았던 아이스크림부터 첫 반응이 왔다. 시리고 싸-했다. 냉수를 들이킬 때마다 이가 시린 게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그러나 차가운 것에만 신경이 오던 게 점차 과일이나 뜨거운 것으로 반응이 오더니 나중에는 공기만 들이마셔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였나, 이빨 빠지는 꿈에 시달리기도 했다.
턱이 흔들리는 것 같아서 혓바닥으로 밀어내는 순간 이빨 전체가 틀니처럼 뎅그랑 빠지는 꿈이다. 윗니가 빠지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랫니가 빠지면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설도 있었지만 내 꿈에서는 양쪽 다 동시다발로 사라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새벽에 꾼 꿈이므로 모조리 개꿈이라는 해몽이다. (그러나 내 아들 딸이 이빨 빠지는 꿈을 꾸면 진짜 큰 일이 아닌가.) 십 년 전, 그날의 꿈은 내 이빨이 실제로 빠짐으로써 가장 리얼한 결과로 해몽되었다. 엿을 먹다가 이가 실제로 이가 빠졌다. 엿 속에 이빨이 박혔는데 엿 속에 파묻힌 이빨까지 아득아득 깨문 것이다.
앓던 이가 빠지니 풍치의 통증은 없어졌지만, 양치질을 조금만 방심해도 칫솔 사이로 피가 묻어왔다. 동시에 옆의 이빨들이 도미노 현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다를 막은 제방이 터지던 때처럼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막을 방도가 없다. 다시 통증이 재발되면서 밥을 먹는 시간이 저어되었다. 마침내 대학병원으로 투항했다.
대학병원 여의사의 눈빛이 차갑게 꽂히는 바람에 발발 떨었다. 그미는 내 모양이 꾀죄죄해서 빈한한 사내로 판단했는지 다짜고짜 싸고 간편한 방법을 제시했다.
“틀니를 하세횻. 120만 원이면 모두 해결되니.
나는 훈련소 출소 직후 작대기 하나를 갓 단 이등병처럼 부동자세를 취했다.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장난감 같은 소도구를 잇몸에 끼웠다가 빼는 장면을 떠올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된다. 아무리 돈이 싸더라도 몸속에 쇳덩이를 넣었다 빼는 장면은 몸의 등급을 하염없이 추락시킬 것이다. 나는 여의사에게 잠시 후에 돌아온다고 약조하고 그대로 병원을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인터넷 사냥이 시작되었다. 레진을 이용한 때우기 치료나 인레이 치료라는 용어을 처음으로 외우게 되었다. 금이빨로 본떠서 붙이는 방법도 있고 신경치료를 하는 경우라면 이빨을 덧씌우는 크라운 치료만으로도 가능하나 수시로 흔들리는 게 문제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액의 돈이 들어간다.
대형가수 서태지가 은퇴를 했고 브라운관에서는 복제판 랩가수들이 쭉쭉빵빵 신세대 몸매로 무대의 영역을 확장하던 즈음이다. 바둑의 스승 조훈현이 제자 고수 이창호에게 국수의 자리를 넘겨주었고 이만기의 기술 씨름 대신 거구의 백두급들이 모래밭의 카타르시스를 삭감하던 시절이다. 문학판도 마찬가지다. 미래파 시인들의 암호해독식 시어들이 메이저 잡지까지 점령하면서 독서를 위해서는 번역사까지 동행해야할 만큼 문단의 풍토도 바뀌었다. 그만큼 내 몸은 급속 하강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어깨가 아파 칠판 꼭대기를 짚지 못하면서 퇴로가 막힌 것이다. 적막의 장벽에 반드시 길이 있노라고 설파했었는데, 없다. 선명하게 없다. 썩은 이빨에서는 구린내가 더욱 진해졌을 뿐이다.
마흔아홉에 굴복을 선언하면서도 세월은 유수처럼 흘렀다.
그 후 강산이 또 한 바퀴 바뀌더니, 근본이 성한 놈은 여덟 개뿐이다. 뽑고 덮어씌우고 또 정비하며 이빨 속에 그랜저 한 대는 넣고 다니는 것 같다. 오늘은 이빨 세 개를 뽑았더니 발음이 자꾸만 새어나간다. 지금은 목욕탕에서 오랜만에 나의 나신을 만나면서 ‘은교’의 ‘이적요’ 시인보다 더 가느다란 다리를 수차례 비춰보는 중이다. 그리고 버릇처럼 문장 조작의 상념에 빠진다. 이빨이 흔들리는 늙은 악어에게는 어떻게 존재감이 있을까. 풍치 걸린 불도그는 어떤 자존심으로 집을 지킬 수 있을까.
새로 전출가는 대산고등학교에서 나는 교직원 전체에서 최고령의 교사다. 젊은 날 내가 쓸쓸하게 지켜보았던 교무실의 복덕방 노친네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젊은 후배 모두를 껴안는 늙은 교사의 그늘로 남을 것인지는 아직 판단 유보다. 그저 구멍 난 이빨 사이로 촛불을 밝히는 마음으로 초로를 받아드릴 뿐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빨이 튼튼해야 아이들을 떳떳하게 만날 것 같다. 겨울밤을 하염없이 걷다가 그렇게 ···································눈사람으로 남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