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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순연 수필론>
일상의 언어로 직조한 삶의 순수성
여세주/문학평론가, (전)경주대 교수
1. 자신과의 조우를 위한 글쓰기
가부장 제도가 확립되면서, 여성은 어머니와 아내이기를 요구 당하며 살아왔다. 자식을 위한 희생과 남편을 위한 내조를 상찬 받으면서, 여성들은 인고의 자세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무한한 희생과 무조건적 내조를 아름다운 덕목으로 여기면서, 스스로에게 인고를 강요해 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미덕이라는 것이 남성중심주의적 사고의 틀 속에서 형성된 여성미의 포장일 뿐이라는 자각도 없었다. 혹여, 여성 자신으로서의 자의식이 내면에 꿈틀거리더라도, 가슴 깊이 억누르며 그저 침묵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근세기에 들어와 사정은 달라졌다.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삶과는 또 다른 여성 자신으로서의 실체를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여성들이 자기 자신의 삶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적 여성들이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삶을 추구했다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자신만의 삶을 요구하였다는 말이다.
일인다역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데에 현대 여성의 고민이 있다. 수필가 마순연도 그러한 고민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자기 자신보다 어머니와 아내, 즉 주부로서의 삶에 있었다. 주부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마무리할 단계에 이르러서야 그동안 꾹꾹 눌러놓았던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때의 감격을 첫 수필집 《특별한 인연》의 머리글에서 “주부의 품 안에서도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햇볕과의 조우다. 집 밖의 햇살이 더 아름답다는 걸 알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세상 밖의 아름다운 햇살은 어머니나 아내로서의 영역을 벗어나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이다. 마순연에게 수필 쓰기란 바로 그곳에서 만난 자신과의 조우이며 자아의 발견인 셈이다.
2. 언어 운용의 방식
수필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가장 많이 닮았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정확한 의미 공유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언어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수필에서도 거의 그대로 운용된다. 수필은 근본적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면서 객관적인 통찰에 이르고자 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언어 운용 규칙에 따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수필의 언어는 리처드(I.A.Richards)에 의해 정의된 ‘과학의 언어’와도 다르지 않다. 언어의 과학적 사용에서는 하나의 언어가 어떤 개념을 정확하게 전달하여, 하나의 사물만을 지시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과학의 언어는 누구가 보아도 동일한 것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언어기호와 대상은 1:1의 등식관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상의 사실성(事實性)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드러내어 그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마순연은 수필 쓰기에서 이와 같은 일상어의 운용 방식을 그대로 활용한다. 비유의 문장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수사적 만용도 부리지 않고, 미려한 문장을 구사하려고 형용사나 부사를 수식어로 덕지덕지 덧씌우는 언어의 남용도 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용도의 일상어가 지닌 규칙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세계의 인식에 도달하려고 애쓴다. 마순연의 수필이 독자들에게 아주 수더분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언어 운용 방식에 기인한다. 또한 그러한 방식의 언어 운용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어 충실히 전달하는 데에 치중하고자 한 창작 의도의 반증이기도 하다.
경험의 세계를 작품에서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일상의 논리에 의해서 그 세계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도록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런 논리는 일상어 운용 방식에 의해 최적화된다. 교술 장르를 설명하는 조동일의 말을 빌리자면, 실제적 세계가 일상의 논리와 언어에 의해 있는 그대로 인식되듯이, 교술에서는 작품외적 세계의 고유한 의미가 굴절되지 않고 보존된다. 마순연의 수필이 대부분 그러하다. 그의 수필이 이와 같은 교술적 속성에 저항 없이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필에 대한 작가의 장르의식은 매우 선명하다.
마순연은 함축적인 언어 운용으로 서정성을 추구할 만한 작품에서도 일상적 사고와 언어로 대상을 설명한다. <마늘장아찌>에서 마늘이 자식을 품고 사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함축적 언어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마늘의 모습과 어머니의 삶을 견주면서 서로 닮은 사실을 일상의 언어로 설명해 내고 있다. <오후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서 ‘오후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면서, 삶의 의무를 마무리하고 비로소 자신만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시기의 인생을 의미하도록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의미를 설명한다. ‘마늘’이나 ‘오후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가 작품화 되어서도 ‘어머니’나 ‘인생 여유기’로 전환되지 않고 본래의 의미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환유의 원리가 아니라 은유의 원리로 대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조동일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들 수필에서는 작품외적 세계의 전환표현인 ‘세계의 자아화’가 나타나지 않고 ‘자아의 세계화’에 의한 비전환표현이 존재할 뿐이다.
수필가 마순연은 줄거리를 지닌 짧은 이야기를 작품에 끌어들인 작품도 제법 여러 편 썼다. <어떤 동거>, <코리안 드림은 끝나지 않았다>, <특별한 인연>, <봄의 왈츠>, <선산과 수수떡>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스토리를 갖춘 소재를 동원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그리 서사적이지 않다. 이들 가운데 형상화의 극점을 보여주는 <어떤 동거>와 <코리안 드림은 끝나지 않았다>를 제외하고는 서사의 주된 표현 방식인 묘사적 진술보다는 설명적 진술로 이루어져 있고, 스토리가 작품의 일부분으로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순연의 수필은 이처럼 교술문학의 본질적 속성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지 않는다. 대상을 일상의 언어로 자세하게 드러냄으로써, 대상의 본질에 이른다. 그래서 작품을 힘겹게 해석하려고 애쓰지 않고, 언어가 전달하는 그대를 읽어내는 것이 마순연의 수필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다.
3. 진정성 추구의 특별함
수필을 읽다가 보면 반드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을 덧붙이는 작품들을 흔히 본다. 이런 작품은 내용이나 형식에서 수필 장르로서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억지로 해석한 탓에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수필의 미적 가치는 내용을 구성하는 ‘경험과 사유’의 진정성에 달려 있다. 형식의 아름다움은 진정성 다음의 미적 가치이고, 그것 또한 진정성에 뿌리를 둘 때만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구성을 아무리 잘 짜 맞추고 문장을 아무리 예쁘게 꾸미더라도, 작품의 진정성이 부족하면 그 아름다움은 잠시의 시선을 끄는 데 그칠 것이다. 구성이 정연하지 못하고 문체가 거칠어도, 작품의 진정성이 느껴지면 매력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수필의 진성성은 사람으로 친다면 생기와도 같은 것이다. 아무리 못생겨도 아무리 너저분하게 차려 입어도 생기가 넘치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조화로운 구성을 따지고 미려한 문체를 논하는 따위의 평가는 수필의 진정성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 과장되지 않은 진정성은 수필의 원초적 생명력이다.
마순연은 제재로 삼은 사실이나 경험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견강부회하는 해석의 무리를 범하지 않는다. 해석보다는 기록에 치중한다. 사유 중심의 수필보다는 경험 중심의 수필 쓰기를 하고 있다. 관념적 해석에 무게 중심이 쏠리면 사유 중심의 수필이 되고, 사실의 기록에 치중하면 경험 중심의 수필이 되는데, 이치에 맞지 않는 해석을 억지로 덧붙이는 것은 글감을 날것 그대로 기록하여 전달하는 것만 못하다. 억지 해석은 설득력을 얻지 못할뿐더러 수필의 진정성을 오히려 해치기 때문이다. 수필 창작에서 억지로라도 의미 부여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교술의 특성상 수필은 사실이나 경험의 기록만으로도 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마순연의 모든 수필이 의미 없는 경험의 나열로 이루어져 있다거나, 의미를 구체적인 형상 속에 함축하고 있는 형상화의 극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수필집 표제작인 <특별한 인연>이나 <항변>, 그리고 <코리안 드림은 끝나지 않았다>나 <어떤 동거> 등은 보여주기 방식의 진술을 통해 형상화의 극점을 드러낸 작품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작품은 경험을 전달하면서 작가의 고유한 목소리를 표면에 드러내는 말하기 방식의 설명적 진술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경우에는 화자가 일반화를 위한 해석을 하거나 도덕적 성찰을 하기 위하여 수많은 언어를 늘어놓기 마련인데, 마순연의 수필에서는 작가의 이와 같은 목소리가 최소화되어 있다.
<햅쌀밥>을 그 단서의 하나로 삼아볼 만하다. 이 작품은 크게 네 토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수필이다. 첫째 토막에서는 햅쌀밥의 윤기 도는 모습, 구수한 맛, 매끄러운 촉감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느낀다고 했다. 둘째 토막에서는 볍씨가 싹을 틔우고 이식되어,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가는 어려움을 깨닫는 성장을 거치며, 일교차로 단맛을 머금고 탱탱하게 여물어 추수를 맞이하게 되는 과정을 다소 서정적인 목소리로 진술했다. 벼의 성장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진술하지 않고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햅쌀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역추적함으로써 그것의 존재적 가치를 암묵적으로 말하기 위한 묘법이라 여겨진다. 셋째 토막에서는 햅쌀밥을 하는 첫날, 어머니가 햅쌀밥을 먹게 해 준 고마움으로 성주신에 감사의 제를 드리고 정성을 다하여 차려 준 밥상에 덥석 다가가 맛있게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넷째 토막에서는 어머니가 보내온 햅쌀로 정성스런 밥상을 차리고 가족들이 마음속으로나마 감사해 하며 먹기를 바랐으나 모두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고 하였다. 이 작품을 의미의 덩어리로 다시 나눈다면, 크게 두 부분으로 갈라진다. 첫째에서 셋째까지가 한 부분이고, 넷째가 다른 한 부분이다. 앞부분이 햅쌀밥의 가치를 드러내는 덩어리라면, 뒷부분은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렸다. 요즈음 사람들은 햅쌀밥의 소중함에 감사할 줄 모른다는 도덕적 목소리를 직설적으로 드러낼 법한데도 작가는 끝까지 인내한다. 그런 교훈적 주제를 헤아리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셈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어떤 사실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수필적 퍼스나의 언어로서 작가의 가면이다. 마순연은 그러한 윤리적 언어의 가면을 과감히 벗어던진다. 여기에 마순연의 수필이 보여주는 진정성과 특징이 있다. 따라서 윤리적 목소리에 틈입되어 있는 과장된 감정의 흐름도 없고 지식의 현학적인 범람도 나타나지 않는다. 마순연의 수필이 지닌 진정성은 윤리적 목소리를 절제한 날것의 순수함에서 우러나온다고 할 수 있다. ‘있어야 할 것’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충실히 드러내고자 하는 마순연의 수필 창작 특성이 여기서도 입증된다.
4. 사회적 양심의 표출
마순연이 수필 창작에서 윤리적 판단이나 보편적 의미화를 가급적 절제한다고 해서, 작가의식이 무디거나 문제의식이 나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수필에는 사회적인 문제를 들춰내고 있는 작품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사실만으로 그렇지 않다는 반증이 된다.
여류작가들의 첫 수필집은 대체로 가족과의 관계를 다룬 작품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과 양육 과정에서의 번민, 남편과의 불협화음과 포용, 며느리로서의 의무와 갈등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런데 마순연은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의 수필이 다루는 문제는 어느 한편에 편중되어 있지 않다고 할 만큼 매우 다양하다. 그 다양성 속에 그나마 작가의 특별한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이 있다면, 비정상적인 사회에 대한 관심이다. 작가이면서 사회적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마순연은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사회적 양심과 정의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여성의 미적 가치를 몸매의 가냘픔에 두고 과도한 다이어트를 일삼는 현대 사회의 통념을 은근히 지적한 <그 쓰잘데기 없는 것>, 사회적 불신이 초래한 비인간적인 소통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드러낸 <서로에게 길을 묻다>, 홈쇼핑을 하는 것과 대통령 선거판을 비견하고 대통령도 반품하거나 교환할 수 있다면 국민을 기만하는 공약을 남발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러한 헛된 공약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홈쇼핑>, 기계 의존성에 길들여져 인간 주권을 상실해 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설파한 <인간 로봇>,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어느 외국인 여성의 불행한 삶을 형상화한 <코리안 드림은 끝나지 않았다>가 그런 작품들이다. 그 외에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에서는 해외여행의 에티켓을, <원 달러>에서는 캄보디아의 사례에 빗대어 사회적 공인의 부조리를 꿰뚫어 본다. <군자란 이사하다>는 생명체의 존재를 무시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한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에서 작가 마순연이 대단한 이념을 가지고 사회적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풍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수필이 그런 앙가주망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마순연이 지닌 비판의 목소리는 그리 높지도 앙칼지지도 않다. 사회나 정치의 불순함, 나아가서는 인간의 모순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되, 날카로운 칼날을 내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작가가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순수한 양심을 잣대로 삼아 현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호들갑스럽지 않은 마순연의 무던함이 현실 사회를 읽어내고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잘 드러난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질적 존재나 삶의 이치를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수필이 자아의 내면 지향적인 경향에 편중되어 있다. 탈정치적이고 탈사회적인 것을 문학의 순수성으로 생각하며 서정 수필만이 진정한 문학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결과이다. 그러나 수필의 본질을 오해한 채, 사회와 정치 현실에 대한 관심을 배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삶의 환경조건인 사회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도 인간 존재를 궁구하는 일에 해당할진대,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일종의 현실 도피이다. 그리고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나 수필의 계몽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사회나 정치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필가 마순연이 지향하는 사회적 양심은 매우 순수하고도 건전하다.
5. 자기 내면과 수다 떨기로서의 글쓰기
마순연은 수필 쓰기를 자기 내면의 것들에 대한 수다 떨기라고 말한다. 수다란 반드시 해야 할 말도 아니며 조리 정연할 필요도 없다. 실속 없이 말만 풍성한 소통 방식이다. 그러나 이 인식이 작품 구성의 응결성이나 주제의 응집성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면서 그 내면의 웅성거림을 자유분방하게 밖으로 드러낸다는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수필 쓰기에 대한 이러한 판단은 어쩌면 아주 적합한 인식이다.
<밥 한 그릇도>에서는 자신의 수필집이 폐지로 버려져 “누군가의 한 끼 밥 한 그릇도 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 첫 수필집을 세상에 내어 놓는 데 대한 두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수필이 어설프고 서툴다는 겸손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읽을 수도 있다. 자신의 수필에 대한 진단과 비판적 성찰은 겸손이기도 하겠지만, 작가적 자의식의 발로에 기인한 각성이다. 그동안 써온 수십여 편의 작품을 정리하여, 첫 수필집인 《특별한 인연》으로 상재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작가의식의 성장인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안목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가에게는 얼마나 수준 높은 작품을 창작하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창작활동을 얼마나 성실히 지속해 가느냐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수필가 마순연의 두 번째 작품집에는 보다 성숙된 작품들이 가득 채워지리라 믿는다.
-마순연 수필집, [특별한 인연](수필미학사, 2015)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