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로 돌아가기
자연의 이치는 실로 정연하다. 해와 달의 움직임, 날(日)과 달(月)과 해(年)의 순환, 계절의 순환 등 어느 것 하나도 질서에 의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일정한 궤도를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은 채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 속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변화무쌍하고 가변적이기만 한 인생살이도 결국은 순환의 질서 속에 가두어지게 된다.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돌아가고, 무(無)에서 유(有)가 나지만 결국 무(無)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결국 우주의 섭리는 항상 순환의 질서 속에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운동 경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축구 경기를 생각해 보자. 공격 선수는 공격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또 수비 선수는 수비하는 자리에, 골키퍼는 골문 앞에 있어야 한다. 공격 선수의 골인하는 일이 부러워도 그것은 공격 선수의 몫이지 수비 선수의 몫은 아니다. 수비 선수가 가끔씩 공격에 가담한다 하더라도 항상 수비하는 자리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제자리로 돌아가야 조직의 원만한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공격 선수가 어쩌다 수비에 가담하는 경우에도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라도 제자리인 공격선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제자리로 빨리 돌아가지 못하는 선수가 있다면 그는 좋은 선수가 아니다. 어떤 감독도 그런 사람을 선수로 기용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자연은 가을이라는 계절을 통해 제자리로 돌아가기의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보여준다. 가을에 수화하는 열매들이 바로 그것이다. 열매는 곧 씨앗이다. 수확한 모든 열매는 겉보기엔 인간의 풍성한 먹을 거리 역할을 하지만 기실은 자신의 본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인 것이다. 열매는 씨앗이고, 그 씨앗은 또 열매 맺음을 통하여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현혹하는 많은 것들에 정신과 육체와 눈과 귀와 입과 코를 파느라 정신이 없다. 돈에 눈 멀고, 명예에 한 눈 팔고, 자리에 신경 쓰고, 먹거리에 코를 벌름거리며, 육체의 환락을 좇아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내가 나의 자리에 있어야 할텐데 나는 나의 자리가 아닌 탐나는 다른 사람의 자리를 맴돌고 있다. 마치 축구에서 수비 선수가 공격 진영만을 맴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 제철을 파괴해 버린 하우스에서 재배한 계절 파괴 식품처럼 말이다.
축구 경기에서 수비 선수가 수비하는 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축구 선수가 아니듯 현대인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못하는 - 너무 오랫동안 자기 자리를 떠나 남의 자리만 맴돌아 다녔기 때문에) 사람(자기) 아닌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이른바 자아상실 상태인 것이다.
이 가을은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해야할 계절이다. 가을 열매들을 통해 본래의 자아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의 가르침대로 모두가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어야 한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사람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는 없다. 자연과 우주의 질서와 규칙이 엄존하는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근본적 질서와 규칙은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천륜과 인륜이 질서와 규칙에 의해 지켜지지 아니하고 제자리에 있지 않기에 오늘날 현대인은 도덕적 위기의식이 팽배한 사회 속에서 살게 되었다. 조상숭배, 노인 공경, 부모에 효도하는 일보다 출세하기, 돈벌기, 놀기, 먹기, 멋내기 등에 신경 쓰며 살다 보니 역사와 사회의 근본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가정교육도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가정 안에서 윤리와 도덕, 공경과 우애, 효도가 제자리로 돌아갈 때 (가정교육이 제자리를 찾을 때) 우리는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때 학교와 나라와 역사도 함께 그 정체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21세기에 들어 신자유주의 물결과 금융 위기라는 도도하고 거대한 물결 앞에서 고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 고뇌해야 한다. 특히 작가들은 고뇌에 빠져 있어야한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채 널부러져 있는 현실 속에서 괴물(怪物)첨 몸부림해야 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고정 불변의 정체성 속에서 유아독존으로 현존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자연과 우주의 섭리요 그 주재자의 엄숙한 명령이다. 작가는 이 명령에 충실한 심복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