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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豐基郡)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豐基郡)
동쪽으로 영천군(榮川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남쪽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서쪽으로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24리, 북쪽으로 충청도 영춘현(永春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69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1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이다. 고려 초에는 기주(基州)라 부르다가 현종(顯宗)이 길주(吉州)에 귀속시키고,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더니 뒤에 안동부(安東府)에 다시 귀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이 다시 감무를 두어 안동부의 속현(屬縣) 은풍(殷豐)을 예속시켰다. 본조에서는 기천 현감(基川縣監)으로 고쳤는데, 뒤에 문종(文宗)의 태(胎)를 은풍현(殷豐縣)에 안치하게 되자 마침내 두 현(縣)의 이름을 따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속현】 은풍현(殷豐縣) 본래 신라의 적아현(赤牙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은정(殷正)이라 고치고,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은 안동부에 귀속시켰는데, 공양왕(恭讓王) 때 본군(本郡)에 이속(移屬)시켰다. 별명은 은산(殷山)이다. 군 서남쪽 37리에 있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기목(基木)ㆍ기주ㆍ기천(基川)ㆍ영정(永定)ㆍ안정(安定).
【성씨】 본군 정(鄭)ㆍ안(安)ㆍ피(皮)ㆍ방(邦)ㆍ음(陰)ㆍ진(秦)ㆍ신(辛), 김(金) 영월(寧越)ㆍ삼척(三陟). 이(李) 평창(平昌). 최(崔) 흥해(興海) 배(裵) 성주(星州).은풍(殷豐) 오(吳)ㆍ박(朴), 전(全) 김(金)이라 하기도 한다. 신(申). 순흥(順興) 안(安)ㆍ신(申)ㆍ이(李)ㆍ윤(尹), 석(石) 촌성(村姓)이다. 김(金)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풍속】 풍속은 강하고 사나움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 백성은 경상(耕桑)을 즐겨한다. 이선(李宣)의 시.
【형승】 산천이 수려하다 김효정(金孝貞)의 시.
【산천】 죽령(竹嶺) 군 서쪽 24리에 있는데,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에 처음으로 길을 열었다. 소백산(小白山) 순흥현(順興縣)에 있다. 군에서의 거리는 32리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 리(百里)나 구름 속에 꽂혀 있네. 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ㆍ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깨쳤네.” 하였다. 명봉산(鳴鳳山) 은풍현(殷豐縣) 서쪽 16리에 있으며, 본조 문종(文宗)의 태(胎)를 안치했다. 여현(礪峴) 군 남쪽 14리에 있다. 골리현(骨里峴) 군 서쪽 12리에 있다. 경원봉(慶元峯)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22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태(胎)를 안치했다. 윤암봉(輪庵峯)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32리에 있으며, 본조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를 안치했다. 초암동(草庵洞)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45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의 태를 안치했다. 욱금동(郁錦洞)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13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안치했다. 양곡동(陽谷洞) 순흥부(順興府)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다. 죽계(竹溪) 순흥부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23리 떨어져 있다. ○ 이색(李穡)의 안 시어(安侍御)를 전송하여 지은 시(詩)의 서(序)에,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세세로 죽계(竹溪) 가에 살았다.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온다. 산이 크고 물이 멀리 흐르듯, 안씨의 흥성함도 끝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남천(南川) 군 남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은 죽령(竹嶺)에서 나온다. 북천(北川) 군 북쪽 3리에 있다. 그 근원은 욱금동(郁錦洞)에서 나온다. ○ 이상 두 물(남천(南川) 북천(北川))은 군 동쪽 3리에 이르러 합류되어 영천군(榮川郡)의 임천(臨川)에 들어간다. 순흥(順興)의 동천(東川) 하나는 부(府)의 동쪽 1리에 있고, 하나는 부의 동쪽 10리에 있으니, 그 근원은 모두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와 부의 동쪽 13리에 이르러 남ㆍ북의 두 개울이 합친다. 은풍(殷豐)의 동천(東川) 현(縣) 동쪽 20보(步)에 있으며, 그 근원은 골리현(骨里峴)에서 나온다. 서천(西川) 현 서쪽 10리에 있으며, 그 근원은 명봉산(鳴鳳山)에서 나오는데, 현 남쪽 8리에 이르러 동천(東川)과 합류되어 예천군(醴泉郡)의 양천(襄川)이 된다.『신증』 도솔성산(兜率城山) 죽령 아래 있다. 부로성산(夫老城山) 은풍현에 있는데 봉우리 위에 못이 있다.
【토산】 수정석(水精石) 양곡동(陽谷洞)에서 난다 ㆍ인삼(人蔘)ㆍ잣[海松子]ㆍ지치[紫草]ㆍ왕골[莞草]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닥종이[楮]ㆍ은어[銀口魚].
【봉수】 죽령(竹嶺) 봉수 서쪽으로는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망전산에 응한다. 망전산(望前山) 봉수 군 남쪽 8리에 있으니, 동쪽으로는 영천군(榮川郡) 성내산(城內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죽령에 응한다.
『신증』 【누정】 제운루(齊雲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 북쪽 7리에 있다.
【역원】 창락역(昌樂驛) 옛날 순흥(順興)의 땅으로, 군 서쪽 13리에 있다. 승(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屬驛)이 아홉이니 즉 평은(平恩)ㆍ창보(昌保)ㆍ옹천(甕泉)ㆍ유동(幽洞)ㆍ통명(通明)ㆍ안교(安郊)ㆍ도심(道深)ㆍ죽동(竹洞)ㆍ선안(宣安)이다. ○ 승(丞) 1인. 죽동역(竹洞驛) 군 동쪽 19리에 있다. 남원(南院) 군 남쪽 2리에 있다. 산요원(山腰院) 군 서쪽 20리에 있다. 창락역(昌樂驛)의 남원(南院) 군 서쪽 11리에 있다. 순지원(蓴池院) 군 동쪽 10리에 있다. 인빈원(寅賓院) 군 남쪽 27리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 군 북쪽 7리에 있다. ○ 고려 태조(太祖)의 화상[眞]이 문경(聞慶) 가은현(加恩縣) 양산사(陽山寺)에 있었는데, 신우(辛禑 폐왕 우(廢王禑)) 5년에 왜구(倭寇)를 피해서 이곳으로 옮겼다. 성혈사(聖穴寺)ㆍ초암(草庵) 모두 소백산이 있다. 쌍악사(雙岳寺) 은풍현 경청산(警淸山)에 있다. 양지사(陽地寺) 죽령 아래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순흥폐부(順興廢府) 본래 고구려 급벌산군(及伐山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흥주(興州)로 고치고, 성종(成宗) 때에는 순정이라 일컬었으며,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시키고,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렬왕(忠烈王)의 태(胎)를 안치하여 흥녕 현령(興寧縣令)으로 고치고, 충숙왕(忠肅王)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시켰으며,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다. 본조에 와서, 태종(太宗)은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世祖) 임금 때,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이 수인(囚人)들에게 협박되어 난리를 꾀했다 해서, 본군(本郡)에 혁속(革屬)시키고 마아령(麻兒嶺)의 개울 동쪽의 땅은 이를 잘라 영천(榮川)에 귀속시키고, 문수산(文殊山) 개울 동쪽의 땅은 이를 봉화(奉化)에 귀속시켰다. 읍성(邑城)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9척이며 높이가 6척이다. 군에서의 거리는 북쪽으로 22리이다. 인풍현(隣豐縣) 김부식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 이벌지현(伊伐支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고 급산군(岌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등항성(登降城) 군 서쪽 5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남정(南征)했을 때, 이 현(縣)에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백제의 항서(降書)가 이르렀으므로 드디어 주필(駐蹕)했던 곳을 등항성(登降城)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상을곡성(上乙谷城) 은풍현(殷豐縣) 남쪽 34리에 있다. 둘레 9백 80보(步), 높이 5척인데, 안에 10개의 샘과 1개의 개울이 있다. 소백산고성(小白山古城) 산꼭대기에 옛 석성(石城)이 있다. 둘레 1천 4백 28척이다. 감곡부곡(甘谷部曲)ㆍ대룡산부곡(大龍山部曲)ㆍ임곡소(林谷所) 모두 순흥부(順興府) 조에 있다. 숙수사(宿水寺)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 노여(魯璵)의 시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윽한 경치 찾았더니, 난초의 뜰은 10년 전의 모습이어라. 벽의 값어치는 몇 년간 시와 함께 비싸고, 절의 이름은 천고에 물과 더불어 흐르누나. 추위가 산 빛을 미니 스님은 문을 닫고, 차가움이 개울 소리를 누르니 손님은 누대에 오르도다. 휘바람 불며 서성거리니 어느덧 날은 저물며, 난간에 기대어 고개 돌리면 고향 생각 나누나.” 하였다. 경원사(慶元寺)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봉서루(鳳棲樓) 순흥부(順興府)에 있었는데 지금은 황폐되었다. ○ 안축(安軸)의 기(記)에, “나라의 동남쪽에는 본래 산은 하나인데 고개[嶺]는 세 개이니, 태백(太白)ㆍ소백(小白)ㆍ죽령(竹嶺)이 그것이다. 영남(嶺南)에 뿌리박은 첫째 고을은 바로 우리 흥주(興州)이다. 주(州)에서 동쪽으로 가면 황폐하고 편벽된 부락이 나오고, 주에서 똑바로 북쪽으로 가면 태백이 나오며, 북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꺾여 가면 소백이 나오는데 큰 길은 하나도 없고, 주에서 서쪽으로 가면 죽령이 나오는데 서울로 가는 길이고, 주에서 남쪽으로 가면 길이 갈려서 동남의 여러 읍으로 통하게 된다. 고을의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에 나그네들이 출입하는 것은 동ㆍ북쪽으로는 없고 모두 서ㆍ남쪽뿐이다. 옛적에 이곳에 고을을 설치하였을 때 오직 서ㆍ남쪽에만 후정(候亭)을 세운 것은 고을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서정(西亭)은 다만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들이 왕왕 지나칠 뿐이지만, 남정(南亭)은 서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도 이리로 나가고, 남쪽에서 서울 가는 이도 이리로 들어온다. 남쪽의 여러 주에서 임금의 명을 가지고 일을 독려하는 사신은 이리로 들어오지 다른 데로 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공적인 손님이나 사적인 나그네들을 전송하는 일이 없는 날이 없다. 고을 사람들이 서정을 가벼이 보고 남정을 무겁게 보는 것도 또한 사리가 그러한 것이다. 정자는 주의 남쪽 5ㆍ6리쯤 되는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영험한 산악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무성한 수림을 마주보며, 동쪽으로는 푸른 개울에 닿고, 서쪽으로는 너른 들을 누르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 주에서는 누대(樓臺)의 이름이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 많다. 모두 산에 바짝 붙고 깊은 절벽에 있다. 그것이 이름난 것은 아마 산 높고 물 맑기 때문일 것이다. 저처럼 산에 바짝 붙고 깊은 절벽에 있어 비록 맑고 그윽한 멋이 있다고는 하지만, 바라보이는 산은 한두어 번 겹친 것에 지나지 않고, 바라보이는 물은 한두어 번 굽이진 것에 지나지 않아, 두루 바라보더라도 하나의 동굴, 하나의 구렁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은 한 줌의 산, 한 움큼의 물을 얻은 것일 뿐이다. 만약 남쪽으로 가서 이 누정에 오르면, 높은 것으로는 만층으로 깎아지른 정상을 쳐다볼 수 있고, 먼 것으로는 천 겹으로 겹친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다. 이상한 바위들이 우뚝우뚝 하고, 수많은 골짝들이 빙빙 돌고 있으며, 구름의 변화 안개의 엉김이 천태만상이라, 이를 피해서 숨을 수 없다. 게다가 개울 물은 백 갈래로 흐르면서 소용돌이 치고 폭포로 날다가, 산 아래에 모여들면 사납던 형세는 늦추어지고 시끄럽던 소리는 조용해진다. 누정 아래에 이르러서는 깊게 가라앉은 물이 느릿느릿 십여 리나 흐른다. 여울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을 만하고, 돌맹이의 잘다람이 사랑할 만하니 산수(山水)의 크기[大]가 이에서 완비되는 것이다. 해마다 2월이면 농사를 시작한다. 남쪽 밭에 가는 사람들은 누정 아래를 끼고 다니고, 서쪽 들로 나가는 사람은 누정 밖에 줄짓는다. 도랑을 파면 빗물이 소용 없고, 가래를 매면 구름을 기다릴 것 없다. 이 누정은 오직 산수의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사 짓은 풍경을 보는 즐거움도 가졌다. 내가 고을 사람이 되기 때문에 결발(結髮)했을 때 놀던 곳이다. 관직에 있는 동안 언제나 남쪽을 바라보면서 그리워했었다. 작년 봄에 사한(史翰)을 파(罷)하고 한가한 시간을 얻어 어머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고향에서 놀면서 이 누정에 여러 차례 올랐으나 기울어 있는 채 오랫동안 수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누정은 산수(山水)에서 그 위대함을 얻었거늘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여 거의 부수어 질 것 같소. 그런데 저 깊은 절벽에 왜소한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받아들이니, 이것이 괴이하지 않소.’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오, 마음이 큰 이는 그 위대함을 보고 그 왜소함을 알지만, 마음이 작은 사람은 왜소한 것에 매여서 위대한 것을 잊소. 옛날에 공자는 동산(東山)에 오르고는 노(魯) 나라가 왜소하다고 했고, 태산(泰山)에 오르고는 천하(天下)가 왜소하다고 했소. 세상 사람들은 천 길되는 산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조그만 석가산은 귀하다 하고, 만경창파는 사랑하지 아니하고 마당의 연못은 사랑하오. 이로써 보건대 사람이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오. 이 누정은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아름다운 산과 물이요, 머리을 숙여 내려다 보면 언덕의 풀과 흙이요, 다락이 버림받은 것은 다락의 죄가 아니요, 이를 보는 사람이 작기 때문이니, 만약 마음이 큰 사람이 이 고을을 맡아 이 누정에 오른다면 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지 않으리란 것을 어찌 알겠소. 더구나 사물의 이치는 성패에 때가 있는 법이니, 이 누정은 마땅히 다시 새로워질 날이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부서질 것을 근심하겠소.’ 하였다. 얼마 뒤에 직랑(直郞) 채상(蔡祥)공이 우리 주(州)로 하명되었단 것을 들고, 나는 이 누정에 대해 커다란 바람을 가졌다. 내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채(蔡)공은 고을에 도착했다. 그는 이 누정에 올라보고 과연 산수를 보고 즐거워했으나 누정의 퇴락함을 보고는 탄식했다. 그리하여 장인에게 명하여 다시 지어 새롭게 하였으니, 규모가 크고 채색이 고왔다. 대개 영남에 있는 누대(樓臺) 가운데 이와 훌륭함을 견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백성 한 집을 보내어 지키게 함으로써 장구한 계책을 도모했으니, 저 조잡하고 소홀하게 금방 만들었다가 금방 부서지는 것과 같은 자리에 놓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누정이 완공 된 뒤, 공은 손님이 오면 곧 이 누정에 올라 마중했다. 남쪽 손님으로 탁한 안개에 곤란받던 사람은, 이 누정에 올라 산을 바라보면 높이 들리고 구름이 나는 상상을 맛볼 것이고, 물가에 나가면 무우에서 바람쐬고 기수에서 목욕하는 즐거움이 생길 것이다. 공은 혹 농사철을 당하면 관청의 사무를 일찍이 파하고 이 누정에 올라 매일 농사를 살피며, 일의 빠르고 늦음, 부지럼함과 게으름을 책하고 캐물어 상벌(賞罰)을 내렸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스스로 권면하여 서로 앞다투어 늦은 자는 빨리하고 게으른 자는 부지런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관아에는 예절을 책하는 손님이 없게 되고, 들에는 생업을 잃은 농민이 없게 되었으니, 아전은 이로써 편안하게 되고 연사(年事)는 이로써 풍성하게 되었다. 모두가 공의 선사요 누정의 공덕이다. 나는 이 누정이 다시 새롭게 되었다 함을 듣고, 산수(山水)가 알아주는 사람을 얻은 것을 치하하며, 내 바람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이 기(記)를 부친다.” 하였다.
【명환】 고려 최재(崔宰) 충목왕(忠穆王) 초에 지흥주(知興州)로 나갔다. 백성에게 편리를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시행하였다. 전적(田籍)이 오래되어 어지러워졌으므로 재(宰)는 이를 개수하면서, 구본(舊本)도 여전히 놓아두고서 대질하였다. 소문을 들은 사람은 탄복했으나 국권(國權)을 담당한 자는 이를 꺼려서 교체시켜버렸다. 최운해(崔雲海) 신우(辛禑) 때 순흥 부사(順興府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왜적이 객관(客館)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운해는 이와 더불어 싸웠는데, 노획한 마소와 재물들을 곧 사졸(士卒)과 주민(州民)에게 나누어주었다. 싸움에서 크게 이겨 경내가 편안하게 되었다.
【인물】 고려 안유(安裕) 흥주(興州) 사람이다. 뒤의 이름(즉 안향(安珦))은 우리(조선(朝鮮)) 문종(文宗)의 휘(諱)에 저촉되므로 처음 이름을 쓴 것이다. 원종(元宗) 초에 과거에 급제했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좇아 원 나라에 갔는데, 원 나라의 승상(丞相)이 전지(傳旨)하기를, “너희 임금은 어찌하여 우리 공주(公主)와 가까이하지 않는가.”하였다. 유가 말하기를, “안방의 일이야 외신(外臣)이 알 수 없는 것이오. 오늘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니, 들을 가치가 없지 않겠소.” 하였다. 승상이 이로써 아뢰니, 황제(皇帝 원제(元帝))가 이르기를, “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먼 나라 사람으로 볼 것인가.”하고서 다시 묻지 아니하였다. 벼슬은 중찬(中贊)에까지 이르렀다. 학교(學校)가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고, 또 그의 노비[藏獲]를 들였다. 문장(文章)이 맑고 힘차서 볼 만했으며, 또 감식(鑒識)하는 안목이 있었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晦菴 주희(朱喜)) 선생의 화상을 걸어 두고 경모(景慕)하다가 드디어 회헌(晦軒)이라는 호(號)를 썼다. 충숙왕(忠肅王) 6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우기(安于器) 유(裕)의 아들이며 벼슬은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에 이르렀다. 안목(安牧) 우기(于器)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다. 안원숭(安元崇) 목(牧)의 아들이며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안축(安軸) 충숙왕(忠肅王) 11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로(遼陽路) 개주(蓋州) 판관(判官)에 제수되었다. 당시 충숙왕(忠肅王)은 원 나라에 잡혀 있었다.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요.”라 하고는 상서(上書)하여 송사하였다.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한때 표전(表箋)ㆍ사명(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상주(尙州)에 목사(牧使)로 나가 있을 때 어머니는 흥녕(興寧)에 있었는데 왕래하면서 효도를 다했다.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흥녕군(興寧君)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이 있다. 안보(安輔) 축(軸)의 아우이다. 충목왕(忠穆王) 원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행 중서성(遼陽行中書省) 조마(照磨)에 제수되었다. 보는 말하기를, “수명(授命)하고도 공직(供職)하지 않는 것은 불공(不恭)스럽다. 더구나 조마(照磨)란 단지 문서(文書)를 수장(收掌)하는 것이며 다른 일이 없으니, 내 마땅히 성(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관(上官)ㆍ성관(省官)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예우하였다. 보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책무는 다하였다. 어머니가 늙으셨으니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효가 아니다.” 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나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귀향하여 봉양하기를 청하여 뒤에 동경(東京) 유수(留守)가 되었다. 생산(生産 치부(治富))에 마음 쓰지 아니하여, 죽고 나자 집에는 곡식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안종원(安宗源) 축(軸)의 아들이다.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보(選補)되었다, 질(秩)이 차서 옮기게 되었는데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은데 위계가 아래였으므로 종원이 양보했다. 축(軸)은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도덕이 앞선 이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쪽에서 남에게 양보했으니 누가 이쪽을 버릴 것인가. 우리 집안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으니 번창할 것이다.” 하였다. 신돈(辛旽)이 천권(擅權)할 때, 사대부들이 다투어 붙었다. 집정(執政)에게 붙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자네를 영상(領相)에게 천거하면 간관(諫官)을 얻을 수 있을 것일세.” 하니, 종원은 사양하면서, “내 본래 게을러서 남에게 붙는 일은 내 재주가 아닐세.”라고 말했다. 집정은 이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벼슬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본조 안천보(安天保) 태종(太宗) 때의 사람이다. 벼슬은 영돈녕부사(領頓寧府事)에 이르렀다.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구(外舅)이다. 안원(安瑗) 원숭(元崇)의 아들이다. 벼슬은 유후(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안경공(安景恭) 종원(宗源)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으며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하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안순(安純) 경공(景恭)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겸 판호조(判中樞兼判戶曹)에 이르렀다. 치사(致仕)하고 물러나서 금천별서(衿川別墅)에 살았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그에게 가서 물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안숭선(安崇善) 순(純)의 아들이다. 경자과(庚子科)에 장원(壯元)했다. 벼슬은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신증』 안침(安琛)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아들 처선(處善)ㆍ처성(處誠)은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나 일찍 죽었다.
【효자】 본조 권득평(權得平) 임오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 아버지가 실명(失明)하였으므로 출입할 때 언제나 부축했으며, 음식은 반드시 몸소 받들었다. 양친이 4일 간격을 두고 모두 죽었는데 3년 동안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몸소 조석(朝夕)의 전(奠)을 올렸다. 대상(大祥)을 지낸 뒤 다시 어머니를 위해서 재최(齊衰) 3년을 입었으며, 가묘(家廟)를 짓고 조석의 전을 폐하지 않았다. 출입할 때는 항상 인사를 드렸다. 홍치(弘治) 기미년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제영】 한한오묘상(閑閑五畝桑) 정재(鄭載)의 시에, “넘실넘실하는 남쪽 개울의 물, 널찍널찍한 다섯 이랑의 뽕이로다.” 하였다. 황량고루의연재(荒涼古壘依然在) 강희맹의 시에, “사람은 누정에 기대었고 대자리는 비었으니, 달 밝은 밤의 피리 바람을 막지 못하누나. 황량한 옛 보루는 의연히 있는데, 기억하는가. 닭 잡고 오리 잡던 공적을.” 하였다. 방산민십실(傍山民十室) 조원(曹瑗)의 시에, “산 옆에는 민가 열 채, 다만 아는 것은 농사일 뿐.”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신라의 대매(代買)이다.
【방면】 동부(東部) 읍으로부터 끝은 15리이다. 서부(西部) 읍으로부터 끝은 20리이다. 동촌(東村) 읍으로부터 끝이 20리이다. 생고개(生古介)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와룡동(臥龍洞) 서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보좌리(普佐里) 남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상리(上里) 서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60리이다. 하리(下里) 서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성지】 도솔산고성(兜率山古城) 죽령(竹嶺) 아래에 있다. 부로산고성(夫老山古城) 유지(遺址)가 있다. 등항성(登降城) 서남쪽으로 5리이다. 어름성(於凜城) 빙성(氷城)이라고도 하며 은풍(殷豐) 고현(古縣)에 있는데, 남쪽으로 30리이다. 둘레는 9백 80보이고, 10개의 샘과 한 개의 시내가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은풍창(殷豐倉) 고현(古縣)에 있다.
豐基郡
東至榮川郡界十四里,南至醴泉郡界五十一里,西至忠淸道丹陽郡界二十四里,北至同道永春縣界六十九里。距京都四百十里。
建置沿革
本新羅基木鎭。高麗初稱基州,
顯宗屬吉州,明宗置監務,後還屬安東府。恭讓王復置監務,以安東府屬縣,殷豐來隷。本朝改爲基川縣監。後安文宗胎于殷豐縣,遂採二縣名改今名,陞爲郡。
屬縣 殷豐縣。本新羅赤牙縣。景德王改殷正,爲醴泉郡領縣。高麗初改今名,顯宗屬安東府,恭讓王時移屬本郡。別號殷山。在郡西南三十七里。
官員 郡守,訓導。各一人。
郡名
基木,基州,基川,永定,安定。
姓氏
本郡 鄭,安,皮,邦,陰,秦,辛。金。寧越、三陟。李。平昌。崔。興海。裵。星州。
殷豐 吳,朴,全,一作“金”。申。
順興 安,申,李,尹。石。村。金,鄭。竝來。
風俗
俗尙强狠。觀風案。
民樂耕桑。李宣詩。
形勝
山川秀麗。金孝貞詩。
山川
竹嶺。在郡西二十四里。新羅阿達王五年,始開路。
小白山。在順興縣。距郡三十二里。○徐居正詩:“小白山連太白山,逶迤百里揷雲間。分明畫盡東南界,地設天成鬼破慳。”
鳴鳳山。在殷豐縣西十六里。藏本朝文宗胎。
礪峴。在郡南十四里。
骨里峴。
在郡西十二里。
慶元峯。在小白山。距郡北二十二里。藏高麗忠肅王胎。
輪庵峯。在小白山。距郡北三十二里。藏本朝昭憲王后胎。
草庵洞。在小白山。距郡北四十五里。藏高麗忠烈王胎。
郁錦洞。在小白山。距郡北十三里。藏高麗忠穆王胎。
陽谷洞。在順興府。距郡北十五里。
竹溪。在順興府。距郡二十三里。○李穡《送安侍御》詩序:“順興安氏世居竹溪之上,竹溪之源出於太白山。山之大而水之遠,安氏之興,其無窮乎!”
南川,在郡南一里。其源出竹嶺。北川。在郡北三里。其源出郁錦洞。○已上二水至郡東三里合流,入于榮川郡臨川。
順興東川。一在府東一里,一在府東十里。其源皆出小白山,至府東南十三里,與南、北二川合。
殷豐東川。在縣東二十步。其源出骨里峴。
西川。在縣西十里。其
源出鳴鳳山,至縣南八里,與東川合流爲醴泉郡襄川。
〔新增〕 兜率城山。在竹嶺下。
夫老城山。在殷豐縣。峯上有池。
土産
水精石,産陽谷洞。人參,海松子,紫草,莞草,蜂蜜,松蕈,石蕈,楮,銀口魚。
烽燧
竹嶺烽燧。西應忠淸道丹陽郡所伊山,東應望前山。
望前山烽燧。在郡南八里。東應榮川郡城內山,西應竹嶺。
〔新增〕 樓亭
齊雲樓。在客館東。
學校
鄕校。在郡北七里。
驛院
昌樂驛。古順興地。在郡西十三里。丞。本道屬驛九:平恩,昌保,甕泉,幽洞,通明,安郊,道深,竹洞,宣安。○丞一人。
竹洞驛。在郡東十九里。
南院。在郡南二里。
山腰院。在郡西二十里。
昌樂驛南院。在郡西十一里。
蓴池院。在郡東十里。
寅賓院。在郡南二十七里。
佛宇
龍泉寺。在郡北七里。○高麗太祖眞在聞慶加恩縣陽山寺。辛禑五年,因避倭寇,移安于此。
聖穴寺,草菴。俱在小白山。
雙嶽寺。在殷豐縣警淸山。
陽地寺。在竹嶺下。
社稷壇。在郡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郡西三里。
厲壇。在郡北。
古跡
順興廢府。本高句麗及伐山郡。新羅景德王改岌山郡。高麗初改興州,成宗時稱順政,顯宗屬安東府,後移屬順安縣,明宗置監務。忠烈王安胎,改興寧縣令。忠肅王又安胎,陞知興州事。忠穆王又安胎,改今名,陞爲府。本朝太宗改爲都護府。世祖朝,以府使李甫欽爲囚人所脅謀亂,革屬本郡,割馬兒嶺水東之地屬榮川,文殊山水東之地屬奉化。邑城,石築。周一千十九尺,高六尺。距郡北二十二里。
隣豐縣。金富軾云:“本高句麗伊伐支縣。景德王改名,爲岌山郡領縣。今未詳。”
登降城。在郡西五里。諺傳高麗太祖南征時,留于此縣七日,百濟降書至,遂名駐輦處曰登
降城。
上乙谷城。在殷豐縣南三十四里。周九百八十步,高五尺。內有十泉、一溪。
小白山古城。山頂有古石城,周一千四百二十八尺。
甘谷部曲,大龍山部曲,林谷所。俱在順興府。
宿水寺。在小白山下。○魯璵詩:“輕裝短帽一尋幽,蘭院依然十載遊。壁價幾年詩共重,寺名千古水同流。寒推嶽色僧扃戶,冷踏溪聲客上樓。長嘯徘徊日云暮,倚欄回首起鄕愁。”
慶元寺。在小白山。
鳳棲樓。在順興府。今廢。○安軸記:“國之東南,維本一山,而嶺者三:曰太白,曰小白,曰竹嶺。根附嶺南而邑者一,吾興州是也。自州而東,則爲荒僻聚落;自州而直北,則爲太白;自北小折而西,則爲小白而無通途大道;自州而西,則爲竹嶺,通王京之路也;自州而南,則岐而分者,東南諸邑之路也。邑勢如此,而
賓旅之出入者,不由東北而皆西南也。古之設玆邑,惟西、南置候亭者,邑勢然也。西亭但自京而南者往往道過而已。若南亭,則自西而南者出乎此,自南而京者入乎此,南諸州將命督事之使,入乎此而不復他適,還出乎此。故公賓、私旅之郊餞者,無虛日也,邑人之輕西亭而重南亭者,亦理勢然也。亭在州南五六許里,北望靈嶽,南對茂林,東臨碧澗,西壓平郊者,是也。吾州有樓臺之名于代者多矣,皆逼山而在深絶處。其所以名者,蓋山高水淸也。彼逼山而深絶處,雖有淸爽幽寂之趣,其見山則不出一層一疊,見水則不過一折一曲,望而周覽則不越一洞一壑,此得山之一拳、水之一勺耳。若南迤而登斯樓,則高可見萬層絶頂,遠可望千疊重峯。奇巖屹聳,衆壑襟迴,雲煙之變化,氛霧之歊噓,千狀萬態,莫得遁隱。抑又川流百道,懸湍飛瀑,合于山下,奔激之勢已緩,喧豗之聲漸息。到樓下,泓深澄澈漫而流遠者,十餘里。灘瀨
潺湲可聽,沙石淸細可愛,山水之大,於斯備矣。歲二月,農功始作。往南畝者,夾道于樓之下;往西郊者,羅列乎樓之外。決渠爲雨,荷鍤成雲,斯樓非獨山水之美,有觀稼課農之樂也。予爲邑人,結髮時所嘗遊也,自筮仕以來,日常南望拳拳也。去年春,罷史翰得閑局,覲母遊鄕邑,屢登斯樓,傾圮而不脩者久矣。或與余曰:‘斯樓於山水得其大,而見棄於人,幾於復壞;彼深絶而得小者,反取容於人,斯可怪也。’ 余對曰:‘人之心有大者,有小者。心之大者,見其大而知其小;心之小者,拘於小而忘其大。昔者孔子登東山而小魯,登泰山而小天下。世之人不貴山嵒千仞,貴假山怪石;不愛江湖萬頃,愛盆池曲沼。以此觀之,則人之棄此取彼者,可知也。斯樓,擧目遠見,則佳山、佳水也;俛首近見,則草壟、土丘也。樓之所以見棄者,非樓之罪也,見之者小而近也。若一有心之大者,莅玆邑,登斯樓,則又焉知棄彼取此哉?況物理成壞有時,斯樓當有
復新之日,何患乎復壞?’ 旣而聞直郞蔡公祥有吾州之命,余深有斯樓之望。余旣還京,蔡公到郡登斯樓,果見山水而樂之,見傾圮而嘆之。因命工復構而新之,規模宏麗,彩畫鮮明,凡嶺南樓臺之美者,莫之爲比。而又復民一戶爲守備者,以爲長久之計,豈與夫麤疎朴略而暫成旋壞者,同日而語哉?樓旣成,公聞賓至,卽具以出迎于斯樓。南賓之困瘴霧者,登斯樓,望山則有霞擧雲飛之想,臨水則有風乎浴乎之樂。公或當農月,早放衙登斯樓,日課農功,責就作之早晩,詰服役之勤懶,以示賞罰,民皆自勸,晩者早,懶者勤,爭爲之先。自是厥後,官無責禮之賓,野無失業之農,吏以之安,歲以之稔,皆公之賜而樓之功也。余聞復新斯樓,賀山水之得人,喜吾望之不失,記以寄之。”
名宦
高麗 崔宰。忠穆王初出知興州。凡可以便民者,靡不擧行。田籍久且爛,宰
修之,仍藏舊本相質,聞者歎服。當國者忌而替之。
崔雲海。辛禑時除順興府使。時倭賊據客館,雲海日與戰,所獲牛馬財貨,輒與士卒及州民,大致克捷,境內晏然。
人物
高麗 安裕。興州人。後名犯我文宗諱,用初名。元宗初登第。嘗從忠宣如元,丞相傳旨曰:“汝王何不近公主?” 裕曰:“閨闥之間,非外臣所知。今日以是爲問,豈足於聽聞?” 丞相以奏帝曰:“此人可謂知大體者,庸可以遠人視耶?” 不復問。累官至中贊。憂學校日衰,建議置贍學錢,又納其藏獲。爲文章淸勁可觀,且有鑑識。晩年常掛晦菴先生眞,以致景慕,遂號晦軒。忠肅六年,從祀文廟。諡文成。
安于器。裕之子。官至檢校贊成事。
安牧。于器之子。登第,官至政堂文學。
安元崇。牧之子。登第,官至政堂文學。
安軸。忠肅十一年中元朝制科,授遼陽路蓋州判官。時忠
肅被留于元,謂同志曰:“主憂,臣辱;主辱,臣死。” 乃上書訟之,王嘉之,超授成均樂正。一時表箋詞命,多出其手。出牧尙州時,母在興寧,往來盡孝。官至僉議贊成事、興寧君。諡文貞。所著有《關東瓦注集》。
安輔。軸之弟。忠穆元年中元朝制科,授遼陽行中書省照磨。輔曰:“旣受命不供職,是不恭也。況照磨惟收掌文書,無他務,吾當赴省。” 旣上官、省官重其才,皆禮貌之。輔曰:“吾今足以塞吾責。母老,不歸養,非孝也。” 於是棄官東歸,以母老乞骸歸養。後爲東京留守。不事生産,及歿,家無擔石之儲。諡文敬。
安宗源。軸之子。年十七登第。忠穆朝,選補史翰,秩滿當遷,同僚沈東老年高位下,宗源讓之。軸聞而喜曰:“讓,德之先。我讓於人,人誰捨我?我家有人,殆益昌乎!” 辛旽擅權,士大夫爭趨附。有執政者言:“吾等薦子於領相,諫官可得。” 宗源辭曰:“我本疎懶,趨勢非吾所能也。” 執政慙之。累官判門下府事、興寧府院君。
諡文簡。
本朝 安天保。太宗時人。官至領敦寧府事。卽昭憲王后之外舅也。
安瑗。元崇之子。官至留後。諡景質。
安景恭。宗源之子。太祖開國功臣,封興寧府院君。諡良度。
安純。景恭之子。登第,官至判中樞、兼判戶曹。仍令致仕,退居衿川別墅。國有大事,就而問之。諡靖肅。
安崇善。純之子。庚子科狀元,官至議政府左參贊。諡文肅。
〔新增〕 安琛。登第,官至判書。子處善、處誠,竝登第,早歿。
孝子
本朝 權得平。壬午進士。其父失明,出入常扶持,飮食必親奉。兩親間四日俱亡,三載居廬,親奠朝夕。大祥後,又爲母服,齊衰三年。爲家廟,不廢朝夕奠,常出告反面。弘治己未,事聞旌閭。
題詠
閑閑五畝桑。鄭載詩:“衮衮南溪水,云云。”
荒涼古壘依
然在。姜希孟詩:“人倚高樓簟半空,月明橫笛不禁風。云云,憶著操鷄搏鴨功。”
傍山民十室。曺瑗詩:“云云,唯識事耕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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