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와 차례상 연말 휴가를 맞아 여행을 떠났다가 우리는 신정 차례를 지내기 위하여 서둘러 돌아왔다. 한국에서는 음력설에 맞추어 지내었지만 이민 생활하는 우리로서는 모두가 쉬는 신정에 지내는 것이 서로에게 시간이 자유롭다. 섣달 그믐이 되기 전에 돌아와 장을 보고 말일에는 아침부터 전을 부치기 시작하였다. 늘 호박전과 동태전 그리고 두부를 부쳤는데 이번에는 장보기에 차질이 생겨서 호박전 대신 밴쿠버에서 가져온 송이버섯을 넉넉히 부쳤다. 송이에서 번져나오는 싱그러운 향이 온 집안 가득하였다. 새해에는 모두가 이 버섯의 향처럼 향기나는 삶을 살아야할텐데. 밖에서 돌어오던 남편이 올해는 조상님들이 귀한 버섯을 드시게 되었네, 하며 빙긋이 웃었다.
말일에도 일을 하는 아들 부부가 손자를 데리고 저녁무렵 들어왔다. 차례상에 올릴 전들을 따로 준비해놓고 남은 전들을 준비하여 저녁을 함께 하였다. 손자는 역시 부드러운 흰살 생선으로 부친 전을 좋아하였고 내일 아침 떡국 국물로 쓰려고 끓여놓은 닭고기 국물을 좋아하였다.
그동안 훌쩍 커버린 손자의 걸음걸이가 지난 번보다 훨씬 안정감있게 보였다. 간간히 콜록거리는 기침소리가 마음 쓰였지만 어휘도 늘어가고 자기표현력도 좋아지는 아이의 모습이 보기에 흡족하였고 첫아이를 키우느라 애썼을 아들 내외의 수고가 가슴 싸하게 다가왔다.
새해 첫날 아침이 되자 손자의 새해 인사를 시작으로 분주한 차례 준비가 시작되었다. 매년 이번에는 조금만하자, 하면서도 준비해놓고보면 상이 좁게만 보인다. 설날이니 떡국 차례 한국에서는 다섯 분의 차례를 지냈지만 몇 해전부터 큰아버지의 제안으로 세 분 차례를 드린다. 떡국을 담아 계란 지단과 김을 솔솔 뿌리고 수저를 담아 놓았다. 어제 낮부터 양념장에 재워놓은 쇠고기 적을 살짝 구워 접시에 담아놓고 여러가지 전들도 가지런히 담아놓았다. 아기 얼굴만한 사과는 위와 아래를 저며놓고 커다란 배는 깍아서 담아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준비하는 차례상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던 손자가 갑자기 행동 개시에 들어간 것은 산자와 한과를 상에 올려놓을 때였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뭐라고 하더니, 아마도 나 이거 먹어볼까, 상에 놓인 산자를 한 웅큼 베어물더니 이번에는 양손으로 한과 하나 씩을 집어들고 도망가버렸다.
며느리가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어머니, 어떡하지요. 하며 바라다본다. 그냥 놔둬라 할아버지들도 증손자가 저러는거 다 이해하시겠지.
우리는 손자가 한 입 베어먹은 산자가 헤하고 웃는 모습 그대로 놓고 절을 올렸다. 한과 접시 한 귀퉁이가 휑하니 잘린 못난이 모습도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도망가서 식탁 아래서 산자를 다 먹었는지 입가에 아직 밥풀데기가 허옇게 묻은 채로 손자가 돌아오더니 같이 절을 하기 시작하였다. 절하는 에미 애비를 곁눈질로 바라다보면서. 거의 바닥에 누운 모습으로 연신 절을 해대었다.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조상님들에게 정종을 따라드리는 의식을 마치고 우리는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하여 하는 기도(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손자가 자기도 우리처럼 웅얼웅얼 하면서 기도하는 흉내를 내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 유치원 근무를 하면서 일년에 다섯 번 정도의 제사를 지냈다. 이민와서 보니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도 기일을 맞아 간단히 연미사 신청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도 저렇게 할까, 여러 번 생각은 하면서도 삼십 여년 길들여진 습관을 고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힘들고 지칠 때면 아이들에게 제사 지내는 거 이제 엄마 세대로 끝이다. 너희들은 엄마처럼 힘들게 살지말아라, 하면서 불편을 토로해내곤 하였다. 사실 아이들이 음력 날짜 기억하기도 어려운 것이 이민 생활 아니던가.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변화하는 동물이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였던가. 아들 장가보내 며느리를 맞이한 첫 설날이었다. 아이들이 절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래, 우리가 이렇게 남의 나라에서 이민 생활 하는데 저 아이들에게 과연 물려줄 재산이 무엇이란 말인가.
첫돌이었던 작년에는 손자가 아기용 의자에 앉아서 바라다만 보더니 두 돌이 다가오는 올해에는 제법 절도 하고 차례상에 놓인 과자도 훔쳐가고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원숭이처럼 흉내내고 있으니
준비하기는 힘들어도 결국 살아있는 우리들의 잔치인 것을 차례 지내는 것을 우리 가족의 전통으로 물려주어야지, 하는 마음이 더 강하게든다. 창 밖으로 새해 첫눈이 축복처럼 내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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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모니가 있는 가족의 명절이 그려지네요 즐감입니다.미사님.
우리는 여전히 신정과 추수감사절에 차례와 연도 드린답니다---감사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