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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지진 대피소 - 안유환
책상이 좌우로 체질하듯 흔들린다. “우르르, 쿠당탕, 탕, 탕!” 집안이 온통 무너져 내리는 소리다. 앉아 있는 의자가 비포장 길을 달리는 트럭을 탄 것처럼 계속 들썩인다. 잇달아 책장이 침대위로 엎어지며 책이 방바닥에 쏟아졌다. ‘지진?!’ 깜짝 놀란 인열은 지난해 9월 규모 5.8의 경주지진 생각이 났다. 그때도 포항지역은 집이 흔들리고 싱크대의 그릇들이 서로 부딪쳐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낼 만큼 진동이 심했다. 우리나라도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말이 하울링처럼 울리는 것 같았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보니 집안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방 쪽 찬장이 넘어지면서 떨어진 그릇들이 깨진 채 거실바닥에 나뒹굴어 발 디딜 틈이 없다. 싱크대 위의 전기밥솥도 바닥으로 굴러 밥이 쏟아졌다. 인열은 깨진 그릇조각 사이로 발을 골라 디디며 안방으로 다가가 급히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 지진입니다!”
겨우 몸을 가눌 수 있는 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한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잡고 침대모서리에 엉거주춤 구푸려있었다. 서랍장 위의 사진액자들이 떨어져 깨트려지고 화장대는 분리수거장 빈병 수집통처럼 흐트러졌다. 집안의 집기들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방안을 살펴보니 창틀 아래쪽에는 손바닥이 들어갈 만큼 균열이 생겼고 입구 쪽 벽은 대각선으로 길게 금이 가 있었다. 인열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진이 나면 맨 먼저 식탁 아래나 책상 밑으로 들어가 머리를 보호하고 지진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밖으로 탈출하라는 대피요령은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럴 틈이 없었다. 지진은 마라톤 선수처럼 멀리서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박이 쏟아지듯 순식간에 몰아닥쳤다. 예고 없는 천재지변에 대한 인간의 대책들은 언제나 사후약방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열은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침대위에 앉히고 베란다로 나가 유리창이 깨진 창문으로 아파트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마당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뛰쳐나와 모두들 자기 집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열은 그제야 어머니를 모시고 일단 밖으로 대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문은 약간 찍찍 했지만 다행히 그대로 열렸다. 조심조심 어머니를 부축하여 통로계단으로 나왔다.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내려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두 계단을 내려딛고는 다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이때 인열의 전화벨이 울렸다.
“우리 집은 어떻노?! 엄마는? 한동대엔 외벽체의 벽돌이 다 무너졌다고 하던데.”
포항 신항만 구내에서 지게차로 하역작업을 하던 진구는 아들에게 다급히 집안의 상황을 물었다. 진구는 지진이 났을 때 가까이 한동대에 재학하고 있는 딸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했던 것이다.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계단으로 대피중입니다. 아버지는 괜찮습니까?”
인열은 작업 중에 아버지가 어디 다치지나 않았는지 염려되었다.
“내가 일찍 들어갈게, 엄마 잘 모시고 조심해서 대피해라!”
인열의 가족이 사는 집은 지은 지 30년이 넘은 5층 아파트였다. 가까스로 마당에 내려와 보니 1층 베란다 아래쪽은 콘크리트가 떨어져나가 한 자가 넘는 틈이 생겼다. 외벽은 제멋대로 여기저기 굵은 금이 가고 창틀 여러 곳은 중간이 꺾이거나 휘어져있었다. 6개동 아파트 중에 가장 피해를 심하게 입은 E동이 공교롭게도 인열의 가족이 사는 집, 그것은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피해주민들은 이날 저녁 어두워져서야 포항시 도시안전대책 본부에서 마련한 흥해 실내체육관 대피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인열이 어머니와 함께 매트 하나가 깔린 자리를 배정받고 났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오빠−, 포항에 지진 났다던데 괜찮아?”
대구에서 정미가 걸어온 전화였다.
“응−, 우리는 별 피해가 없어. 잘 있냐?”
인열은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정미에게 이런 일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대답을 얼버무렸다.
“여기 우리도 진동을 크게 느꼈는데, 다행이야! 방학엔 만날 수 있겠구나.”
“고향사람들 염려 해줘서 고마워!”
인열은 시간이 흐를수록 정미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높은 꿈과 이상을 쫓아가기에는 인열의 현실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다.
진구는 저녁 7시가 넘어서 흥해 실내체육관으로 퇴근했다. 하역작업을 해놓은 짐짝들이 무너져 다시 정리를 하다 보니 퇴근시간이 더 늦어졌던 것이다. 오는 길에 먼저 아파트로 가보았으나 안전요원들이 금줄을 치고 입구에서부터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흥해 실내체육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줄지어선 차들로 꽉 막혀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경찰관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지만 차량소통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구호물자를 싣고 들어오는 대형트럭도 앞의 차가 빠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가족이나 친척을 만나러 온 사람들은 승용차를 큰길가에 주차하고 걸어서 들어갔다. 진구도 길가에 차를 두고 300여 미터를 걸어가야 했다. 실내체육관 앞엔 ‘이동파출소 현장재난 상황실’이 설치되어있고 ‘찾아가는 행복병원’ 대형버스도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체육관 옆 마당에는 ‘사랑의 밥차’가 늦은 저녁밥을 짓느라 여성봉사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여보, 괜찮아요?”
진구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아내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물었다.
“난 괜찮아요. 인열이가 애를 많이 썼어요. 인지는 어떻든가요?”
옥자는 겨우 몸을 일으키며 남편과 아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실내체육관 1, 2층(900여 평)에 첫날 수용된 인원은 1,000여명. 시설이라야 칸막이도 없는 맨바닥에 매트를 깔고 담요 두 장씩을 지급, 응급조치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불안에 떨고 있는데다 큰소리로 대화하거나 전화를 주고받는 것 때문에 실내는 시장바닥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아버지, 지금 어데 계세요? 엄마는 좀 어떻습니까?”
인지는 누구보다도 퇴원한지 며칠 안 되는 어머니가 염려되었다.
“전화 바꿨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괜찮다!”
옥자는 숨을 몰아쉬며 딸의 전화에 떠듬떠듬 대답했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포항 기쁨의 교회에 대피해있던 인지가 어머니를 보기위해 흥해 실내체육관으로 달려왔다. 인지는 한동대학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해 4년의 학업을 마치고 지금은 대학원 공부를 하며 조교로 일하고 있다. 한동대는 느헤미야 강의관 외에는 큰 피해가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곧 학교로 들어갈 것으로 보였다. 인지는 밤10시가 가까워졌을 때 기쁨의 교회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지진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벌렁거려 몹시 피곤해 하면서도 잠은 쉬 이루지 못했다. 한숨 속에 널브러진 모습들이 애처로웠다. 종일 하역작업을 한 진구는 먼저 잠이 들었으나 옥자는 누운 채 가슴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심장을 조이는 고통이 계속되었다. ‘주여−.’ 인열이도 뒤척이는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맘속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자정이 가까워도 웅성웅성하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인열아, 대학은 꼭 가야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었다. 인열은 가정형편을 잘 알고 있기에 수능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마음 한쪽은 망설이고 있었다.
“얘야, 요즘 대학졸업장 없이 마땅한 직장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나?”
옥자도 진구도 아들 하나는 대학공부를 시켜야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만 시키면 좋은 일자리는 따라올 것이라 믿었다. 진구 부부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교육에 대한 열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얼마 되지 않은 농토로는 아무리 부지런해도 고등교육은 힘들 것 같았다. 농한기에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해보았지만 기술자격증을 갖지 않고는 푼돈밖에 만질 수 없었다.
진구는 국비지원 중장비학원에서 지게차 운전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따냈다. 옥자도 여자들의 일자리를 알아보다 커튼 제작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롤커튼, 스크린 커튼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형태의 디자인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기본적인 재래씩 여닫이커튼을 주로 제작했다. 신도시 건설과 함께 낡은 집들을 헐고 아파트를 신축하는 일이 많아지자 커튼공장은 수요를 대기가 부족할 정도였다.
일하는 만큼 소득이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두 살 터울인 인지가 중학생이 되면서 아이들에게 독방을 주기위해 엘리베이터도 없고 지은 지 20년이 되는 대성아파트를 구입했다. 한 주간 동안도 옥자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식구들의 아침밥을 챙기고, 커튼공장으로 출근하면 오후5시에 퇴근을 했다. 권사인 옥자는 주일날도 쉬는 날이 되지 못했다. 교회에서는 주방장을 맡아 식당을 관리해야하고 자치기관의 사업에도 참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공부하는 인열의 하숙비와 등록금을 마련하는 일에는 피곤한줄 몰랐다.
“여보, 인지는 고등학교만 마치고 그만 취직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굳이 대학을 가겠다고 저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니······.”
인열이 2학년 여름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있을 때 어느 날 밤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취업해서 좀 더 일하다 인열이가 졸업하고 나서 대학에 가면 좋겠는데.”
진구는 아내의 말을 듣고 우선 아들부터 졸업을 시켜놓고 보자는 것이었다.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해도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2~3년 쉬고 할 수 있을까? 더욱이 여자는 혼기도 가까워지는데······.”
“요즘 아이들이 옛날처럼 그렇게 결혼을 빨리하는 것도 아니고, 인열이가 직장을 잡으면 동생학비조달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부모님의 이런 대화를 듣고 나서 인열은 어떻게 하면 동생 학업을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내가 졸업하고 직장을 얻기 까지는 4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졸업 후에도 21개월 군복무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지가 공부할 길은 영영 막히게 된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년에는 휴학을 하고 입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대를 한 뒤에 복학하여 부지런히 공부하면 직장을 얻기도 그만큼 수월할 것입니다.”
개학이 가까워지자 인열은 인지가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나간 뒤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중간에 휴학을 하면 학업에 지장은 없을까?”
옥자가 아들을 염려하며 물었다.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요즘은 대학졸업을 연기하면서까지 취업준비를 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인열은 젊은이들이 직장을 얻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토로했다. 입학할 때는 전망이 밝은 B대 조선공학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최근 조선업계는 해외 발주가 급감하여 사원 50%이상 감원 또는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세계 조선시장은 지난해 수주 53척 중 42척을 중국이 싹쓸이 했으나 우리나라는 2척밖에 하지 못했다. 최근엔 해양플랜트 수주도 싱가포르에 밀리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국내 주요 협력사들은 자금난으로 조업을 중단하거나 임금체불 등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인열은 부득불 취업시험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7급 공무원시험 한차례, 그리고 대기업에 두 차례 도전을 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이밖에도 중소기업에 이력서를 넣은 곳만도 20곳이 넘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올해는 공무원을 대폭 증원하여 일자리를 늘린다는 정부의 정책이 나오자 부실한 직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사표를 내고 공무원시험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인열은 이번에는 눈높이를 대폭 낮추어 지난 8월 중순 9급 일반 행정직에 응시했다. 경쟁률은 굉장히 높았지만 사랑하는 정미의 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대구 경북지역 일반 행정직은 6명 선발에 응시자 2,184명으로 무려 364:1의 경쟁률을 보였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인열은 12월 중순의 발표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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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체육관의 아침은 더욱 소란스러웠다. 오전 7시부터 두 대의 밥차에서 만들어내는 아침밥은 누구든지 줄을 서면 받아먹을 수 있었다. 식권이 아직 준비되지 않아 혼란은 가중되는 것 같았다. 인근에 있던 노숙자들도 어제 저녁식사 때부터 함께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인열의 가족은 더욱 어려움이 겹쳤다. 옥자는 적어도 2주 동안은 죽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술 후에 옥자의 소화력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따뜻한 물에 밥을 말았지만 그것마저도 먹기를 거북스러워했다. 옥자의 얼굴은 마치 수술을 끝냈을 때의 얼굴모습처럼 초췌했다.
“여보, 병원에 한번 가봅시다.”
진구는 아내의 건강이 걱정되어 아침식사도 제쳐놓고 ‘찾아가는 행복병원’ 버스 문을 두드렸다. 좁은 버스 안은 벌써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공포, 불안, 가슴통증, 소화불량, 불면 등을 호소하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런 충격으로 인한 후유증입니다. 여러분의 증상은 이번 지진과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정상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차츰 호전될 것입니다.”
50대로 보이는 의사는 환자들에게 모두 이와 비슷한 처방을 내리고 약사들은 필요한 약을 조제해주었다. 옥자의 차례가 되었다.
“약 20일전에 심장판막수술을 받았습니다. 퇴원해서 집에 온지 사흘 만에 지진을 만났습니다. 적어도 석 달 동안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지난밤에도 가슴이 아프고 울렁거려 한잠도 못 잤다고 합니다.”
진구는 아내의 오른손을 꼭 잡고 의사를 쳐다보았다.
“무엇보다 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가슴의 통증이 심하면 판막수술을 집도한 의사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무엇보다 정신적 안정을 취해야 회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변이 어수선 하니까 요양병원에 얼마동안 입원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청진기를 내려놓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진구는 아내를 인열에게 맡기고 흥해읍 행정복지센터 맞은편에 있는 K요양병원을 찾았다. 접수구에서 차례를 기다려 아내의 입원을 신청했지만 남아있는 병실이 없었다. 지진이 발생하던 날 몸이 불편한 노인환자들이 서둘러 입원을 했고, 대피소가 불편하기 때문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몸이 아프지 않아도 요양병원으로 들어갔기에 옥자와 같이 절대 안정이 필요한 사람들은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옥정리를 비롯한 다른 곳의 요양병원도 알아보았지만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진구는 아내에게 우선 전복죽이라도 사다 먹이라고 인열에게 일러주고 일터로 나갔다.
평소 건강하던 옥자의 몸은 지난봄부터 조금씩 좋지 않았다. 매일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는 남편에게 옥자는 자기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이 자기보다 더 힘들고 과로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고시촌에 들어가 취업시험 준비를 하고 있을 때라 집안에서는 얼굴보기도 힘들었다.
“인열아, 요즘은 내가 숨이 가빠 계단을 올라오기도 너무 힘들어! 자꾸 주저앉고 싶고, 의욕도 없고, 입맛도 떨어지고······.”
옥자는 어느 토요일 모처럼 집에 들른 아들에게 호소하다시피 말했다.
“어머니가 너무 과로하시는 것 아닌가요? 나이 들면 대수롭잖아 보이는 증상도 의사의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월요일 시간을 내시고 저와 함께 병원에 가봅시다.”
옥자는 커튼공장에 월차를 내고 아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가까운 병원의 진단결과는 특별한 병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부정맥이 있다고 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때는 발이 꼬여서 넘어질 뻔 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심한 부정맥 때문이었다. 피곤한줄 모르고 부지런히 일하며 오늘까지 달려왔지만 이제는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렇다고 커튼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곧 혼기가 닥칠 아들 딸의 결혼비용은 마련해 놓아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여보, 숨이 차고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은 나이 때문일까?”
50대 중반에 접어든 옥자는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들어 남편에게 말했다.
“지난 번 진단받은 부정맥은 어떻게, 치료할 수 없는 건가?”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구는 아내의 부정맥을 염려하고 있었다.
“병은 자랑하라는 말이 있잖아. 내가 회사 사람들에게 부정맥 얘기를 했더니 모두가 대수롭잖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 특별히 건강한 사람들 외에는 대부분 부정맥을 갖고 있다는 거야.”
“그렇지만 부정맥은 심장판막 이상에서 올수도 있어. 부정맥이 심한 사람은 길가다가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는 경우도 있다는데−. 심장이 힘 있게 피를 전신으로 보내주지 못하기 때문이지. 당신, 아무래도 종합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어!”
진구는 아내가 염려되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부정맥에 대해 알아보았던 것이다.
“당신도 종합진단을 받아본지 오래되었잖아? 바쁘다는 핑계로 2년마다 받는 정기검진을 지난해도 그대로 넘겼지.”
권하지 않으면 남편은 쓰러질 때까지 병원에 한번 가보지 않을 사람이란 것을 옥자는 잘 알고 있었다.
P의료원에서 종합검진을 받고 보니 옥자는 수술을 요하는 심장판막증이었다. 다행히 진구의 건강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옥자는 필요하면 포항에서 수술을 받으려했다. 이 말을 들은 인지는 중한 수술은 서울에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편과 아들도 뜻을 함께 모았다. 옥자가 서울 S병원에서 다시 정밀진단을 받은 결과는 나이가 들면서 흔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대동맥판막협착증이었다. 부정맥이 심해 급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판막교체 치료를 받아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고 했다. 수술날짜는 9월초로 잡혔다.
옥자는 커튼 공장에 사표를 제출했다. 매일아침 서둘러 출근하던 일을 쉬고 나니 부정맥 증상은 좀 덜한 것 같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그러나 심장수술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점점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떤 이는 심장판막증은 걷기 등 지속적으로 가벼운 유산소 운동을 하면 상태가 좋아진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그대로두면 나중에 더 심각한 상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옥자는 주변 사람들의 찬·반 얘기를 들으면서 수술날짜를 두 차례나 연기했다. 세 번째도 망설였지만 병원 측에서는 “이번에도 연기하면 영영 기회를 잡을 수 없다”는 협박성의 통보를 해왔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옥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수술을 받았다. 그때가 10월 하순, 보름 만에 퇴원하여 집으로 내려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지진을 만났다. 인열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늘 죄송한 마음을 떨어버릴 수 없었다.
“인열아, 9월 초순 네 엄마 수술 때 시간을 좀 낼 수 있겠느냐?”
진구는 9급 공무원 시험을 치른 지 며칠 안 되는 아들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때가 8월 중순, 아내의 간호에는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수술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습니까?”
인열은 10월 중순엔 친구들과 지리산 둘레길 답파를 계획하고 있지만 예, 라고 대답했다. 옥자는 9월 초순 예약한 수술날짜가 다가오자 두려움 때문에 두 차례, 한 달 반이나 연기를 했다. 그러는 동안 다행히(?) 인열은 친구들과 지리산 둘레길 걷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젊은 청년들이라도 둘레길 답파는 12~15일 정도는 걸려야 한다. 인열이 11월 초순 지리산 둘레길 걷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서울 S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를 동생 인지로부터 전해 들었다. 진구는 중한 수술에는 아들보다 남편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한 달 동안 지게차 운전을 쉬고 아내를 간호하고 있었다.
옥자는 S병원 중환자실에서 그날 아침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찌푸린 얼굴로 잠들어 있던 옥자가 인열이 가만히 손을 잡자 눈을 뜨고 아들을 쳐다보았다.
“어머니!”
인열은 조용히 어머니를 불러보았다.
“왔어−.”
옥자는 아들의 얼굴을 보자 반가워 찌푸린 얼굴을 환하게 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인열은 어머니의 이마를 짚어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쓰다듬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열이 펄펄 끓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기도하던 대로 인열은 어머니에게 그렇게 사랑을 나타냈던 것이다.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화사하게 꾸미거나 제대로 화장 한번 할 때도 없이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다 조용히 병상에 누워있는 그 모습이 한없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인열은 평소에 드러내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으로부터 차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제 열흘만 지나면 퇴원이야. 의사가 수술결과는 좋다고 했어. 그러나 완전히 회복하기 까지는 3~4개월은 걸려야 된단다.”
진구는 다시 잠드는 아내를 두고 인열을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나는 네 엄마 수술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 줄은 미처 몰랐어! 요즘 흔히 말하는 복강경 수술정도로 생각했는데, 가슴부위를 열어젖히는 수술이 끝나기까지 7시간이 넘게 기다렸어.”
진구는 입이 마른 듯 커피로 입술을 축였다.
“저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줄 생각했어요.”
인열이 어머니가 수술을 받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계획대로 지리산 둘레길 걷기를 출발한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여기 양쪽 가슴뼈를 자르고 인공심장판막을 삽입했다고 하던데 나는 그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어.······”
수술할 때는 심장을 멈추게 하고 체외순환기를 달았다. 에크모(ECMO)라는 순환기는 심장과 폐를 대신해 산소를 피에 실어 몸 곳곳으로 보내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흉골 절개 후 가슴에 생긴 피부의 상처는 일주일 정도면 아물지만 절개한 가슴뼈가 붙으려면 최소한 3개월은 걸려야 한다. 퇴원 후 아내에게는 1주일에 3~4회 정도 걷기 등 하루 20~30분의 운동이 필요했다. 가벼운 목욕은 4주후면 가능하지만 대중목욕탕은 3개월 후에나 이용할 수 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돌볼 수도 없고 청소나 걸레질도 하지 말고 식사관리도 잘해야 한다. 약은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한다. 그러나 운동과 상관없이 숨쉬기가 힘들거나 가슴의 통증이 지속되면 병원을 찾아야 한다. 진구는 의사가 보호자에게 들려주던 말을 되도록 자세하게 아들에게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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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열은 죽을 먹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S병원에서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을 떠올렸다. 심장수술 후의 관리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안정이지만 퇴원 후 3일 만에 어머니는 지진의 충격을 받았다. 기존의 환자들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도 지진 트라우마로 가슴이 뛰고 불안이 엄습해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피소 안은 누가 피해자인지, 누가 가족 친지를 위문하러 온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여기 저기 신문·방송사에서 나온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대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이재민들은 카메라 앞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기업체에서는 초코파이, 컵라면, 호빵, 옥수수, 통닭튀김 등 간식을 전달했으나 도무지 질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국이 사전에 이렇다 할 지진대책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구보다 시급한 것은 피해자들의 숙식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지진 피해자들이 정신적으로는 안정을 찾지 못했지만 먹는 것은 넘쳐나고 있었다. 세대별로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망 브리지’라 표기된 재해구호물자 박스가 하나씩 주어졌다. 1인용 응급구호세트는 담요2, 간소복1, 러닝/펜티2, 양말2, 칫솔1, 세면비누1, 수건2, 화장지1, 에어베개1, 면장갑1, 매트1, 슬리퍼1, 귀마개1, 수면안대1 등 목록이 적혀 있다.
“친구야, 고생했다.” “−친구야 고생했다.” “친구야, 걱정하지 말아라.” “−친구야 걱정하지 말아라.” 인열은 옆자리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중심으로 50~60대 여인들이 둘러앉아서 그가 하는 말을 따라하고 있었다. “······ 친구야, 맛난 것 있으면, 혼자 처먹지 말고, 나눠먹자!”
사람들은 의사의 말을 따라하다 모두 까르르 웃었다. 대구에서 파견된 심리지원단이 지진피해 주민들의 심리치료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혼자 계시면 우울해지기 쉬운데 서로 한 번씩 손을 잡아주고, 예쁜 손주들 생각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은 가슴속에 묻어두지 말고 털어놓고 얘기를 해야 합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혹 일찍 집으로 들어가셔도 경로당 같은 곳을 찾아 함께 얘기를 나누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의사는 심호흡, 복식호흡법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지도하다 한바탕 웃음바다를 만들어놓고 나서 불안한 상황을 극복하는 당부를 하고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인열아, 내가 약을 챙겨오지 못했구나!”
어머니가 죽을 먹고 나서 물을 마시려다가 말했다. 밖으로 대피하기에 경황이 없어서 옥자도, 인열이도 약을 갖고 나오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대성아파트 주변에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처럼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처음 당하는 지진에 놀라 한꺼번에 대피소로 몰려가서 하룻밤을 지새운 사람들이 생필품을 가지러 오거나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포항시는 이날 10개 팀 36명으로 위험도 평가단을 구성해 피해건축물 1500곳의 위험진단에 나섰다. 대성아파트에도 건축사와 건축공무원이 한조가 된 노란 조끼를 입은 평가단이 건물의 피해정도에 따라 초록(사용가능), 노랑(사용제한), 빨강(붕괴위험)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인열의 집이 있는 대성아파트 E동엔 빨강 딱지가 붙여지고 엄격히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인열은 안전도평가 단원에게 어머니 사정을 얘기하고 잠시 약을 가지러 집에 들어가도록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인열은 평가단을 지휘하는 단장을 만나고 가까스로 일시 출입을 허락받았다. 집안은 마치 폭격을 맞은 듯했다. 인열은 어머니 약과 세면도구를 챙기고, 그의 방에서는 지진이 날 무렵 읽다가 책상위에 놓아둔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를 갖고 나왔다. 초록과 노랑딱지가 붙은 집의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집안을 드나들며 요긴한 집기와 생필품들을 챙겨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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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는 대피소 이틀째 밤에도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통로로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라 가슴이 뛰고, 가만히 누워있는데도 땅이 들썩이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흐르기도 하고 빈속인데도 자주 메스꺼움이 나타났다. 옥자는 맨 처음 심장판막증 진단을 받은 P의료원을 찾아 수술 후의 부작용 여부를 점검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경주 지진 때 심리지원단으로 활동한 적이 있는 정신과 의사에게 진료도 받았다.
“집이 무너지고 여진이 계속되는 상황이어서 평소 성격이 예민하거나 심장수술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후유증이 더욱 심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진으로 인한 불안감이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다시 여진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TV 지진뉴스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고 해도 아직 크고 작은 여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최소한 한 달 정도는 피해현장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구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아내를 인지와 함께 제주도 외할머니 댁으로 보냈다. 인열은 혼자 대피소에서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지만 배정받은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인열은 챙겨온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펼쳤다.
「······며칠 전에 맡고 있는 한 기증자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정말 소중한 기억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퇴색하고 만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기억은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 나는 루스를 잃었고 이어 토미를 잃었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기억만큼은 잃지 않았다.······」
같은 복제인간이면서 간병사로 일하는 캐시의 회고담이다. 복제인간인 소설의 주인공들은 정상인 환자들에게 장기를 제공하기 위해 집단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나 재능까지도 정상인과 다를 바 없지만 보통사람들의 병든 장기를 대체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장기제공을 하고나서 죽어가는 친구를 보면서 세 번째, 네 번째까지 자기의 죽음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네 번째 기증이 끝나면 기술적으로는 목숨이 다했다 해도 의식이 어떤 식으로든지 남아서 더 많은 기증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본인이 안다.」 잇달아 사랑하는 친구를 잃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캐시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그녀에게 그들은 ‘또 하나의 자기’이기 때문이다.
인열에게 사랑하는 정미는 또 하나의 자기이다. 그가 군복무를 할 때는 물론 취업시험에 낙방하고 좌절할 때마다 용기를 주었던 정미의 격려는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여동생의 친구인 그녀는 대구 M중학교 교사이다. 인열이 제대를 했을 때 토플을 준비하고 있던 그녀는 미국유학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언젠가는 에리히 프롬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인간이 사랑할 줄 알게 되려면 그의 최고의 자리에 위치해야 한다.” 그녀의 꿈은 지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보내지 마』를 읽으면서 인열은 꿈이 없는 사람들, 아니 꿈을 가질 수 없는 ‘무리’를 보았다. 1차, 2차, 3차, 4차, 생명이 녹아지기까지 오직 다른 사람의 치료를 위한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복제된 존재들, 그들의 사랑과 영혼은 한 조각씩 적출되어 뿔뿔이 흩어져야할 운명이었다. 인열은 희망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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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 사흘−. 대피소 주민들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편히 잠들지 못하는 것은 물론 속옷 하나 갈아입을 공간도 없었다. 이재민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흥해 실내체육관에 개인용 텐트 270동이 세워진 것은 지진발생 닷새 만인 19일이었다. 텐트에는 온열 매트를 까는 등 시설을 보강하고, 흥해 공고 체육관, 남산초등학교 강당, 항도초등학교 강당 등에 일시 분산수용 되었던 이재민들이 다시 실내체육관으로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20일 포항 지진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보유하고 있는 다가구 임대주택 160채를 무료로 지원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재민들은 살던 집의 정밀진단과 대책이 완료될 때까지 임대주택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도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세대들이 맨 먼저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인열은 아버지와 함께 체육관 텐트생활을 벗어나 지진발생 열흘 만에 보금자리를 제공받았다. 집단 포로수용소 같은 곳에서 모진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인지 임대주택 입주는 신혼의 집들이 같았다.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대성아파트 E동은 재건축을 위해 곧 헐리게 되었기 때문에 집주인들에게 통보하여 필요한 살림도구들을 챙겨올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방 2개와 주방겸용 거실이 있는 15평의 아파트가 좁기는 했으나 실내체육관 생활에 비하면 천국처럼 느껴졌다. 외할머니 집에 가있는 어머니가 완전히 회복되기 까지는 아직도 3개월은 더 기다려야 한다. 인열은 일찍 일을 나가시는 아버지를 도와드리기 위해 자기가 아침식사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인열아! 식사하자−.”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늦잠을 잔 것이었다. 진구는 언제나 아들을 다그치거나 꾸중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취업시험결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인열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회복했지만 새로운 염려로 가슴이 무거워졌다. 경북지역 9급 공무원 시험발표가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12월 13일 인터넷 발표에는 이번에도 인열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기대감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도 없었다. 아들의 대학공부를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신 부모님께는 차마 결과를 말씀드릴 수 없었다.
다음날 저녁 인열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타워크레인 기사로 일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석암이, 오랜만이야. 너희 집에는 지진피해가 없는가?”
“응, 우리 집은 괜찮아. 대성아파트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던데······.”
“그중에도 E동인 우리 아파트가 가장 심했어. 실내체육관에서 난생처음으로 대피소생활을 해보았지. 게다가 어머니는 서울에서 심장판막수술을 받고 내려와 사흘 만에 지진을 만났으니······. 어머니는 제주도 외할머니 댁으로 피난을 가셨어.”
“어때, 공무원시험은 좋은 소식이 없나?”
“워낙 바늘구멍이니······. 너는 일찍부터 생각을 잘했어! 요즘 건설현장에서 보이는 것은 타워크레인뿐이던데.”
“그렇게 생각만큼 큰 재미는 없어. 나야 뭐 아예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되었으니까. 살길을 찾다보니 이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잖아.”
“이제는 어떤 일이든지 해야겠어. 부모님 보기도 미안하고 죄송해서······. 나도 타워크레인을 한번 배워볼까?”
인열은 정미와 함께 꾸던 높은 꿈을 접고 ‘포도원 품꾼’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시작할 당시에는 타워크레인이 건축 붐을 타고 한창 수요가 많았지만 지금은 현상유지라고 할까. 장비들이 오래되고 모두 낡아 곳곳에서 잇달아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나고 있잖아. 네가 꼭 하고 싶다면 포클레인 기술을 권하고 싶어.”
“그건 어떻게 운용되는데?······.”
“우리 외삼촌이 포클레인 사장이야. 자기 차 한 대만 있으면 누구나 사장이라고 부르지. 포클레인은 개인 사업을 하면 월평균 900만원은 받아야 된다는 거야. 거기서 기름 값, 차 유지비, AS비용 등을 지출하고 나면 4~500만 원 정도 남게 되지. 중기업체에서 정식기사로 일하면 월평균 300만원 좀 더 받는데, 기름 값이나 유지비 같은 것은 회사가 부담하고.”
“그것도 소위 일류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은 또 다르겠지?”
“포클레인 기사들의 로망이 S기업이나 H기업에 정식기사로 들어가는 것이지. 외삼촌은 몇 년째 줄을 댔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아.”
“대기업에 들어가려면 기술이력과 함께 인맥도 있어야겠지. 이젠 전공한 조선업도 희망이 없고,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도 접었어. 공무원 증원으로 일자리를 늘린다는 정부의 발상은 대학의 전공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어! ······나도 포클레인 기사가 될 수 있을까?”
“너는 하기 만 하면 나보다 더 잘할 거야. 아무래도 인맥도 많을 거고.”
석암은 굴삭기 기사가 되려면 먼저 필기시험에 합격을 하고나서 중장비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실기시험을 쳐야 한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12월초만 되면 길거리 여기저기서 캐럴이 흘러나오던 성탄절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지만 우뚝 선 교회당마다 트리장식으로 오색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깨가 축 처져 집으로 돌아가는 인열에게 ‘참사랑은 최고의 자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다’는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랑의 대상도 ‘높고 큰 자’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라는 ‘말씀’이 되울리고 있었다.
인열은 자세한 것을 알아보기 위해 중장비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굴삭기 면허를 취득하려 하는데요?”
인열은 중장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3톤 이상입니까, 미만입니까? 그걸 결정하셔야 돼요.”
“3톤 이상과 3톤 미만 굴삭기가 어떻게 다릅니까?”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 큰 포클레인은 3톤 이상입니다. 조그만 철거작업이나 실내 리모델링을 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3톤 미만입니다.”
인열은 굴삭기에 대한 사전 지식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소 민망했지만 여직원은 친절하게 자세히 안내해주었다. 면허를 따려면 ‘큐넷 홈페이지’에서 접수를 한 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학원에 등록하고, 실기시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기시험 교육 수강료는 1시간에 12만원, 보통 12시간은 배워야 실기에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험은 언제 있습니까?”
“매주 마다 한차례씩 있는데 올해는 학과도, 실기도 이미 끝났습니다. 내년 일정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혹 1월 달에 응시 하려면 지금부터 필기시험 공부를 해놓는 것이 좋겠지요.”
인열은 중앙동 청담서점에서 굴삭기 필기시험 문제집을 한권 구입했다. 학원비는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 인력사무소를 통해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나 인열은 그가 바라던 ‘최고의 자리’를 내려놓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정미와의 사랑의 꿈이 빠르게 퇴색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인열은 그의 인생에 지진피해보다 더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안유환 : 계간 『한국동서문학』 소설 등단. 소설집 『둥근별』 『그는 언제나 맨발이었다』, 시집 『그림자의 귀향』, 수필집 『마음을 건드리는 노래』 등. <광나루 문학상> <부산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크리스천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부산소설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