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나비경첩 외
김건화
후미진 뒷방 농짝 문에 걸린 거무스레한 경첩에서 접고 펴는 날개의 꿈을 보았다
굳게 닫힌 수직 표면의 날갯짓은 엇나간 결, 목재 속으로 파고들다가 허공 휘저어 보면 기억의 곳집이었을 이곳
차곡차곡 쌓았을 슬픔의 무늬로 저승 갈 때 입을 한 벌 삼베 수의를 무쇠나비는 장롱 속에 숨기고 있었다
닫혀있으나 우리는 어긋난 문짝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대던 날들은 모두 박제 된 검은 날개의 비애를 아는 박쥐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열고 닫히는 세상의 모든 경계에 한 마리 얹어둔 시커먼 무쇠나비 모란이 꽃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의 여백을 가졌다
슬픔을 머리맡에 두는 것이 오랜 화두 인양 홑겹 합장으로 모은 양쪽 날개가 이념의 산맥을 넘어간 아들의 수위를 지키느라 오늘도 웃풍에 시리다
어느 날 홀연히
백목련 꽃핀 가지가 다보탑을 누를 때, 눈물로 벼랑을 살피는 동백은 석가탑이다
함께 바라보던 대웅전 용마루, 제 무게에 겨워 추락하던 눈들은 한쪽으로 치우친 침묵을 닮아갔다
어찌 보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선남선녀, 천 년을 지키던 인연의 힘도 아랑곳없이 균열을 만들었다
해체 보수 들어간 절 마당 모퉁이, 다보탑 옆구리에 귀를 대고 내가 들은 것은 지아비 잃은 여인의 통곡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 지아비 그리며, 늘 단아한 모습 보여주던 지어미는 틀어 올린 머리칼을 흐린 하늘로 푼다
내리는 눈은 시계 방향으로 도는데, 사선을 고집하다 어느 순간 멋대로 휘날린 나의 오늘은 역방향이다
떠나보낸 슬픔에는 아무런 질서가 없다는 듯, 하늘 가장자리에 말줄임표를 찍으며 낮의 새들이 흐린 하늘로 날아간다
단추論
여분의 단추를 더듬어본다 누구의 도움 없인 다 채울 수 없는 원피스 뒷단추는 여자의 넝쿨심리다 얌전하게 채워진 단추 간격 사이로 들뜨는 가슴은 꼭 눌러 두어야 할 관능이다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들은 고속 질주하는 지퍼를 좋아하지 한 번도 폭주를 꿈꾸지 못한 내게 목 위까지 꼭꼭 채운 단추 슬그머니 풀어주는 사람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을을 견디며 꼭꼭 단추를 여미는데 급급했던가 하지나 처음부터 잘못 채워진 단추는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하나? 옷을 바꿔 입어야 할지, 그냥그대로 살아야 할지 몰라서 헐거워진 단추 구멍만 더듬어 본다 저 겨울 하늘에 떠도는 별들도 어쩌면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간 우주를 배회하는 단추들이지 옷 바꿔 입을 생의 환생구간이 오면 어디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단추들, 그때까지 더 이상 나를 가만두지 마!
널배를 밀다
갯벌은 어머니의 등에도 있다
휘몰아치는 북풍 뒤로 썰물 빠져나간 자리 눈발은 칼날의 각도로 비껴 내려서 외발로 미는 널배는 갯벌의 몸을 가른다
먹빛 지층에서 바다의 젖줄로 살을 채운 꼬막 물결무늬 주름 선명한 맨몸 드러내고 진흙 묻은 입을 침묵으로 꽉 다물고 있다
소일거리로 꼬막을 캔 적 없지만 대처로 떠난 머리 큰 자식이 혀 내민 손자 손녀 웃음재롱 보여주는 탓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는 노모의 눈은 진눈깨비도 다 빨아먹은 갯벌이다
진흙바닥 청소부처럼 헤맨 오십 년 세월이라며 앙다문 꼬막의 등을 언 손으로 긁는 어머니 말물 들기 전 끝내야 하는 사투는 시도 때도 없이 몸서리친다
어머니의 갯벌, 그 웅숭깊은 품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바다의 딸인 내 몸속에도 갯벌을 펄펄 살아있어 머지않아 질긴 생명의 말을 들려줄 것이다
무릎 꺾인 막막한 하루도 길었다고 석양은 마지막 온기를 온몸으로 쏟아 붓는다 이때 내 정신은 졸고 있던 짱뚱어 깨워 내 정신은 널배를 밀러간다
오래 신발장 안에 넣어두어 삭아가는 어머니의 장화를 꺼내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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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 외 3편
최연
한 떼의 말들이 몰려오고 있다
키를 훌쩍 뛰어넘는 높이에서 바람에 날리는 말의 갈기
하얗게 부서지는 말발굽 소리
얼얼한 내 고막처럼
지상에서 떠오르는 내 두 발처럼
너의 눈빛과 마주친 그 순간처럼
징검다리
개울을 건널 때 8할이 물에 잠긴 돌멩이를 골라 디뎠다 몸살 난 아버지 신음 같은 울림이 가방끈 짧은 큰 언니 희미한 웃음 같은 주름이 몰살을 떨게 하여 쉬이 돌아서지 못하는 벌걸음 돌멩이 위에 사리 같이 구르는 물방울이 별로 말 없으시던 아버지 몇 마디 말처럼 반짝 빛나고 있다
만약
톡 금이 간 계란에서 흐느적거리며 쏟아진 흰자 후라이팬 가득 퍼져버린다 내가 품어주었다면 단단하게 굳어질 뼈 하얀 실 같은 깃털, 부뚜막 같은 따스함을 믿고 막막한 벽 부리로 쪼아댔을 텐데
불에서 점점 익어가는 계란 후라이 그 위에 부서진 계란 껍질 작은 조각이 깨진 사금파리처럼 가슴에 박힌다
겨울나무
지구에 꽂은 콘셉트
차가운 겨울에 오들오들 떨지 않고 싶어
한 칸 한 칸 충전된 열로 노란 꽃 분홍 어우러지게 하고 싶어
논보라 몰아쳐 쌓이면서 고단한 몸 뾰족한 철심 깊게 담근 채 반듯하게 세우는
둥그런 껍데기 안에 꼭꼭 숨기어 간직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