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친일분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그는 우리의 대통령으로 18년간이나 철저한 인권유린에 바탕을 둔 군사독재정치를 자행했다. 박씨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도 아닌 총과 칼로 자유민주주의 정권을 쿠테타로 무너뜨린 반란범이자 범죄인이다.
혹자는 말한다. 우리가 지금 배불리 먹고 살고 있는 건 박씨의 업적이라고!
허나 아무리 악한 인물도 부분만 놓고 바라보면 아름다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전체적으로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이 될 수는 없듯이 박정희의 일부분을 미화해서 그를 전체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에 대한 미화!
그의 업적은 한국식 개발독재민주주의, 그것은 빠른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한 건 60년대 세계경제 흐름이던 개도국의 저렴한 인건비와 특히 우리나라의 근면성으로 인해 개도국이 발전하는 단계였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저임금 희생과 저곡가 정책으로 발전의 시금석이 되었던 것을 왜 간과 하는가?
하여 평등사회를 이루지도 못했고, 극심한 도덕불감증의 기회주의 사회를 만든 것이 그의 업적이라면 업적이다.
역사의 한 줄기에 과연 그의 업적과 과오가 어떠한지 직접 비교해 보시라.
박정희는 독립군을 때려잡는 만주군관학교에 자원해서 들어갔다. 그는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라는 혈서를 쓴다. 이것은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단 한명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스스로 자진해서건 강제로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의 영예를 안은 그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그리하여 천황주의자의 신봉자가 되어 '조센징 토벌'에 몸과 마음을 바쳐 젊음을 불태우게 된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은 대략 제1기∼제7기까지 50여명 정도다. 훗날 이 만주군 출신들이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 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등 정부와 군의 요직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요 인물이 되었다니 참 서글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는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하려고 군관학교 시절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110회정도 투입되어 항일 세력을 몰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일제의 항복과 조국의 광복!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는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당시 한반도 상황은 온통 붉은색(좌파)으로 뒤덮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러한 권력의 흐름에 곧바로 편승해 좌익계열의 장교가 된다. 이후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자기만 살아 남는다. 이후 그는 우익장교가 되어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아시아 최초의 시민혁명인 4.19를 짓밟고 민주화로 가던 발걸음을 차단한 채 일본 충견들을 끌어모아 "조국근대화" 란 기치 아래 20년간 독재정치에 광분한다.
그는 지역감정 조장하고 한반도 남쪽을 반공으로 도배하는 길만이 자기의 과거를 은폐하고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또한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 시키면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일본은 10원 한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작품이다.
우리민족은 일제에서 해방되었지만 민족의 정기는 바로 서지 못한 지금,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친일 행위는 반드시 그에 응당하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가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절대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