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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특집| 집중조명 61회
「허세욱의 삶과 수필 세계」
특별 좌담
사 회 : 고봉진
참석인원 : 13명
정 리 : 이경은
일 시 : 2010. 7. 10.
장 소 : 계간수필 사무실
사회 : 오늘 이렇게 허세욱 선생님에 대한 추모 좌담회를 갖게 되어 마음이 착잡합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타계를 하셔서 많은 분들이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선은 허 선생님의 삶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뒤에 이분의 ‘수필 세계’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정진권 선생님께서 한 말씀해 주십시오.
정진권 : 저는 별로 드릴 말이 없습니다. 만나서 술 먹고, 글 이야기하고, 근년에는 탁구도 같이 치고, 그러다 보니 어언 40년입니다. 지난 5일 여주 땅, 하관 뒤 그 관 위에 흙 한 삽 떠다 뿌릴 때 울컥 솟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승에 머무르던 일흔일곱 해 동안, 연구하고 가르치고 글 쓰고 우리 수필 문우회를 이끌고, 이런저런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힘든 일도 많았을 테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두어 후배와 함께 한강변 어느 술집에 앉아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봤습니다. 하느님, 그의 애 많이 쓴 영혼을 위로하시고 당신 나라에서 편히 쉬게 하소서, 이렇게 빌며 막걸리 한잔을 했습니다.
이 밖에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회 : <수필문우회>의 창립회원으로 정진권?박연구?허세욱 세 분이 동갑으로 유별하게 서로 절친하시고, 그동안 긴 세월을 같이 글을 쓰시면서 살아오셨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남으신 정 선생님께서 절실하고 슬픈 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자유롭게 서로 말씀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홍혜랑 : 나이가 들면서 많은 부음을 들었지만 이번처럼 뒤통수를 맞은 듯이 억울하다는 느낌은 처음입니다. 연세가 있으셔도 이분은 항상 추구하는 삶이셨고 포부가 원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병환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습니다. 한 번 전화를 주셨는데 “내가 조금 나쁜데…….”라는 말씀에, 선생님은 워낙 건강하시니까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 극복하실 거라고 일상적인 위로의 말씀만 드렸습니다. 그때 이미 병세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정신이 좋으실 때 찾아뵐 걸 하는 아쉬움만 남고 죄스러운 생각마저 듭니다.
김진식 : 참으로 충격입니다. 허 교수님과는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개인적인 관계가 많았습니다.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였습니다. 인사동의 언론인들이 많이 가는 음식점에서 김용구, 정봉구, 허세욱 선생과 저 네 사람이 술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필계에 관해 여러 가지 일들을 얘기하고 해결하곤 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작가들이 이분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유혜자 : 저는 우선 이분의 인간적인 모습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72년 창간된 《수필문학》지 9월호 특집 《중국 수필선》에 주자청의 <뒷모습>을 번역, 소개해 주신 작품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직접 뵌 것은 몇 년 후 미당 서정주 선생 댁에서였습니다. 대만에서 시로 등단해서 《중국현대문학선집》에 세 작품이나 실린 분이라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돌아가신 후 74년도에 발표하신 <送辭>라는 글을 보니 고칠 수 없는 중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선친에게 “학처럼 훨훨 날아 청산에서 영원히 사세요.”라는 송사를 했는데, 후일 만나 뵈면 나무라지 않으실까 하셨더군요.
허 교수님께서 갑작스런 발병으로 고통스러워하셨다는데 너무 일찍 운명하시는 것을 보며 섭섭하면서도 한편 덜 고통당하시려고, 아니 그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덜 주려던 평소의 남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며 눈물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79년에 수필문우회 창립을 계기로 두어 번 작은 모임에서 가까이 뵈었습니다. ‘글 좋고 사람 좋고’ 라는 문우회 회원 후보를 말하는 자리에서 그토록 섬세하고 예리하게 수필계의 인물이나 작품을 파악하고 계심에 놀랐습니다. 거의 40년 동안 뵈었지만 진정 선비의 풍모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최순희 : 지난 5월 합평회에서 편찮으신 것을 알고 그 다음날 전화 드렸더니 “고마워. 고마워.” 유달리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병환이 이렇게 깊은 줄 알았으면…….
개인적으로 저는 73학번 외대 출신이지만 과가 달라서 선생님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 《여학생 회지》 편집지도를 하시던 선생님께서 거기에 실린 글을 보고 최순희가 누구냐며 글이 좋다면서 지나가는 말로 칭찬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한 번 유심히 알아보았더니, 수필도 쓰시고 대만에서 아주 유명한 분이시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73년 무렵이라 젊으셔서 그랬는지 외모가 보통의 교수 같지가 않으셨어요. 크림색 더블 브리스트 양복에 감색 베레모를 쓰셨는데, 저는 ‘참말 멋쟁이시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수필 등단하기 전에 <정신문화 연구원> 세미나에서 뵙고 인사를 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제가 수필 문우회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선생님 서가에서 옛날 73년도 제 글이 실린 ‘여학생 신문’을 찾아서 저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사실 제가 무엇을 썼는지도 잊어버렸는데……. 이런 게 허세욱 선생님이 대인다우면서도 세심하고 다정하신 풍모를 드러내는 일면이라고 봅니다.
한 번은 제가 사는 곳이 산 밑이라 외대 산악회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을 오른 뒤, 술을 마시며 이야기나 나누자며 불러주셨습니다. 선생님은촌음을 아껴 쓰는 분인데, 연로하신 분들과 어느 날은 탁구를 하고, 테니스도 치시고, 산에 가시기도 하면서 수필문우회 일을 하느라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일대 일로 다 찾아보시는 거예요.
저는 종종 제자도 아니면서 제자같이 선생님께 약간 못되게 굴기도 했어요. 중국문학을 하셔서 그런지 이분은 영 당신 생각을 안 밝히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두루 청취하시기를 잘합니다. 그럴 때마다 전 답답하고 약도 오르기도 해서 “선생님! 이미 답은 다 정해 놓고 다른 사람들이 그 정답을 말하기를 기다리시는 거죠?” 하며 괜히 엇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할까요. 선생님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게 여겨질지 몰랐어요. 아니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이렇게 슬플지…… 정말 몰랐어요. 문우회에 자주 참석하지 못한 것이 영 가슴에 남아요. 후회도 되고요.
이태동 : 저는 수필 문우회에 들어오기 전에 지면으로만 뵙고 만나 뵌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 와서 처음 뵈었습니다. 허 선생님께서 중국 문학을 평생을 하셔서 그런지 성격적으로 중국적인 성품을 많이 가지셔서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잡지 편집을 하면서 이경은 선생과 얘기를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면을 보고 선비보다는 군자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상하시면서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시고, 상당히 절제를 잘하시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인死因을 들으니 간이 나쁘셨다는데, 한 2년 동안 이분이 의욕이 너무 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사무실을 옮기면서 하시는 일도 많았고, 또 내년엔 한?중?일 수필 심포지엄도 하실 계획도 세우시고, 그런 면에서 조금 절제하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두 번 정도 이분을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허 선생님의 시집 평론을 쓸 때였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저의 의견을 말할 때입니다. 항상 잡지에 대한 의견을 불쑥 말씀드려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주시고, 지도자로서 <문우회>의 회장으로서 모든 일들을 승낙해 주셨습니다. 참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좀더 적극적으로 편집위원 일을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 많아 사양도 하고 그랬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니 죄진 기분마저 듭니다.
허 교수님의 세계는 한문의 세계입니다. 근엄하면서도 신비롭고, 침묵이 있으면서도 다정하신 분이었습니다. 역시 중국식입니다.
이경은 : 저는 대학에서 중국문학을 했지만 직접 배울 기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중국문학을 한 이가 《계간수필》에 들어왔다고 그리도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어제처럼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은 제자 아닌 제자로 저를 받아주시며, 곁에 두고 하나씩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때론 엄정하게 때론 다정하게 한 걸음씩 사람으로서, 편집인으로서, 문단의 후배로서 살아나갈 길을 말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십 년을 넘게 조수로서 선생님 곁에 서 있었던 세월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돌이켜보면 그 세월이 제겐 큰 선물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이 모든 게 꿈만 같아 믿기질 않습니다.
선생님은 《계간수필》을 통해 등단한 <계수회원>들을 참으로 아끼셨습니다. 이들에게 <계수회>란 모임을 만들어 이름을 지어 주시고, 13년간을 지도와 편달을 아끼지 않으시고 모든 마음을 다 담으셨습니다. 그 바쁘신 가운데에도 합평회를 단 한 번 빠지신 적이 없고, 회원들의 작품을 일일이 읽어 매번 훌륭한 합평을 해주셨습니다. 십 년이 넘게 이 합평을 지면으로 남겨 멀리 지방에 계신 회원들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고, 동인회 앤솔러지를 내도록 격려하셨습니다. 바쁘신 분이신데, 참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으름 피지 말고 그저 좋은 수필을 쓰라.”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사회 : 그러면 선생님의 삶의 이야기에서 선생님의 수필 세계로 넘어가겠습니다.
변해명 선생님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변해명 : 여러분들께서 그분에 대한 말씀을 다 하시어, 저는 인간과 작품세계를 묶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허세욱 선생님은 중국 예술과 문화를 통해 여러 분야에 뚜렷한 업적과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 많은 중국어 시집과 수필집을 내어 중국 대만은 물론 대륙문단에도 널리 알려져 중국인에게 한국을 이해시키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십니다.
서로 다른 두 언어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문화와 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고전과 현대를 넘나들며 동양문화의 중추에 서셨던 선생님이 남긴 시와 수필집, 번역서, 학술서 등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경지였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시대를 넘기며 갖가지 애환을 가슴에 지니고 살던 분이라 자물쇠가 잠긴 빈집으로 남아 있는 고향이 얼마나 한스러운 아픔으로 그리워했는지, 이국 생활을 남달리 많이 하신 분으로 평생을 그리움을 품고 살았음을 그의 글 속에서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고향의 부엌에서 어머니가 피우는 불꽃을 바라보며 초립동이는 파란 솔잎에 타오르던 불꽃을 통해 삶의 열망과 뜨거운 영혼의 흔들림을 체험했고, 그 체험은 그의 상상력 속에서 많은 작품을 묶어내었습니다.
또 하나 그의 글에는 죽음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94년에 쓰신 수필 〈산이 거꾸로 누울 때〉의 한 대목이 마지막 당신의 모습을 쓰신 것 같아 그 대목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참 동안 흙을 만지다 보면 그 훈훈한 온도가 내 체온으로 느껴지며 그 연연한 흙더미가 내 살결로 느껴질 때, 나는 그 자리에 살며시 눕고 만다.
…….
가슴이 허전해서 낙엽들을 쓸어 모았다. 그것들을 가슴과 배에 올리면 옷이 되고 이불이 된다…….
뻘건 수레바퀴가 한 발 두 발 성큼성큼 내려와서 산등성이를 밟고 들을 건너고 호수를 건너서 이 마을의 저 끄트머리에 걸리더니 마지막엔 참새처럼 훌쩍 날아서 사라진다. 금방 어둠이 밀려온다. 가을 산의 등짝과 어둠에 흘려서 돌아갈 줄 모르는 마음은 어쩌면 이 목숨의 마지막을 끌어안은 자세와도 같을지 몰라 나는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산이 거꾸로 누울 때> 중에서
김영만 : 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첫째로 동양사상, 그 가운데에서도 노장사상이 그의 사유세계의 기반이 아닐까 합니다. 작품 <지팡이 소리>에서 보듯이 층층시하에서 자란 유가적 구성적 품성이 작품 도처에 나타나는 한편, 무위와 원융, 자적과 소요, 자유와 방랑의 도가적 해체적 정서가 그를 또한 이끌고 있습니다. 작품 <중산간>에서 그는 방랑자적인 자신의 삶, 아니 정신적 편력을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기도 합니다.
둘째로, 그의 작품은 시적 산문의 한 전범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응축하면 한 편 시가 되고, 한 편의 시를 풀어 놓으면 그의 수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늘 진했습니다. 독자들은 그의 눈물을 여러 작품에서 목도하는데 바로 섬세한 시인의 정서를 보는 것입니다. 그가 말년에 끝없는 광야 앞에서 호곡하던 연암 박지원에 탐닉한 것도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로, 그의 작품의 특징으로 나는 또한 그의 작품의 음악성을 들고 싶습니다. 음音은 그가 구사했던 씨알 같은 어휘이고 악樂은 그의 문장 속에 흐르는 운률, 즉 리듬입니다. 특히 그의 어휘의 실험성은 놀라운 것으로 형용사, 동사 등을 명사화 또는 명사를 그 반대로 구사하여 독자들의 눈길을 끕니다. 이를테면 망망한 바다를 그저 망망이 망망은 망망으로, 정면으로를 정면했다, 비명을 질렀다를 비명했다, 등입니다.
끝으로 서울대 신문수 교수가 오늘날 우리들의 고향이란 개념에 허 선생의 ‘움직이는 고향’을 하나의 키워드로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고, 소설가 김훈이 중국의 ‘몽롱시’라는 개념을 허 선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키워드를 만들어낸 분들이 문우회엔 여럿 있었습니다. 허 선생과 함께 모두 우리의 자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유혜자 : 작품 세계를 살펴보면, 이분은 수필을 정의 미학이라 하고, ‘서정성?서사성?설리성’이 균형을 이뤄야 좋은 작품이라고 하셨는데, 허세욱 선생님이 작품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소재나 주제는 한국적 전통 정서에 바탕을 두고 색채와 선, 원근법과 음양이 선명한 동양화적인 분위기로 은은함을 풍깁니다. 또한 서정성을 품은 시적 상상적 언어로 리듬감을 주기도 합니다.
사라져가고 변하는 것에 대한 향수, 자연, 전통적 가치를 현대 감각에 맞게 조화를 시도하면서 수필의 격을 높였습니다. 70년대 초엔 고향과 천륜에 대한 글이 많습니다. <움직이는 고향>, <굴뚝이 사랑스럽다>, 민족 분단에 대한 회한의 <산하山河는 강강수월래>가 생각납니다. 다른 분들이 말씀 안하신 93년도의 작품 <돌을 만나면 비켜가는 물처럼>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네 시골에서 닭과 개가 먹이를 갖고 다투지 않고 어울리는 정황을 그립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만원 기차 속에서 편히 앉아서 서서 고생하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눈을 감고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생각합니다. 돌을 만나면 비켜 흐르면서 모여들면 큰 힘이 되는 물, 노자의 “하늘 아래 물보다 유익한 것은 없지만, 물은 세상에서 가장 억세고 이길 자 없느니라.”가 떠오릅니다. 가난하던 시절, 고등어 한 토막도 양보하고 몽당이 불을 서로 양보하며 선잠을 잤던 선인들의 훈훈한 정을 그리워합니다. 우리 민족의 물 같은 인정과 힘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희망을 암시하는 글이어서 좋았습니다.
홍혜랑 : 저는 합평회 때마다 모든 작품이 서양적이든 한국적이든 김영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동양적인 시각으로 바뀐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동양철학은 잘 모르지만 그 속에 모든 것이 있구나 했었습니다.
우리 문우회에 허세욱 교수님이 계셔서 우리의 지평을 넓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이점 감사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김영만 : 그 <몽롱시>라는 것을 저도 처음 들었는데, 상당히 많은 분들이 그것을 강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것이 무엇이냐고 여쭤보니까 중국같이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시가 몽롱해질 수밖에 없다는거예요.
이태동 : 이분의 시평을 쓸 때 시의 질서를 찾아야 하는데 사실 몽롱했었습니다. 초창기의 언어는 역시 한시에서 나온 언어입니다. 문덕수 씨가 이분의 시가 초기에는 서정적이다가, 후기로 넘어가면서 사회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70~80년대 시대 배경 속에서 존재 문제는 다뤘지만 사회와는 거리를 두었고, 문단과의 교류도 소원해서 크게 각광을 못 받았습니다. 우리 문단의 손해지요. 저는 오히려 수필보다는 시가 한 수 위였다고 생각합니다.
김진식 : 어릴 때는 한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것도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 더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교적이고 초월적인 면이 많습니다. 은유법을 많이 써서 약간 몽롱하게 보이게도 했습니다.
이태동 : 중국 문학에 젖어 있던 분이시지요.
정진권 : 제가 허 선생 수필하고 시를 좀 읽었는데, 제가 촌사람이라 그런지 촌스러운 글만 지금 제 눈에 남아 있습니다. 이 표현이 어떨진 몰라도 가령 정서, 서사, 심상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임실’입니다.
최순희 : 저에게는 허 선생님의 첫 이미지가 도회적이었습니다. 후줄근한 분들이 많았는데, 댄디 스타일이셨죠. 그런데 나중에 작품세계를 접하고 보니까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분의 작품이 의외로 고향에 대한 글을 쓴 것이 많아 놀랐습니다. 사실 저는 그 둘이 잘 매치가 되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글들이 참 좋았습니다.
자전적 회상 수필 <서동 시절>에서 고향에 관한 것은 일종의 엑기스라고 생각합니다.
정진권 : 글쎄 이분이 그렇게 멋지게 차려 입고, 꼭 만나는 것은 지하 선술집에서 술을 마셨어요. 허수룩한 장소에서도 참 맛있게 드셨습니다.
김영만 : <움직이는 고향>은 임실이 아니라 바로 어머니가 계신 곳이지요.
사회 : 저도 이분을 처음 만났을 때 <서동 시절> 얘기하시는 것을 듣고 인상이 깊었습니다. 저는 시보다는 수필에 아주 반했습니다.
가신 님에 대한 정으로는 밤을 새워도 다 못할 것이지만, 이것으로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