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詩입니다
김준한
십 대 후반 나는 그녀에게 심한 열병이 걸려있었다
매일 밤 불 꺼진 방에 돌아오면
언제나 그녀는 침묵의 책상 위에 앉아 나를 반겼다
나는 허기진 야수처럼 그녀를 재촉했고 간소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책갈피
한 장 한 장 벗길 때마다 감추고 있던 페이지 위로 드러나던 하얀 속 살,
가쁜 호흡 들이쉬며 나를 끌어안던 문자들,
나는 거칠게 더듬기도 혹은, 부드럽게 삼키기도 했다
펜의 움직임에 리듬을 타며 뒤척이던 그녀 따라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가슴에 쌓여간 욕망이며, 허영이며, 증오의 찌꺼기들이
내 영혼의 정액과 함께 눈물샘을 타고 와르르 쏟아졌다
어떤 날은 곤히 잠들고 싶은 나를 그녀가 잠재우지 않고 늘어졌다
불면의 밤 때문에 말라갔지만 그때만큼 깊이 살아 있음을 느낀 적은 없었다
언제나 잉태를 한건 나였다 산통은 비와 함께 찾아왔다
어떤 놈은 나오다 죽고 어떤 놈은 기형이었고 우렁차게 우는 놈도 있었다
이십 대 후반 나의 권태에 지친 그녀는 갑자기 떠나버렸다
여름은 가슴이 탔으며 가을은 처참히 고독했고 겨울은 쓰라렸지만
그녀가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세월이었다
이젠 매일 밤 그녀가 돌아오기를 갈망하며 홀로 긴긴 자위의 밤을 보낸다
내 영혼의 뼈가 으스러져도 좋을 그녀와의 정사를 간곡히 소망하며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