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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창조 규례를 따라서 사는 삶-안식하고 일하고 혼인하며
1. 은성아, 네가 물었던 것에 대하여 오늘에야 답하게 되어서 미안하다. 그동안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준 것도 고맙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점 성경도 배우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깊어지고,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도 뜨거워지면, 먹고 살기 위하여 이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이 장애물로 여겨지거나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고 마지못해서 하는 일들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교회에 가면 여러 사람의 신임을 받고 크게 칭찬을 받지만, 직장이나 가정에 가면 비난을 받고 배척을 당하는 문제아가 되기 쉽다. 그것이 바람직한 자세일까?
2. 새찬송가 450장의 가사는 이렇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꿈같이 헛된 세상일 취할 것 무어냐 / 이 수고 암만 하여도 헛된 것 뿐일세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되도다 / 이 진리 믿는 사람들 다 복을 받겠네
살 같이 빠른 광음을 주 위해 아끼세 / 온몸과 맘을 바치고 힘써서 일하세 아멘
이 찬송을 부르는 시간마다 ‘꿈같이 헛된 세상일을 하는 수고는 암만 하여도 헛된 것 뿐’이라는 확신을 하면서 가정이나 직장에서 하는 일을 점점 소홀히 하거나 극단적인 경우엔 죄악시(?)하게 된다. 간혹 목사님이나 직분자들로부터 주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세상은 잠깐이요, 한 번뿐인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은 자신이 얼마나 믿음이 없고, 주님을 슬프게 하는 자인지 고민하면서 울먹이며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를 고백한다. 그러면 이러한 모습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일까?
3. 은성아, 우리는 항상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먼저 생각할 것은 창조규례이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만물을 다 창조하신 다음에 무엇을 하셨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1:2-3) 그리고 나서 사람을 지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하셨으니 처음부터 사람은 안식하고 일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 후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2-24)라고 하여서 아담과 하와가 혼인을 하여 살아야 할 것을 명령하셨다. 다른 동물들과 전혀 다르게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과 세상 일을 할 때에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안식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엿새 동안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땀을 흘리며 일해야 한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혼인하고 가정을 이루어서 대를 이어서 안식하고 일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그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손수 만드신 사람이 창조주를 따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전에 이 땅에서 수행할 대사명(大使命)을 주시되, 하나님의 형상답게 여호와의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는(창 2:15) 일로부터 시작하여 더 나아가 온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하시는(창 1:28) 영광스러운 사명을 주심으로써 사람의 ‘노동’을 복되게 하셨다. 그리고 우주에 미치는 이 사명은 한두 사람이 감당할 수 없으므로,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하셨다. 즉, 사람은 첫 창조의 질서가 유지되는 이 역사 시기 동안에 ‘노동’과 ‘혼인’을 통해 주께서 주신 문화 사명을 수행하면서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향해 전진해 나아가도록 하신 것이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노예와 같은 비천한 일을 하더라도 바로 그 일을 통해 ‘유업(遺業)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고 주 그리스도를 섬길 수’(골 4:22-24) 있게 되었음을 기억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는 말씀을 사랑하며 순종한다. 그리고 주일마다 삼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예배 속에서 우리가 장차 온전히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을 이 땅에서도 미리 조금씩 맛보며 큰 소망을 갖고 헌신하고 봉사하려고 한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그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혼인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약의 자녀를 낳아 기를 수도 있게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안식’과 ‘노동’과 ‘혼인’이 모두 새롭게 회복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기뻐한다.
4. 자연법칙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초자연법칙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일하고 안식할 뿐만 아니라 먹고 살도록 지으셨다. 오래도록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거나 잠을 자지 않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도록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하여 갈 때에 광야생활을 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먹고 마시지 않아도 괜찮도록 하는 기적을 베푸신 적이 없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초자연법칙을 보여주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초자연법칙의 기적을 보여주시기는 했지만,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어야 했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셔야 살 수 있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굶주릴 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눠서 먹이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셨지만, 먹지 않아도 말씀을 듣고 배우는 동안에는 배가 고프지 않도록 하는 기적을 베푸시지 않았다. 그것은 자연법칙을 존중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요, 우리에게도 자연법칙을 존중하라는 계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것을 무시하면 공부는 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거나, 기도만 하면서 병원에는 가지도 않고 약도 거부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 심지어 일도 하지 않고 모여서 성경공부나 교리공부만 하거나 기도만 하는 일이 생겨난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12)
바울은 때로 복음을 강하게 전해야 할 때는 전심으로 몇 달씩 복음을 전했는데 이때는 아마도 집회의 장소를 제공한 신자가 바울의 거처와 음식을 대접했을 것이다.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신자들이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바울이 직접 일을 하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공급했다.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를 양육할 때에 단지 이론적인 학문의 교육만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기술교육을 했다. 히브리 학문과 헬라 학문에 능통했던 바울이 그 부모로부터 배운 것은 장막을 만드는 기술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면서 생활비용이 없을 때는 스스로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면에서 다른 신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생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떳떳하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너무나 강력한 말씀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살후 3:6-8)라고 말씀했다. 전도하는 일이야 어느 시대에도 긴급한 일이겠지만 바울 당시 역시 긴급하기 짝이 없었고, 한 시간이라도 다른 일을 하면서 전도와 교육을 하는 일에 지장을 주는 일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장막 만드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는 일을 거부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20장 33-35에서 왜 그렇게 했는지를 말씀한다. 교회에 보냈던 편지의 내용이나, 그가 삶으로 보여준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국민들로 하여금 땀 흘리며 일하지는 않고 정부가 나눠주는 것만 바라보게 만드는 정치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도 생각하게 한다. 게으르게 행하는 자들은 결코 칭찬받을 수 없고(마 25:26), 그런 자들에게서는 ‘떠나라’는 명령(살후 3:6)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나님은 구경꾼이 아닌 일꾼을 원하신다. 일감만 만드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5. 은성아, 우리는 영혼만 아니라 육체를 가진 존재로 지으신 것을 잊지 말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하녀가 부엌을 청소하는 것도, 수도사가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도 기뻐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청소하는 것도 기뻐합니다.” 하녀가 청소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생각을 하기가 쉬울까? 그리고 그런 가사를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기쁘게 할 수가 있을까? 자녀를 기르고 배우자를 뒷바라지하면서 보람있게 생각하고 행복하다고 할 수가 있을까?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거나, 철야를 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귀한 일이다. 그런데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하는 자세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그의 신앙은 어느 틈에 이원론의 신앙에 빠지게 될 수 있다. 기도하는 것, 찬송하는 것은 기쁘고, 예배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기쁘게 생각하면서, 청소하는 것, 요리하는 것은 힘겨워하고 짜증을 낸다면 자신도 모르게 성스러운 것과 부정한 것, 하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구별하는 위험에 빠져들게 된다. 죄와 세상적인 일을 잘 구별해야 마땅하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겉보기에는 작게 보이고, 늘 반복하는 일이고, 직접적으로 예배나 전도에 관계되지 않는 일을 할 때에 가지기 쉬운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정체성을 놓고 생각할 때에 ‘가장’이요, ‘남편’이요, ‘아버지’요,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직장의 ‘직원’이요, 우리나라의 ‘국민’임을 인정하고, 어느 것에도 소홀히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맡은 의무를 다하려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벽을 재건하던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느 4:9)라고 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파수꾼을 두어 방비도 했다. 더구나 믿지 않는 자들은 한 나라의 국민이지만, 믿는 자들은 두 나라의 국민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도 그만큼 많아진다. 그래서 지혜롭게 시간과 물질과 힘을 사용하면서 여러 영역의 의무에서 조화와 균형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니 훨씬 더 많이 수고하며 절제하며 희생해야 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섬김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영역도 그만큼 많아진 것을 감사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는 약속을 굳게 붙들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그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의 선한 소원을 따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첫댓글 지혜와 행함. 2-1
기도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상하지만 사실이다. 너무 지나친 “우리의” 행함과 너무 지나친 우리의 기도는 운명론으로 빠질 수 있다. 모든 것이 들어 있는 항아리를 칼빈이 주장했다는 것은 칼빈주의를 왜곡한 많은 것 중 하나이다. ‘난 그것에 대해서 기도했어’라고 말하고 한발 물러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양심을 안심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기대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하고, 당연히 우리가 직면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기도했을 뿐 아니라, 또한 행동했다.
이 젊은이들이 직면한 첫 번째 큰 위기는 그들이 속한 바벨론 궁정의 전 계층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고, 그의 지혜자들 중 아무도 그 꿈이 무엇이고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단 2:1-13).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가 와서 문을 두드릴 때, 그 일에 대해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단 2:14) 물었다는 것이다.
2-2 이 상황에서 다니엘이 처음 한 일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그 위기를 해결할 가능성들을 타진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친구들에게로 가서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왕에게 대답할 것을 계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며 기다렸다.
핵심은 다음과 같이 단순하다. 기도의 필요성이 지혜롭게 행동할 필요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건을 일종의 복음적 금욕생활로 바꾸는 일은 너무나 쉽다. 우리는 기도 생활에 힘쓰지만, 우리가 기도하는 바로 그 세상과의 의미 있는 접촉은 피할 때가 많다. 기도는 행동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함께 하는 것이다.
『진리의 깃발 vol. 189』, “기도의 삶을 해부하다”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 4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