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새벽 두 시에 배달돼 온 경향신문에서 신춘문예를 펼쳐 보았다. 시는 이해존의 <녹번동>이 뽑혔는데 시 쓰는 사람으로서 그 시에 대해 말해야겠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소설 당선작인 조영한의 <무너진 식탁>이다.
첫 단락을 읽고 나서 나는 형광펜을 집어 들었다. 빨간펜 선생 노릇을 해야 할 일이 많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설이 진행될수록 말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워낙 많이 튀어나와서 머리가 피로할 지경이었다. 이 자리에 그것들을 일일이 거론하기에는 내 팔이 아플 터이니 나를 경악하게 했던 것들 중 두 가지만은 펼쳐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작가의 무지를 꼬집기 위해서다.
1. “영목은 병실에서 나왔다. 병원 내부에 깔린 포르말린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잘못된 곳은 어디일까? ‘포르말린 냄새’다. 지구상 어느 병원에서도 환자들이 병을 고치러 드나드는 병원에다 포르말린 냄새를 흘리지 않는다. 작가 조영한은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피력하고 싶었나본데 병원 내부를 소독할 때 쓰이는 약품은 ‘크레졸’이지 포르말린이 아니다. 게다가 병․의원에서 크레졸 냄새가 사라진 지도 오래다. 조영한이 거론한 포르말린은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사용하는 냄새가 강한 방부약품이므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은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실뿐이다. 그런데 작가라는 사람이 무식하게 포르말린을 운운했다.
2. “(교통사고로 다리 수술 받은 아이가 발작을 하자) 의사까지 병실로 달려와서는 간호사에게 마취주사를 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간호사는 신중한 솜씨로 아이의 팔뚝에 박혀 있던 수액 주사를 뽑아내고 굵고 예리한 마취주사를 놓았다.”
이 대목에서는 여러 가지가 잘못되었지만 나를 경악케 했던 것을 먼저 내세운다면 의사가 발작하는 환자에게 ‘마취주사’를 놓으라고 지시했다는 부분이다. 어느 의사가 발작 환자에게 마취주사를 놓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자다. 마취주사는 수술 시 환자의 통증과 심리적 공포감을 해소하기 위해 사용하는 약물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제대로 만들려면 발작 환자에게 항경련제 페니토인을 주사하거나 신경안정제를 투여해 잠을 재워야 하는 걸로 써야 하는 것이다.
“간호사는 신중한 솜씨로 아이의 팔뚝에 박혀 있던 수액 주사를 뽑아내고 굵고 예리한 마취주사를 놓았다.”에서만 잘못된 것 세 가지를 뽑을 수 있다.
첫째, ‘신중한 솜씨’다. 신중한은 가볍게 행동하지 않고 조심스러움의 뜻을 가진 말이므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신중하게 선택했다 따위로는 쓸 수 있지만 ‘신중한 솜씨’로는 쓸 수 없다. ‘능숙한 솜씨’라고 해야 제대로 되는 거였다.
둘째, 요즘 병원에서는 링거를 맞고 있는 동안 다른 약을 추가해야 할 경우 주사바늘을 뽑지 않고 링거 주사바늘 부근에 있는 고무 부분에다 다른 약품을 투여한다. 그러니 조영한이 “아이의 팔뚝에 박혀 있던 수액 주사를 뽑아내고 굵고 예리한 마취주사를 놓았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셋째, ‘굵고 예리한 마취주사’라는 대목이다. 예리하다는 것은 연장의 날이 서 있거나 뾰족한 것을 나타내므로 굵으면서 예리한 물건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둥근 삼각형과도 같은 것이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조영한의 <무너진 식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엉터리 문장들로 채워져 있었으니, 나는 허탈해서 웃다가 화내다를 반복하면서 황당하게 끝을 맺는 결말까지 겨우 읽었다.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은 독자들을 위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써야 한다. 어설프게 혹은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을 함부로 쓰게 되면 나 같은 사람의 입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건 작가의 망신이다.
나는 조영한을 통해 다시 한 번 작가의 사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는 좋은 글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미숙한 데가 많은 조영한은 너무 빨리 등단하여 불안해 보인다. 앞으로 부단히 문장공부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공부에 매진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심사자인 박상우와 최윤은 이런 글을 당선작으로 뽑고 심사평도 황당하게 썼다. “폭력성에 노출된 현대인의 나약한 초상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꿈보다 해몽이 좋다.
첫댓글 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네요.
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될 거 같아요.
종아리에 회초리를 맞은듯 정신이 번뜩 듭니다.
'활자화된 자기' 저는 글이 그렇다고 생각되어요. 김지x 시인의 본모습도 결국 그가 써대는 글과 해대는 인터뷰 내용에 다 드러나고, 고맙게도 확실한 '반면교사'가 되어주시니... 부족한 부분 드러낸 글쓴이보다 평가한답시고 무지함을 드러내주시는 심사위원들의 정직함에 감사를 표합니다...
최윤 작가도 박상우 소설가도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인데
..
음... 이외수 작가가 시제이와 함께 문학상을 만든다는 글을 신문에서 보고 헐~ 했던 기억도 보태집니다.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이외수 문학상 보면서 저도 멘붕!
대상 그룹 후원으로 상금이 무려 1억.
대중적 인기와 문학적 완성도도 이해못하는 그룹 경영진을 탓해야 하려나...
그런데 최윤 박상우는 어째서 확연한 실수도 잡아내지 못했을까요.
대중적 인기가 모든 걸 뒤엎어버리고 있는 작금의 세상을 탓해야 하려나...
대중적 인기조차도 매스미디어에 의해 양산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