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속도감은 느리거나 빠르거나 오직 개별성이 강해 목을 맨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인에게는 시간은 무관심의 대상이기에 경과에 이어 무화되어 사라져 버린다. 나에게도 시간은 세월로 넘어가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 아내와 여가의 일부로 찾아간 영화속의 "국제시장" 은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할 사람의 삶을 소재화한 것이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한 영화였다. 평온한 상태에서 물리적 충격이 아닌 시각적 인지를 통해 감정의 변화로 눈물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연출 기법에 의해 장면속에 자연스럽고 은밀하도록 감정선을 삽입해놓은 감독의 자유 의지다. 자유 의지로 공감을 유도하고 스크린에서 관객석까지의 거리감을 메우도록 극대화한 결과물이다. 보통의 사람들을 스크린에 붙잡아놓았다면 두시간 반의 영화는 충분히 성공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나 같은 사람들이 거반 그렇듯이 일상 자체가 목적지가 없는 시간 열차에 올라탄 것처럼 특별하게 즐거웁거나 기대할 만한 꿈이 없는 무덤덤한 사회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잊혀진 역사속 전쟁의 단면을 통해 무의미해진 일상을 벗어나 잠시지만 진지하게 영화속의 주인공인 "덕수" 를 들여다볼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첫 화면부터가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근대 역사속의 6ᆞ25 전쟁. 일시에 기습을 받아 속수무책으로 낙동강까지 밀려 국가존망의 기로에서 대 반전을 이룰 수 있었던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작전은 북한군의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쟁을 종식하기위한 무모했지만 파격적인 것이어서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정도였으니,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전쟁사에 기록된 북쪽에서의 참패로 인해 흥남부두를 통한 미군의 철수작전. 미군의 철수는 정반대로 인민군에 의해 아군과 미군 후방 보급로를 차단시키려는 인민군의 봉쇄 작전으로 촌각을 다투는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시점이었다. 이런 사지에서의 마지막 미군 철수를 위해 투입된 "매러디스 빅토리아" 호 선상에서 앨몬드 장군의 위대한 결단은 전쟁의 목적은 다름아닌 사람의 생명이 최 우선임을 보여주는 참된 군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혹독하게 눈보라치는 흥남부두에서의 철수장면은 당시의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가를 긴장속 현장감으로 재현해 관객의 눈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여주기식 흥미 위주가 아닌 역사속 사실을 근거로 내보여줌으로써 전쟁이 끝난 65년의 시차를 관객들에게 간단없이 극복하도록 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단순히 과거의 크고 작은 시대의 사건을 문서로 기록한 것에 지나지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속으로 역사의 한 부분을 과감히 편입해 현실적 흥미 요소를 가미한다면 또 다른 인문학적 히스토리가 되는 것임을 이 영화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후 장면은 바뀌어 전후 혼란기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전쟁의 휴유증이란게 당시엔 국가적이고 국민적 관심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존재한다. 65년이 흘러버린 시점에서는 당사자의 관심뿐인 소수자의 문제로 거의 잊혀지고 말 것임은 당연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남북 이산의 아픔이란게 이젠 시간이라는 수순을 밟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전쟁은 모든 사람들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이고 죽을 때까지 보듬고 가야만 될 원죄가 되어 평생을 잊을 수 없도록 기억을 자극한다. 영화속에서 주인공인 덕수역을 맡고 있는 황정민이 겪은 전쟁도 마찬가지다. 아이로써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은 자신의 등에 업혀 "매러디스 빅토리아" 호에 탑승하는 순간 놓쳐버린 여동생 막순이를 통해 평생의 업보가 되어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막순이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헤어지면서 아버지의 죽음에 닿는 듯한 절규는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이쯤이면 이미 영화는 성공한 듯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시대를 이끌어 온 아버지 세대의 고통을 뛰어넘는 아버지상을 황정민이 보여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기에 그렇다. 그토록 사지로 뛰어들면서도 가족을 놓지 않았던 아버지는 국제시장속의 "꽃분이네" 가게를 통해 우리 앞에 서 있는 황정민으로 자연스럽게 대체되고 있다. 전쟁통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는 살기 위해 부산의 국제시장을 전전한다. 살기위해 몸부림을 쳐도 타향살이의 아픔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속에 떠나온 흥남을 넘어설 수는 없다. 그 고단함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것도 가릴것이 없었다. 부산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훌훌 던져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제목을 "국제시장"으로선정한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시장의 개념은 단순하다. 이윤이 있으면 팔고 사면 그만인 철저히 사람의 감정은 배제된 곳이다. 거기에다 곧 죽어도 "국제"란 단어를 하나 더 붙여놓아 "국제시장"이 된 것이다. 하필 영화의 제목으로 자갈치 시장도 아니고 그것을 사용해야만 했을까. 이것도 치밀한 윤제균 감독의 의도한 의도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사실 부산을 상징하는 시장의 이름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제시장"을 통해 영화속의 주인공이 6ᆞ25 전쟁보다도 더 참혹할 수 있는 또 다른 전쟁터에 버려져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는 좀 특이한 점이 많다. 주요 스크린속에 듬직한 역사를 끌어다 서사화하여 관객들의 잊혀진 기억속의 역사를 일깨우고 있을 뿐만이 아니고 장면을 극대화시킨다.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의 건장한 처녀 총각이 겪는 타국에서의 고독한 생활을 담아내는 것에 끝나지않고, 석탄 갱도의 매몰을 통해 그려지는 혼란은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터와 다름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암울한 시대지만 지금보다도 훨씬 순정적인 유머 요소도 잊지않고 장면속에서 연출하고 있다. 파독 광부 선발 과정에서의 신파적인 웃음은 생명선을 담보로 처절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덕수의 짐 일수 밖에 없는 가족의 생존 문제가 걸려있는 절박성에 비추어본다면 감히 체면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 장면에서 희화적 요소는 극에 달한다. 다른 것도 아닌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은 전쟁 이후에도 국가에 의한 국민적 정서의 일방향적 몰입도가 어느 정도였는가 되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마저도 가볍게 스치고 갈 수 없는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철부지 여동생의 막 되어 먹는 장면은 생사를 넘어온 가족이 겪은 전쟁의 휴유증이 결코 같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있다. 가장이라는 아버지의 역활을 끝없이 요구받고 있는 덕수역의 황정민에게 집중되고 있는 사회적 강요는 윤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책임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행인 것은 전후의 살아남기위한 처절한 그 와중에도 우리가 살고 있을 시대를 예고하는 꿈과 희망의 조짐도 보여주고있다. 비록 영화가 부산 지역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지만, 주인공 황정민과 끝없는 우정을 과시하는 오달수의 코믹한 연기는 이 영화가 묵직한 스토리로 끝날 수 없도록 한 윤제균 감독만의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시장통의 성공한 상인의 이야기가 아닌 국제시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모든 이질적 요소를 포용해 새로운 삶의 질서를 담아내는 담론적 서사 영화인 것이다. 동남아계의 연인같은 남녀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비하하는듯 시비를 거는 학생들에게 던진 말이 여운으로 남는다. "부산말하면 부산 사람이지" 하며 대드는 장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영화속 주인공이 북쪽의 흥남에서 고향을 등진 채 내려와 그렇게 남한 사람이 되었듯이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마음을 더 열어야할 준비가 필요한 것을 알게 된다.
단순히 보고 웃고 눈물이나 짜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그런 영화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6ᆞ25 전쟁에서 월남전까지 끌어들인 우리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영화이기에 더 그렇다. 자칫 작금의 현실이 하 수상하여 어떠한 의도는 없는 것인가 영화를 보면서 긴장을 했었지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흥남부두에서 철수를 하던 때가 1950년 12월 24일 이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 이상의 많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국제시장" 의 영화는 윤제균 감독의 노력으로 일궈낸 대작임에 분명하다. 영화가 끝나면 서서히 관객들은 부산 국제시장속의 "꽃분이네" 가게를 삼삼오오 찾게 될 것을 확신한다.
첫댓글 회장님 산문력은 자타공인입니다.에고ᆞ, 컴으로 봐야지.^^
ㅎㅎ
감사해요
내일 뵙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