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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죄를 회개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사는 새 사람 - 넘치는 은혜 때문에
1. 은성아, 구원받은 삶이 너무 기쁘다는 네 말이 나에게도 큰 기쁨을 준다. 구원은 곧 은혜요, 기쁨이요, 그래서 감사고 찬송이지.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행 3:6-10)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7-48)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 16:33-34)
그러니 우리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늘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니겠니?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호흡’이며, 그리스도인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있거나 나의 노력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열매요, 그리스도가 주시는 선물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2.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슬픔과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부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찬송과 용기가 넘치는 창조적이고 탄력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 기도할 때에도 죄짓고 사는 연약한 모습만 생각하고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살게 해주신 것과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하며 그 은혜를 충분히 누리며 살아간다. 물론 자신의 연약과 허물을 주님 앞에서 솔직하게 쏟아놓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상한 심령이 중요하다. 그리고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한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를 명심하여야 한다. 어느 순간만 아니라 평생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 평생 자신이 죄인인 것을 한순간이라도 부인하면 안 된다. 요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3.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기에서 받아 누리는 평안과 기쁨을 가볍게 알아서는 안 된다. 요한 사도가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나는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배우고 나서 바울 사도의 고백을 자주 생각했다. 비록 나는 아무 직분도 없었지만 죄인인 나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사실이 너무 감사해서 다음의 바울 사도의 고백이 참으로 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2-16)
제법 오래 전인 1971년에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을 때 이 말씀은 너무나 감격스럽고 흥분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다가 개혁신앙을 배우게 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알게 되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제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답: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위로, 참된 위로, 완전한 위로, 영원한 위로에 대하여 가르친 후에 그 위로 가운데 살고 죽기 위해서 알아야 할 세 가지를 가르치는데 죄와 비참함을 바르게 알고, 구원에 대하여 바르게 안 후에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죄와 비참함에 대해 알고 믿어야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니? 그리고 그것은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큰 죄악이 아니니? 당연히 죄와 비참함을 깨달아 회개해야 하지만 그 죄에 대한 구원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그치는 것도 불완전하고, 이제 구원의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아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 글의 처음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기뻐하고 찬송하였던 것을 기억하자. 자기의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큰지를 바르게 알수록 그 기쁨도 크고 감사도 크다. 그리고 이제 자신을 드려서 주님께 헌신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 전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전도가 진실하여서 힘이 있고, 열매가 있게 된다. 바울 사도가 그것을 고백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4. 내가 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어떤 여학생은 식탁에서 자기 어머니에게 “엄마, 이 반찬이 뭐에요?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버릴까요?”라고 반찬 투정을 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자기에게 당연히 좋은 반찬을 해서 대접(?)해야 하고, 자기는 그것을 당연히 누려야 하며,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머니라도 혼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학생이 나중에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어머니께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모습이 이러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권리라고 하면서 조금만 불만족스러우면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는 우리가 아니냐?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기도 하고, 심한 경우엔 교회에 나가지 않거나 아예 신앙을 떠나기도 한다. 다행히 나중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되면 낮아진 마음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선처(?)를 구하는 자가 되고, 용서를 체험하고 새 삶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지. 그런 점에서 왜 작은 일에도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지, 오히려 짜증과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에 말한 여학생은 자기가 어머니께 얼마나 많은 돌봄과 사랑을 받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눈앞의 식탁만 바라보고 모든 것을 판단했다. 어머니의 수고와 헌신은 도무지 알지 못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신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5. 은성아, 오늘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6문을 중심으로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복을 가르치고 있다.
제36문: 금생에서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에 따라오거나 거기서 나오는 혜택은 무엇입니까?
답. 금생에서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에 따라오거나 거기서 나오는 혜택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과 양심의 평안과 성령 안에서 얻는 기쁨과 은혜의 증진과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앞서 소요리문답 32문답은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금생에서 얻게 되는 대표적인 유익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 의롭다 하심의 복(칭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양자 됨), 그리고 거룩하게 하시는 복(성화)이다. 이러한 복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창세 전에 예정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신령한 복이다. 이 복은 세상의 어떤 재물이나 권력이나 업적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것들이어서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신자가 부르심을 받아서 금생에서 받아 누리게 되는 유익들에는 이 세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가장 크고 대표적인 복들을 말하자면, 그것은 의롭다 하심의 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 거룩하게 해주시는 복을 말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여기에 따라 나오는 여러 가지 복과 혜택들이 있는데 소요리문답 36문답은 그것을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과 양심의 평안과 성령 안에서 얻는 기쁨과 은혜의 증진과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서 그 사랑에 감사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부활시키시고, 그를 믿게 하실 뿐만 아니라 섭리로 보존하고 다스려주시는 것을 깨닫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인정하며 찬송한다.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물질과 권력과 영화에 실망하고 상처받고 아픔을 겪을지라도, 재난과 질병과 전쟁으로 고통을 당할지라도 이 하나님의 사람은 변함이 없고 영원한 것을 확신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그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는 말씀이 사실이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말씀에서 그 주님의 사랑이 원인이 되고 서로 사랑할 원천이 됨을 믿게 된다. 어떤 분의 설명처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신 하나님이 먼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다니 도무지 믿기 어렵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믿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요, 선물이다. 신앙생활에서 이것보다 더 기본이 되고 동력이 되는 것이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고백과 찬송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양심의 평안
죄인의 양심은 평안을 모르고 안식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양심은 평안을 누린다(롬 5:1).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양심의 평안을 누릴 수 없지만 사죄와 칭의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된 사람은 평안을 누리고,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린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확신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믿어서 한없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버지와 같은 손길로 돌보시고, 나의 가는 길을 인도하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때 우리의 심령은 고요하고 평안한데 우리는 이 평안을 “양심의 평안”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기도할 때나 일상생활을 할 때에 이 양심의 평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한다. 가장 무서운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는데 이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가 “양심의 평안”을 누리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은 우리의 영육간에 큰 복이요,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평안은 많은 찬송가의 주제다.
410.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
(2) 주 십자가 지심으로 날 구원해 주셨으며 주 예수님 고난받아 나 평화 누리도다
(3) 나 주님께 영광 돌려 참 평화가 넘치도다 주 하나님 은혜로써 이 평화 누리도다
(4) 이 평화를 얻으려고 주 앞으로 나아갈 때 주 예수님 우리에게 이 평화 주시도다
후렴: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선물) 그 놀라운 주의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성령 안에서의 기쁨
구원은 기쁨과 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면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라고 말했다. 구주에 대한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그래서 찬송가를 보면 구원의 기쁨과 마음의 평안을 찬송하는 것이 많다.
283. 나 속죄함을 받은 후
(1) 나 속죄함을 받은 후 한없는 기쁨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늘 찬송합니다
(2) 나 속죄함을 받은 후 내 맘이 새로워 주 뜻을 준행하면서 죄 길을 버리네
(3) 나 속죄함을 받은 후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 자녀된 것을 곧 증언합니다
(4) 나 속죄함을 받은 후 보혈의 공로로 내 주의 은혜 입으니 늘 평안합니다
후렴:나 속죄받은 후 나 속죄받은 후 주를 찬미하겠네 나 속죄받은 후 주의 이름 찬미하겠네
293. 주의 사랑 비칠 때에
(1) 주의 사랑 비칠 때에 기쁨 오네 근심 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기도하게 하시며 희미한 것 물리쳐 주의 사랑 비칠 때 기쁨 오네
후렴 그 큰 사랑 내 맘속에 명랑하게 비칠 때에 찬송하네
그 큰 사랑 내 맘속에 화평함과 기쁨 주네 그 큰 사랑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는 것이다. 기쁨은 구원받은 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평안할 때만 아니라 환난 중에도 기뻐하는 것이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살전 5:16).
은혜의 증진
넷째는 은혜의 증진(increase of grace)이란 은혜가 성장한다는 말이 아니라, 은혜로 인한 성장을 뜻한다. 해딩턴의 존 브라운(John Brown of Haddington)은 이 “은혜의 증진이란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받고 그것을 잘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은혜 안에서의 성장(growth in grace)’이다”고 말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는 말씀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은 회개가 증가되고, 선행이 증가되며, 그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 인격이 성숙하여 점점 더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본받게 된다. 우리에게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을 노래한다.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면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라고 고백하며 찬송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장성한 후에는 믿음이 어렸을 때를 돌아보며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라고 고백할 것이다. 비록 여전히 부족과 허물이 많지만 이전보다는 자라게 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점점 더 자라게 하실 것을 믿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것
성도의 견인이라고 부르는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계속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도 계속 새롭게 만들어주시고, 나아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
을 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심으로 가능하다. 만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하여 은혜를 공급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영적 퇴보와 영적 고갈, 은혜의 고갈 상태에 이르게 되고 방황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과 진리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방도(means of grace), 특별히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해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을 당하거나 환난을 만나 낙심하고 좌절할 때에도 말씀을 통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연단을 얻게 된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면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1-3)는 말씀을 붙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는 명령에 순종한다.
세상 사람들은 건강의 복, 장수의 복, 재물의 복, 명예의 복을 말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진정한 복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며, 거기에서부터 나오는 또 다른 여러 복과 혜택들, 곧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과 양심의 평안과 성령 안에서의 기쁨과 은혜의 증진과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이러한 복들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감사하고 찬송하다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영광의 나라에서 더 크고 완전한 복락을 누리며 영원토록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6. 은성아, 이런 복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여 보아라. 내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너의 아버지는 큰 부자요, 너를 찾고 있다”고 하면서 아버지를 만나게 하여 주면 이제껏 가난에 허덕여 왔던 나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되지 않겠니? 우리의 영적 상태가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기업을 다 누리는 부자가 되었다. 이제는 어리석게도 이전의 가난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부요를 누리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기도할 때에도 죄만 이야기하고 무엇을 하지 못한다고만 말하지 말고, 이 큰 복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에 대해 말하고, 그 은혜를 찬송해야 한다. 대표기도를 하려고 하면 무엇을 기도할지 생각나지 않을 때 오늘 배운 이런 복들을 생각하면 많은 것들에 대하여 기도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루의 생활을 할 때에도 이런 복과 은혜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면 힘든 일도 가벼워지고, 하기 싫은 일도 기쁘게 할 수 있는 힘이 날 것이다. 억만장자인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은 어려운 사람이 100만원이 필요하다고 할 때 어렵지 않게 도와줄 마음이 있을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보답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의 수고와 고통을 가볍게 여기면서 선행을 할 마음이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바르게 알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로 하자. 바울 사도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는 명령이 어떤 뜻인지를 바르게 알고 순종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