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수제비 뜨는 날
이 난 호
삭수제비는 참 볼품없는 음식이었다.
통밀을 맷돌에 갈아 밀기울 채 그대로 수제비를 뜨는 것으로, 삭수제비에서 ‘삭’의 사전적 의미는 ‘모두’ ‘남김없이’이니 요즘 소위 건강식으로 한참 고임 받는 거친 음식, 통밀국수의 맛과 비슷하다 할까, 어림없다 할까.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가끔 삭수제비를 떴다. 입맛 까다로웠던 할머니가, 상것들의 먹새라 폄하면서도 그 맛을 즐겼기 때문인데 나는 그 게 영 마뜩치 않았다. 색깔에서 감촉에서 맛에서, 그것은 어린 내 입맛을 꼬드기지 못했다. 겉보기부터가 젖은 흙빛 같아 정나미가 떨어지는데다가 크기와 굵기도 족히 어른의 손가락 굵기와 맞먹으니 한입에 넣기에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다. 겨우 베어 물었다 해도 꺼칠꺼칠하고 질깃한 것이 입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질 뿐 혀에 감기지 않았다. 그에 비해 입술 끝에 대자마자 호르륵 단숨에 빨려들어 씹을 새도 없이 목으로 넘어가는 매끄럽고 간간하고 하얀 기계국수의 매력을 따라붙다가 나는 그만 찬밥을 먹겠다고 어깃장을 놓고 만다. 그러니까 집안 식구는 물론 온 동네를 통 털어서 어머니의 삭수제비 솜씨를 타박치는 건 나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삭수제비 뜨는 날의 그 떠들썩한 분위기만은 좋았다.
어머니가 삭수제비 뜰 준비로 큰 광에서 매판을 꺼내어 먼지를 팡팡 털면 나는 자진해서 마루걸레질을 하고 괜히 개밥그릇도 씻었다. 길고 지루한 맷돌소리 끝에 이어지는 왁자지껄한 동네 아낙들의 덕담과 찬사와 흥타령이 벌써 들려오는 것 같아 나는 지레 들뜬다. 아낙들의 흥타령은 일쑤 청승스런 신세타령으로 빠져들어 코 눈물로 마무리되곤 했지만 그 속에 슬쩍슬쩍 내비치는 어른 세계의 어둑한 비의는 흥미로웠다.
삭수제비를 뜨려면 우선 꺼무레한 여름하늘이 필수 조건이듯, 박 서방의 아낙과 보리 짚과 애호박 외에 동네 부잣집의 퀴퀴한 속 소문 역시 빠져선 안 될 구색이었다. 나는 일부러 멀건 표정을 지으면서 일찌감치 어른들의 금역을 드나들며 그들의 흑막을 훔쳤다.
삭수제비가 비록 보암직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별식이었던 만큼 인근 아낙들이 불리기 마련이고, 할머니의 단골 말벗들이 몇 번 맷돌질을 거들다 내쳐 주저앉을 테니까 자연 밀을 퍼내는 어머니의 손이 듬쑥해진다. 따라서 무쇠솥 한가득 삭수제비를 뜨려면 족히 서너 시간은 힘들고 지루한 맷돌질을 해야 하니 그때 남의 흉보기만큼 일손을 가볍게 하는 게 달리 있으랴. 소문의 내용은 되도록 금기의 수위에 바짝 걸리는 아슬아슬한 것일수록 위력 있기 마련이다.
어머니의 맷돌질 단짝은 옆집 박 서방의 아낙뿐이었다. 가난 속에서 노름꾼 남편과 다섯 아이들을 살뜰히 거두는 틈틈이 우리 집 궂은일을 돕던, 태생 성정이 수굿한 그녀는 무엇보다 맷밥넣기의 명수였다. 그녀의 손가늠은 기계 맞잡게 정확해서 맷밥을 너무 적게 먹이느라 끼니때를 어긴 적도 없고, 가늠을 잘못해 설사(거친 가루)를 시키는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어머니의 긴 얘기 발에 함부로 토를 달거나 되물음을 안하는 것, 말허리를 자르는 법 없이 시종 다소곳이 머리만 저금 끄덕이는 것은 어머니와 얘기 궁합이 맞는 이유이면서 맷돌질의 단짝이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자부심이 강해서 만약 박 서방 의 아낙이 분수 모르고 당신 말줄기를 잘랐다면 어머니는 마음이 꼬일 것이고, 맷돌질 리듬이 엉키어 수제비감은 엉망이 되고 박 서방 아낙의 얼굴은 더 엉망이 되었으리라.
나는 몇 번 떼를 써서 맷돌손잡이를 잡아 본 적이 있는데, 내 깐엔 단작스러울 만큼 적은 양의 맷밥을 넣었음에도 맷돌 위짝이 들떠 드르르 겉돌면서 매판으로는 겉껍질만 겨우 터진 밀알이 우수수 쏟아졌다. 이른바 설사였다. 어머니는 매우 무참해하는 나를 매몰차게 밀어내고 혀를 차면서 거친 가루를 쓸어 맷밥으로 되 넣었다, 나는 애매한 박 서방 의 아낙에게 눈을 흘겼다. ‘맷밥만 잘 넣으면 뭘 혀? 무지 가난하면서!’
맷돌소리가 멎을 즈음 낙수 지는 소리는 좀 더 굵어진다. 박 서방의 아낙이 맷돌을 들어내고 어머니는 애호박을 따오라고 내게 소리친다.
나는 신 오른 대잡이처럼 작대기를 찾아들고 빗속으로 뛰어든다. 까슬한 호박잎에 정강이를 긁히지만 나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어진다. 작대기로 겹쳐진 호박잎들을 거칠게 헤집는다. 긴 장마엔 벌 나비도 게을러서 가루받이가 시원찮아 인공수분을 해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 그 참에 꽃가루를 날려주려는 것이다. 애호박 두 개를 따 윗도리 앞섶에 말아 안고 뛴다.
어른의 품으로 한 아름 너끈할 가마솥에서 허연 김이 뭉실뭉실 솟는다. 박 서방의 아낙은 부뚜막에 한쪽 발을 올려놓고 수제비를 뜨면서 다른 발로는 연신 아궁이에 보리 짚을 밀어 넣는다. 넓적한 나무주걱 뒷등에 질척한 수제비 반죽을 철떡 붙이고 놋숟가락 자루로 숭덩숭덩 끊어 던지는데 그 크기와 모양이 기막히게 한결같다. 어머니는 아궁이에서 새어나오는 연기 땜에 눈물을 질금거리면서 솥으로 떨궈지는 수제비 토막들이 서로 붙지 않도록 부지런히 휘젓는다. 끓는 물 속으로 곤두박질했던 수제비 토막들은 금세 익어서 알알이 떠오른다.
수제비 뜨기를 마친 박 서방의 아낙이 잠시 소댕을 덮고 불길을 돋운다. 어머니는 채 썬 애호박과 다진 마늘과 잔칼질한 풋고추를 도마에 쌓아놓고 자못 긴장한다. 이윽고 솥전을 빙 돌아가며 거품 방울이 뿌글거리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잽싸게 소댕을 열고 이불솜처럼 소담하게 피어오르는 허연 김 다발 속으로 도마를 기울인다. 이내 매콤한 밀국수냄새가 확 퍼진다.
때맞춰 심부름 갔던 아우가 정수리에 덮었던 호박잎을 깃발처럼흔들면서, 헌 앞치마를 둘러쓴 아낙들을 뒤 달고 뛰어든다. 빗발 속에서 모두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현대수필가 100인선 <나의 푸른 것들아> 중에서
첫댓글 삭수제비 뜨는 날..그 옛날 삭수제비 뜨는 광경을 눈으로 지켜본 듯, 묘사가 적확합니다..잘 읽었습니다.
옛날 배고프던 때가 눈으로 만져질 것 같습니다. 두 여인이 연기나는 아궁이 위에서 수제비 뜨는 모습도...
거칠고 천한 음식이지만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음식임에 작가의 시선은 멈추고 있군요--
거친 삶이 우스워 보여도 땀냄새를 맡을수 있듯 향토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글에 삭수제비 제대로 먹고 가는 기분입니다-
배가 고파서 인지 침이 꼴깍 넘어가네요--초가집 흙벽같은 글 잘 읽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어릴적 듣고 잊고있었던 말 '소댕' 너무 정겹게 다가오네요
"얘야 소댕뚜껑열면 고구마 쪄 놓은것 있다" 어머님 말씀이 귓가에 맴도네요---
수필 용어는 '아줌마의 일상 용어'가 제일 좋다더니 맞는 말입니다. 단어 하나 하나가 어쩌면 그리도 정감이 넘치는지요.
박서방의 아낙 성품도 잘 묘사했구요. '멀건 표정" 작자의 능청스런 성격이 돋보입니다. 저는 이난호씨의 팬이지요.^^* 감사합니다.
참 실감나게도 쓰셨네요. 정겨운 풍경이 그냥 눈에 훤히 그려집니다. 입에 착착 붙는 글에 입맛 다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