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진실과 현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어린 아이들뿐이다. 그 천진한 어린이들만이 지니고 있는 그 특성은 무엇인가. 어린이들은 비이기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섣부른 지식으로 물들지 않고 그들만의 순수공간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들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눈을 보라. 저 어린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라. 구름 한 점 없는 저 순수공간을 보라. 저 막힘없이 깊고 순수한 공간, 거기엔 아무런 선입관도 없으며 비판이나 관념 따위는 없다.
그들은 계산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 어린이들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그 본질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의 두 단어를 눈여겨보기 바란다.
‘현실(現實)’
‘진실(眞實)’
어린이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현실뿐이다.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 주위에 쌓여 있는 욕망, 이기심, 계산 따위로부터 현실은 시작된다. 단지 현실은 진실의 모방일 뿐이다. 현실은 우리들의 이해를 통해서 형성된다. 현실은 진실에 대한 표면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은 갖가지 다른 부분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진실은 오직 하나인 대자연의 힘으로부터 시작된다. 진실은 하나로부터 시작되나 현실은 수많은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현실은 뿔뿔이 흩어지는 군중이다. 그러나 진실은 통합이요, 완성 그 자체인 것이다. 크리쉬나무티는 말했다. “거부하는 것은 침묵이다.”
(오쇼라즈니쉬의 배꼽 3, 진실) 중에서
현실세계에서 죄짓지 않고 살기는 참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세상의 연자 맷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바다에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연자 맷돌은 엄청나게 크고 무겁기 때문에 절대로 떠오르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다시 꺼내서 사용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주 큰 기중기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라고 하시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현실에 파묻혀 사람들의 주위에 쌓여 있는 욕망, 이기심, 분노, 시기질투, 자존심 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쌓인 모든 것들을 꽁꽁 묶어서 연자매에 매단 다음에 깊은 바다에 빠뜨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는 내 마음에 떠오르지 못하게 아주 무거운 연자 맷돌을 사용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나 그 아픔으로 다른 사람이 계속해서 아프지 않도록 그 욕망이나 이기심이나 모든 죄의 요인들을 다시는 꺼낼 수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인터넷이나 모바일이나 유튜브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기사들의 홍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사 중에서 대부분의 기사가 진실을 알 수 없는 가짜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기사들을 접하면서 사람들의 의견이나 관념이나 생각들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과 현실을 분간하고 식별하기 더 어렵습니다. 사회는 아주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회를 우리는 만들고 있습니다. 그 사회를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는 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지은 죄가 있으면 용서를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용서를 청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라는 말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사실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수도 없이 용서해준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무거운 연자 맷돌에 묶여 바다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용서하지 않고 조금 이해한다고 할 정도입니다. 가슴에 가라앉은 앙금을 없애기는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가슴에 없어지지 않는 응어리는 사실상 완전하게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 응어리를 없애기 위해서는 큰 수술을 하듯 완전히 수술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나도 그렇게 응어리를 없애지 못하고 품고 살고 있습니다. 그 응어리 때문에 가슴에 멍이 들듯 아파도 참고 살았습니다.
응어리를 풀지 않고 참고 견디며 사는 것이 미덕(美德)인 줄로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나 때문에 응어리 진 가족들의 아픔이나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 좋은 대로 살았습니다. 진정으로 용서를 청하지도 않았고, 응어리 진 가슴을 다독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용서하라고 말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살았습니다. 응어리 진 마음을 녹이는 데에는 용서밖에는 없다는 것을 이제야 겨우 알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요사바사해서 결심하고 다짐하면서도 금방 다른 마음으로 또 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이고, 주님의 영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
▥ 지혜서의 시작입니다. 1,1-7
1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2 주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 주시고
당신을 불신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3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권능을 시험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난다.
4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5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한다.
6 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7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축일11월 13일 성 니콜라오 1세 (Nicholas I)
신분 : 교황
활동 연도 : +867년
같은 이름 :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로마(Roma)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로마의 사제로서 교황 세르기우스 2세(Sergius II)를 도와 교황청에서 일했고, 교황 성 레오 4세(Leo IV, 7월 17일)의 차부제, 교황 베네딕투스 3세(Benedictus III)의 고문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858년 4월 17일 전임 교황 베네딕투스 3세가 선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시 교황좌에 앉았다. 그는 늘 문제시되어 왔던 결혼의 거룩함과 불가해소성을 역설하였고,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리우스 2세(Lotharius II)의 이혼과 재혼을 불법이라 규탄함으로써 수많은 정치 문제에 말려들게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와의 오랜 분쟁, 라벤나(Ravenna)의 요한 대주교와의 대립, 랭스(Reims)의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의 야심 등으로 인해 그의 재임기간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는 매우 관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므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정의감은 높은 존경을 받게 하였다. 성 니콜라우스는 ‘대’ 교황이란 칭호를 받는 3명의 교황 중 한 명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니콜라오 1세 (Nicholas I)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