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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은성아, 네 편지를 받고 안타까운 마음과 슬픈 마음으로 한참 동안 기도를 했다. 그리고 최근에 내 친구가 보내주었던 글이 생각났다. 친구도 너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고민하고 있다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갑자기 문제의 해결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글로 적어서 나에게 보내주었는데 네가 읽으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구나. 그리 길지 않으니 잘 읽기 바라고, 특히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내 친구의 마음을 함께 가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요한계시록 3장의 사데 교회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대단히 좋은 글이라고 생각된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1-6)
요즘 마음이 착잡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도 신학교도 타락할 대로 타락했고, 목사나 장로는 불신자를 능가하여 많은 죄를 짓고 있다고 공격하는 말을 듣습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겪은 일들을 늘어놓으면서 은근히 나도 빨리 동의하고, 신앙을 버리라고 재촉합니다. 방송에서도 도저히 목사는커녕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범죄자가 분명한 사람들을 ‘**목사’니 ‘**장로’라고 부르면서 특집방영을 합니다. 주로 돈과 관련하여 저지르는 범죄와 성적인 범죄, 그리고 교회 세습이나 권력(총회장, 총장) 추구와 관련한 죄를 지적하여 비판합니다. 동의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습니다. 의도적인 기독교 죽이기의 냄새를 풍기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어쩌다 주변의 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과연 구원의 신앙을 가진 분인지, 역사신앙 정도만 갖고 교회에 출석만 하고 있는 중인 분인지 확인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저분들이 공산국가나 이슬람 국가에서 살게 된다면 과연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고 굳게 붙들 것인지 슬쩍 궁금하게 생각해 볼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나라엔 아직도 좋은 신학교 교수님도 많이 있고, 교회와 목사님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복음이 전파될 때도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 나아가 여러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너무나 특별한 은혜를 받았고, 지금도 세계 선교에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고 싶지 않습니다. 요즘 듣기에는 미국과 한국을 제외하고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나라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도 전체적으로 보면 건국 당시와 너무나 달라져서 기독교적인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기독교 역사에서 큰 역할을 했던 나라들이지만 지금은 기독교인의 수가 극소수가 되었고, 오히려 무슬림과 공산주의자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며, 선교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을 보면 우리나라는 교회에 문제가 많이 있기도 하고, 신학교 교수나 교회 목회자들 중에 문제를 보이는 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사도신경을 확실히 고백하며, 역사적 신조와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믿고 가르치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여러 방면에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분들과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사역에 문제가 많다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지만, 모든 선교사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의 전부를 다 드려서 주님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도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갖은 수고와 희생을 감수하면서 바른 신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모두 한가지로 몰아서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책망을 받았지만,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앞에서는 심한 책망을 받은 사데 교회이지만 그래도 몇 사람은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만한 인정받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를 비롯한 서신서들을 읽을 때에 교회 안에는 여러 문제가 있고, 약한 자나 배교하는 자들까지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인내하며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최근에 가지게 된 착잡한 심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 사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노아는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불신앙의 세상에서 방주를 만들었고, 결국 홍수에서 구원을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온 땅은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였지만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이 악한 세상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아남은 소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창 6:5-11)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시절에 히브리 산파를 통하여, 그리고 레위 족의 부모들을 통하여 모세라는 지도자를 태어나게 하는 일도 기억해 봅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출 1:15-2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1-10)
용감한 산파들 덕분에 남자 아기들이 살아나기도 했지만 그들을 끝까지 잘 기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상당수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부모가 만든 갈대상자 속에 숨겨져서, 그리고 나일 강에 목욕하러 나온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어 목숨이 보존되고, 왕자로 자라납니다. 나중에 그가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나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출애굽을 하는 것은, 신약시대에 바울 사도가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제국의 심장부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여 결국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도록 한 것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불과 몇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사용됨을 보게 됩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열두 정탐꾼이 돌아와서 보고할 때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열 명의 정탐꾼과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른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오직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두 명만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모두가 죽임을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보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사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말은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라는 말씀입니다. 그 생활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사사기 17장부터 21장까지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의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도 한나와 사무엘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라는 말씀을 보면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고, 엘리와 그의 아들들의 행실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히 무시되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나를 보면 너무나 놀랍습니다.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기도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감사의 기도였고,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기도였습니다. 교만한 자에 대해서 경고하며, 우리 인간들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찬양하며 기도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심판자이시고,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당할 자가 없다는 기도를 합니다. 어두운 사사 시대에 어떻게 해서 이런 믿음의 사람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낳은 사무엘은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옮기는 과도기에 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며 선지자와 제사장직을 겸한 사람으로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은 자입니다. 한나와 사무엘을 생각하면서 저는 어두운 사사 시대에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비판하지 말고, 저런 소수의 남은 자를 보존하시고, 다시 역사를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한나와 비슷한 믿음의 사람이 더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바알 선지 450명과 아세라 선지 400명을 갈멜산으로 나오게 하고 과연 누가 참 하나님인지 대결을 벌인 후 승리하였던 엘리야는 이세벨이 죽인다고 할 때에 도망하여 한 로뎀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죽기를 간구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천사가 와서 깨운 후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먹었고, 다시 잠이 든 후 천사에 의해 일어나 다시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때 그가 하나님께 들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9:2-5)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속 역사는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시점만 잘라서 보면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불의만 가득하다고 판단될 수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곳곳을 살펴보면 우리 눈에 숨겨져 있던 여러 사람들이나 심지어 까마귀를 사용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유대의 신앙적 모습은 너무 나빠서 나중에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으로부터 강한 책망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알려주니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5-6)나 시므온(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과 안나(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 2:36-37)가 그들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육신적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은 말할 것도 없고요(마 1:19-20). 당시 대제사장들의 부정하고 부패한 모습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외식과 불경건은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듯하였지만 말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소수는 여전히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세 가톨릭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목숨을 바쳐가며 성경 말씀을 외쳤던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를 생각하면 신비스럽기만 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통치권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교황과 모든 사제들은 교회를 위해서 성경에 순종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예식을 비판하면서 성경이 모든 것 위에 있는 최종적 권위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후스는 발도와 위클리프를 이어서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였고 설교도 체코어로 했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어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는데, 후스는 죽었지만 그가 보여준 진리에 대한 열망, 실천하는 신앙의 용기는 루터에게로 이어져 다시 살아나 종교개혁의 불꽃이 됐습니다. 유럽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지만, 소수의 개혁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자유를 감사하면서 기꺼이 순교자들이 걸었던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역사는 그 후에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의 삶에서도 나타났고, 오늘날엔 여러 이슬람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생활이 가능할까 의아하지만, 이미 북한의 지하교인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에 C.S.루이스의 『피고석의 하나님』에 나오는 구절이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고대인은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가듯이 하나님께(또는 신들에게) 나아갔습니다. 현대인의 경우엔 그 역할이 뒤바뀌었습니다. 인간이 재판장이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십니다.”
교회와 신학교, 선교사를 비판하는 분들도 혹시 자신이 재판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피고로 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정당한 비판이나 지적은 저도 기꺼이 동의합니다만 그 동기도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도 저것도 다 부정하고,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지극히 의롭고 완전하다는 의식이 있지 않고는 -자신은 부인하거나, 혹은 깨닫지 못할 수 있지만-감히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지적하고 비판받아 마땅한 분들과 교회와 신학교를 어느 정도 들어서 알기는 하지만 그러나 전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아직도 좋은 교회가 많이 있고, 교회 안에 좋은 선생님들도 많습니다. 요즘은 좋은 신앙 서적들이 인쇄되어 나오고, 접하기 쉬운 방법들도 많아서 자신이 마음과 시간을 들이면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아주 많습니다.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교회나 세상 역사는 점점 더 불의하고 악하게 변할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되, 소수의 ‘남은 자’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서 원망과 비판을 없애고, 실망과 무기력을 몰아내며, 오히려 힘을 다하여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