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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대적하며 권력과 부를 추구하나 그 최후는 비참하니 참 보화를 좇아야
1. 은성아, 오늘 다윗이 기도한 시편을 배웠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 32:1-5)
왜 그런 기도를 드리는지 잘 알고 있지? 그가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목숨이 위태로울 때는 절박한 마음으로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난 후에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과 전쟁 중인데, 자신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동침하였다. 이것은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데 앞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왕국이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며, 그것을 들은 그가 얼마나 겸손한 기도를 드리는지를 보게 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무서운 죄를 짓다니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다윗은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았지만 그의 죄의 결과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이 거부되어 밧세바가 낳은 아들은 죽었고, 딸 다말은 이복 오빠인 암논에 의해 강간을 당하고, 이 암논은 다말의 오빠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하며, 나중에는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하면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을 하며, 다윗을 죽이려 하다가 요압이 이끈 군대에 의해 압살롬도 목숨을 잃었다.
2. 『진리의 깃발 161, 2020.02.』에서 읽은 말이 있다.
권위자와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와 태도에 대한 십스의 권면도 눈여겨볼 만하다. 권위자들을 의식하고서는 “권세는 하나님의 위엄의 광채이기 때문에 인간의 위엄을 가장 적게 섞을 때 가장 힘있게 발휘된다”라고 하였고,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는 “상관들의 작은 결점들 위에 사랑이라는 겉옷을 입혀 주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과연 다윗도 왕이라는 위엄을 섞은 권세를 부릴 때에 하나님의 위엄의 광채는 흐려지고 죄의 어둠에 떨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헤롯 왕에 대한 기록도 기억난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0-23)
자기가 인간에 불과한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위치로 떠올리는 소리를 받아들인 헤롯은 죽음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사실 바벨탑을 짓던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들의 모든 계획도 심판을 받아 좌절되고 말았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1-9)
만일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빨리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는 상당 시간에 자신의 말대로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전에는 그렇게 민감하던 다윗이었는데, 이제는 왕위에 있었기 때문인지 이렇게 목이 곧고 마음이 강퍅한 자가 되어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리고 충신 중에 충신인 우리아를 죽음의 자리로 내몰아서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시도까지 하니 이제는 살아계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늘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이 역사의 증거이다. 유명한 시편 2편을 생각해 보자.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12)
항상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바로 헤롯과 빌라도도 역시 그러했음을 사도들은 증거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3-24)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23-31)
그들의 배후에 마귀가 있고, 그들이 사는 악한 세상이 문제이며, 거듭나지 않은 그들의 육신이 문제이지만, 쉽게 접근하면 이 땅 위에서 즉 ‘해(하늘) 아래에서’(전 1:3) 권력과 부를 추구하려는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죄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구약의 여러 왕들이 이것을 추구하면서 백성들을 힘들게 했고, 열방의 여러 침략자들(세상에선 ‘영웅’이라고 불리지만)이 계속 전쟁을 일으켜서 자기 나라와 정복한 나라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를 대표하던 바리새인들이 새로 시작하는 교회를 박해한 것이나 중세 로마 가톨릭이 개신교도들을 박해한 것도 자기들이 누리던 권력과 재산에 도전이 되고, 그대로 두면 너무나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냐?
3.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의 탐욕은 그 결국이 파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것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은 너무나 많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15~2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4. 이런 어리석은 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톨스토이의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화려한 도시 생활을 하는 언니와 시골에서 농촌 생활을 하는 동생의 대화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서로의 생활을 비판하는 두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생의 남편 파홈이 “우리 농부들은 땅만 넉넉하다면 악마나 다른 그 누구도 무서워할 것이 없다”며 편안하고 자유로운 농 촌생활이 좋다는 아내의 말을 거들었다. 땅만 넉넉히 있으면 악마 따위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큰소리치는 파홈의 말을 듣고, 악마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래서 파홈에게 땅을 넉넉히 주고 그 땅으로 미혹하리라 결심한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소유한 대지를 팔기 위해 내놓자 파홈은 그동안 저축한 돈과 친척들에게 빌린 돈으로 계약금을 치렀다. 농사가 잘되어 1년 만에 빌린 돈을 다 갚게 됐다. 드디어 그토록 소원하던 땅 주인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행복했다. 그러나 다른 농부들의 가축이 땅을 침범해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등 잡음이 생기자 파홈은 땅이 좁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해마다 풍년이 되는 비옥하고 넓은 땅을 분양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재산을 팔아 고향을 떠나 이주했다. 그가 가진 땅은 이전의 세 배가 됐고 살림은 그전보다 열 배나 나아졌다. 차차 생활이 안정되고 살림이 불어나자 이곳 역시 좁게 느껴졌다. 그리고 분양받아 농사를 짓기보다 영원한 자기 땅을 소유하고 싶어졌다.
그러던 중 파홈은 적은 돈으로 일 년이 걸려도 다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땅을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곳은 바스키르 원주민들이 사는 땅이었다. 듣던 대로 저렴한 비용으로 넓은 땅을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땅을 얻는 방법도 간단했다. 시작점에서 출발하여 원하는 땅을 괭이로 표기하고 해가 지기 전에 시작점으로 돌아오면 표기한 모든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파홈은 시작점에서 출발해 마음에 드는 땅을 표기하며 걸어갔다. 출발점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놓치기 아쉬운 땅들이 있어 포기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숨이 가빠왔다. 땅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언덕만 넘으면 된다는 생각에 고통을 참고 계속 뛰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지며 극적으로 시작점에 도착했다. 그러나 파홈은 일어날 수 없었다. 그만 숨이 막혀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결국, 그에게 필요했던 땅은 그가 묻힐 반 평 크기의 땅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표현: 파홈에게 필요한 땅은 3아르쉰-210cm-으로 충분했다.)
출발점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더 좋게 보이는 땅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가는 파홈의 모습은 세상의 권력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정치인들 중에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학 교수들 중에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판검사 중에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종교 지도자들 중에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요즘 우리 주변에서 계속되는 재판이 그것들을 잘 보여준다. 그들의 마지막 파멸은 요한계시록 17-18장의 바벨론의 멸망에서 잘 볼 수 있다.
5.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세상은 나그네로, 아니 순례자로 살아갈 뿐이요,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우치시려고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환난도 당하게 하시고 슬픔도 겪게 하시면서 결코 참된 의지가 못 되는 세상에서 눈을 들어 참된 의지가 되고 소망이 되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다. 이 점에 대해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과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다고 했나?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이것을 알면 세상의 ‘허영의 시장’에서 파는 것들에서 눈을 돌릴 수 있고, 진정한 보화가 있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오히려 제자들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을 수 있으며, 주님의 약속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27-30)